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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여인 (왕하 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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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감동시킨 여인 (왕하 4:6-16)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미국에는 지미 듀란테라는 아주 유명한 희극 배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시애틀의 재향군인병원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쇼 기획자에게 자신이 너무 바빠 딱 십 분밖에 출연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서야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짤막한 원맨쇼를 끝내고 나서도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대에서 30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객석의 군인들은 계속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무대 뒤에서 쇼 기획자가 그에게 다가와 의외라는 듯이 물었습니다. ‘난 당신이 몇 분간만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공연료는 약속된 10분 이외에는 더 지급되지 않는데요.’
 
지미 듀란테는 조용히 무대 앞줄의 상이용사 두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둘 다 전쟁에서 팔 한쪽씩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왼팔이 없는 한 병사와 오른팔이 없는 한 병사가 남은 한쪽 팔을 서로 부딪히며 즐거운 표정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보게. 나도 처음에는 그럴 계획이었지만, 저 팔 없는 병사들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었네. 박수라고 하는 것은 두 손이 온전한 사람만이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남은 한 손을 모아서 박수를 치는 저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만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네. 내가 여기서 받은 그 감동은 몇 십 분의 유료 공연보다 열 배, 백 배, 아니 천 배 만 배 더 귀하고 값진 것일세. 그렇지 않나?’

건강한 두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힘차게 박수를 치는 모습도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손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손바닥을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박수는 더 깊은 감동을 만들어 냅니다. 무언가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감동은 더 진한 감동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감동을 만든 한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대단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니다가 수넴이라는 지역에 이르면 한 여인이 꼭 엘리사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단지 지역의 이름을 따서 수넴 여인으로 나옵니다. 수넴 여인의 성품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8절에 보면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라고 말합니다. ‘한 귀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귀하다는 말은 성품이 온유하고 고상하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품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음의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데살로니가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거칠었습니다. 매우 계산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뜻을 표현하는데 매우 거칠고 무례했습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아픔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거친 행동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어 베뢰아 지역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온유했습니다. 성경에는 ‘신사적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번역으로는 ‘너그럽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묵상했다고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시고 생활하셨지만 그 분의 언행과 삶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고상했고, 품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분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예수님을 믿으면 한 순간은 아니지만 그 본성도 조금씩 변하여야 합니다. 거친 모습에서 온유한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과 교회가 고상하고, 품위가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항존 직분자들이 믿음의 품위가 있는 직분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하는 일과 성도들의 생활을 보고 ‘역시 교회의 목회자, 장로, 권사, 안수집사들이 품위가 있어, 교회당은 허름하고 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지만 교회가 품위가 있어’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넴 여인의 고상함처럼 말입니다. 수넴 여인의 고상함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교우들과 교회 가운데 믿음의 고상함과 품위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지역에 들어올 때에 항상 사역에 지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잠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남편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인데 저가 사역을 하는 가운데 지친 몸으로 수넴에 오지만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집 옥상에 조그만 방을 하나 만들어 엘리사 선지자가 이곳에 오면 언제든지 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제안합니다. 남편이 흔쾌히 승낙을 해서 자신의 집 옥상에 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로 하여금 수넴에 올 때 마다 그곳에서 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넴 여인의 극진한 섬김에 엘리사 선지자가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에게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이렇게 배려를 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내가 왕도 잘 알고, 장군들도 잘 아니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라 내가 그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소위 큰 빽을 가지고 있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말하면 내가 그 일을 처리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내가 대통령과 모든 장관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라 내가 다 들어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가족회의를 해서 가장 크고 좋은 것을 요청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의 엄청난 제안을 받은 수넴 여인은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당신을 섬긴 것은 어떤 댓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생활이었을까요? 그러기에 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을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수넴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당시의 문화로 볼 때 아이가 없다는 것은 여인에게 치명적인 아픔이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수치스런 일이었고, 가정에서 멸시 당하고, 집안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수넴 여인이 엘리사의 말에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아무 조건 없이 섬기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습니다. 

수넴 여인의 말을 들은 엘리사는 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14절에 보면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을 사람이 무엇을 받을까? 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엘리사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베풀 사람이 무엇을 더 베풀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교회를 통해 헌신적으로 봉사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적인 섬김을 보시고 감동하셔서 ‘네가 헌신적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줄테니 말하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저와 같은 허물 많고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도 만족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도리어 더 감동하셔서 ‘내가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라고 말씀하시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들이 이와는 정 반대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이것도, 저것도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이제 됐다! 너희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고 서운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말입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내가 저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든 감동적인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감동시킨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여인을 위해 기도하며 아이를 낳게 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몸이 아파 죽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그 아이를 살려서 수넴 여인의 품에 다시 안겨 주었습니다. 

열왕기하 8장에 보면 이스라엘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오랫동안 기근이 계속 될 것을 알기에 수넴 여인을 찾아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말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말에 따라 칠년 동안 고향을 떠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칠년 후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땅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늙은 남편은 죽고 수넴 여인은 홀로된 과부였을 것입니다. 힘도 없고 억울할 일을 당한 수넴 여인을 엘리사가 다시 도와줍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호람은 엘리사와 그의 종 게하시를 통해 수넴 여인의 아름다운 일들을 전해 듣고 감동을 받아 그녀의 땅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7년 동안의 소작료까지 모두 받아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가정을 정성을 기울여 돌봐줍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며 고상한 믿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돌아보는 수넴 여인의 가정에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오벧에돔의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모습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수넴 여인의 가정이 복을 받은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정을 보면 하나님이 감동하실만큼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되어 우리의 가정에 복의 통로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일꾼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되어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를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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