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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 공경의 원리 (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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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공경의 원리 (출 20:12)

시골에 있는 부모님이 5남매를 두었습니다. 3남2녀 입니다. 밭팔고 논 팔아서 서울 대학을 다 졸업시켰습니다. 재산을 다 팔았기 때문에 서울 자식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막내아들이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비는 방이 있어서 그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형들이 20만원씩 돈을 주어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이 그 방에 불을 넣지 않아서 냉방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 이듬에 봄에 산에 올라가서 진달래를 꺾어 품에 안고 서로 마주보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서에 ‘나는 있을 곳이 없어서 죽습니다.’ 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또 어느 사람이 보따리를 하나 가지고 와서 집을 계약하자고 왔습니다. 방 하나를 계약하기 전에 500만원을 주면서 내가 있을 방에 이 보따리를 놓고 갑니다. 그리고 곧 와서 계약하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간 다음에 보따리가 중간쯤 열려서 자세히 보니 치매가 있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으로 많은 나라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던 나라였는데 서국의 악한 문화와 문명이 흘러 들어오면서 이 민족이 예의와 예절을 버리고 점점 죄악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누구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부모를 학대하고 노인을 괴롭히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반찬 투정을 한다고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한다거나 어머니가 유산주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살해하는 이런 비슷한 일들이 우리주위에 너무나 만연돼 있습니다. 부모를 잘 섬기고 못 섬기고 하는 문제는 거의 논란이 되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 불효 이유? - 

1. 감사 잊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은혜를 잊어버리는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말세에는 감사하지 아니하며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식들이 별로 없습니다. 감사는 하나의 이론이요 생각뿐이지 그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섬기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자녀들은 별로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시대가 너무 악해졌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악한 시대가 됐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처럼 부모님의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혹시 양육하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상처받은 것이 있으면 이것가지고 평생 동안 부모를 원수시하는 자녀들이 우리주위에 요즘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런 악한 시대가 됐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가 마지막 때요 말세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말세에는 감사치도 아니하며 부모를 거역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천대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가는 현실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제 노인들이 수난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눈치를 보며 쩔쩔매야하는 시대로 바꾸어진 것 같습니다. 

2. 극단적 이기주의, 개인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잘 살고 내 가정만 잘 살면 되지 부모님은 걸리는 존재가 됐습니다. 부모님을 내 가족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부모마저도 거역하는 시대고 되고 말았습니다. 극단적인 무사 안일주의 편리주의가 오늘날 부모를 점점 멀리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3. 편리주의 안일주의 

어떻게 하든지 편안하고 부모 없이 자식들끼리 안일하게 편리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누구 간섭받기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는 시대가 됐습니다. 누구 말 듣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기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고 간섭 안 받고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편리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사회적 악한 환경 

주위 환경이 점점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주위 환경이 부모를 섬기고 받드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 갖는 것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부모에 대해서 잘못하고 있으니까 세상 그렇지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악한 풍조가 점점 일반화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눈 둘 있는 사람이 눈 하나있는 동네에 가면 병신 취급받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부모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표창을 해야 될 만큼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가 됐습니다. 

구약에 아브라함 같으면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좋든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조상 아닙니까? 야곱도 그렇습니다. 첩을 두는 것을 거르지 않고 첩을 몇 명씩 거느리고 살았던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 사회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첩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를 첩을 데리고 사닌가 그것이 일반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이 죄인 줄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고 죄인 줄로 알았다면 하나님이 금하는 것인 줄 알았다면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이 그렇게 했을 리 없습니다. 부모님을 잘 안 섬기고 오히려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될 장남의 가정에 시집보내는 것을 누구나 싫어하고 당연한 줄로 알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딸 가진 부모들은 장남인 사위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들에 대해서 소홀이 하고 무용지물로 생각하고 빨리 없어졌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오늘날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가 너무 악해졌습니다. 교회도 사회도 오염되어지고 사회 악한 풍조가 교회까지 들어와서 오늘의 교인들도 그런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요즘에 노인들이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노인 자살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전체 자살자 수에서 제일 많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제일 서글픈 일입니다. 살아야 될 아무의미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도 사회 오염이 되고 사회 악한 풍조가 교회까지 들어와 오늘의 교인들도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에 노인들이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노인 자살자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전체 자살자 수에서 제일 많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모릅니다. 살아야 될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살려고 하니, 나이 들어 몸은 점점 병들어 여기 저기 아프지요, 자식들은 천대하죠. 살아야 될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에게 상처주지 아니하도록 날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드려야 할 것입니다. 

5. 사단 역사 

마지막 때가 되다보니 사단이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는지, 우리의 가정 가정이 행복하게 편안하게 사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가정, 가정에 부모를 홀대하고 업신여기는 이런 풍조를 계속해서 만연시켜 가고 있습니다. 요즘에 대전에도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노인 병원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기면서 많은 노인들이 노인병원에 가게 됩니다. 물론 가정 가정마다 다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부부간에 직장 나가고, 아이 학교 나가고 어른을 모실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요양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양병원까지 가는 것도 좋지만 요양병원에 모신 다음에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가지 않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까 간호사들이 노인들을 업신여기고, 혹은 두들겨 패기도 하고, 멸시천대하고, 그렇게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럼 언제 찾아오는가 하면 이제 돌아가실 때 유산 받으려고, 싸인 받으려고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제가 벌써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 들은 얘기인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노인 요양병원을 바로 현대 고려장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고려장이라고 산속에 갖다 버리나, 요양병원에 갖다 버리나, 버리는 건 일반이고, 돌보지 않는 것이 일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마음은 있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우리 자성하고 바로 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모님 효도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고, 이 점에 대해서 큰 소리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으로 서로를 반성해보고, 이런 때에 이런 문제를 깊이 다루면서 우리가 정말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으로서 정립해야 될 귀한 기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1. 신앙 타락의 시작 

부모에 대한 잘못된 태도 부모를 바로 섬기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의 타락입니다. 우리가 무슨 한국교회가 타락했다. 사회가 타락했다고 말하기 앞서서 먼저 내 자신이 타락하지 않았나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 그 중에 바로 오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오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계명에서 사계명까지 또, 인간에 대한 육 계명에서 십계명까지 그 중간에서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교회 나와서 중직을 맡아서 이런 직종 저런 직종 맡아서, 열심히 일하지만 집에서 부모를 잘못 섬긴다고 하면, 그 신앙은 바로 된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인데, 원수는 고사하고, 내 집에 계시는 나를 평생 키워주시고, 나를 양육해주신 부모님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그 사람이 어떻게 참다운 교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가야될 가장 근본적인 삶,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될 가장 근본적인 행동, 예의가 바로 부모님을 먼저 공경하는 것입니다. 윤리도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고, 신앙도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윤리의 기본이고, 신앙의 기본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건 윤리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결코 잊으면 안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타락이 무엇이 타락입니까? 나가서 무슨 술, 담배 엉망으로 먹고 노름하고, 외도 이것만이 타락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 내가 의당히 섬겨야 될 부모님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이 신앙의 타락이 아닌가 그 말입니다. 

2. 말세의 징조 (부모 거역하는 일) 

부모를 거역합니다. 이것은 말세의 징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신앙인답게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고,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드리지 아니하고, 부모님 남 몰래 눈물 흘리지 아니하도록 부모님을 잘 섬기고 받들어야 될 책임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 없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태어나서 부모님의 보살핌과 양육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고, 이만큼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말세의 징조인 부모를 거역하는 일,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는 일, 이런 일들은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히 이것을 배역하고 다시 부모님을 잘 섬기는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파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질서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서를 주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파멸됩니다. 죄성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도전하게 하고, 비판하게 하고, 공격하게 하고, 파괴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이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사회 질서를 세웠습니다. 

질서란 가정에 부모를 모시고, 부모에게 권위를 주시고, 권위자로 세웠습니다. 사회에는 각 분야에 장들을, 교회에는 지도자들을 또 나라에는 대통령을 하나님께서 권위자로 두었습니다. 또 학교에는 선생님을 세우셨습니다. 이 권위에 우리가 순종할 때에 그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우리보다 잘 되고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서 훌륭해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 아래에 우리가 복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자에게 순복하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롬13: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우리가 부모님을 거슬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이론적인 종교관이 아닙니다. 생활의 종교입니다. 

신앙과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요, 이것은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 하나님 경배가 바른 경배가 되고, 그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엉망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것이 성경의 원리 아닙니까? 권위는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4. 윤리 파괴 (인간사회 무너짐 동물) 

부모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윤리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물 사회는 아무리 어미가 잘해줘도 새끼가 나가면 일단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부모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잘 알아보는 윤리적인 사회입니다. 윤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거역하고 업신여기면 윤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바로 동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늙어서 죽게 될 쯤 되면 공동체를 떠나서 홀로 어떠한 장소에 가서 죽는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 모르게 홀로 어떤 장소에 가서 죽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동물에 불허하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생각해야 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 앞서서 먼저 내가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고 있느냐? 내가 사람과의 관계에 앞서서 내가 부모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고 있느냐? 부모님과의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고, 가장 우선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 보여주는 열매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보살피고, 관심을 가지고 이것이 바로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노력해야 됩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바로 돼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것입니다. 

* 십계명 - 12지파의 헌법, 신령한 이스라엘의 기본 헌법, 기독교 윤리 현장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건 열두지파 이스라엘 민족의 헌법이고, 우리 영적인 이스라엘의 성도들의 헌법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기독교 윤리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십계명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바로 얘기해 주시면서, 십계명을 조금도 변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될 삶의 근원이요, 행동 강령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지킬 때에, 구원을 받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은 구원받은 자가, 감사 감격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십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뇌성과 폭풍과 또는 빛 가운데에서 친히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새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십계명은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번씩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이 법궤 속에 들어가 있는 우리 삶의 법칙이요, 가장 귀한 것입니다. 

1. 부모란 말의 의미 

1) 선조 

십계명 중에 제 오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부모라고 하는 뜻은 첫째는 선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1: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부모라는 말, 아버지라는 말은 선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위에 있는 자, 권위자, 주권자, 앞선자 

두 번째, 부모라는 말 아버지라는 말은, 위에 있는 자, 권위자, 주권자, 앞선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바로 우리 위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권위자입니다. 하나님이 권위 주었습니다. 주권자입니다. 또 우리보다 앞서 있는 자입니다. 명령이 없는 세대는 비참한 세대요, 암흑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말씀, 부모님의 명령, 부모님의 교훈, 이것이 우리의 삶에 양약이 되고, 우리 삶을 인도해가는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소자들아, 또는 아비들아’ 여기서는 인간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위에 있는 자, 앞선 자, 주권자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왕하5장)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이스라엘에 왔을 때 엘리사가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담그라고 할 때에, 그만 마음이 상했습니다. 우리 아랍에도 이보다 더 좋은 강들이 많이 있는데, 왜? 여기에서 목욕을 하라고 하는가? 그 때 그 종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이보다 큰일도 하라면 하지 않았겠습니까?’ 거기에 내 아버지여 이것이 바로 부모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상관도, 주인도 역시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권위가 있는 겁니다. 

(갈4:19) 사도 바울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 영적으로 자기가 부모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왕하2:12)엘리사 선지도 회리바람을 타고 병거를 타고, 올라가게 될 때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스승에 대해서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현대적인 관계에서 친부모 의미 
  
① 하나님은 부모를 이 세상 모든 영역의 대표자로 세우심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부모가 얼마나 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깊이 알고 살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부모님은 어느 영역에 있어서도, 가정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② 가정의 권한 - 부모에게 위임 - 주 안에서 권위 
어떠한 장소에 가서 무슨 일 하든지, 부모는 가정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③ 부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축복의 매개체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부모를 축복의 매개체로 세우셨습니다. (고전4:14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사랑하는 내 자녀들 같이 내가 너희를 권하려 하는 것이라’ 다시 말하면 교인들을 자기의 자녀처럼 생각을 하고 자기는 부모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모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네 생명이 길리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합니다. 부모 공경하면 축복해 주겠다 하고 부모 공경 안하면, 하나님이 저주한다고 했어도 부모 공경에 대한 축복을 갈망하지도 아니하고,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이 너무나 무감각해졌습니다. 신앙이 병들었습니다. 세상 사회 어디든지 우리들이 부모를 바로 공경하는 방향으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해봅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듣고 반성할 것 반성하고, 갈 길을 바로 바꾸어야 됩니다. 불신자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2. 효 방법 

1) 부모가 원하는 데로 하는 것 

우리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부모님이 원하는 데로 해 드려야 됩니다. 부모님의 노후를 또 책임져 됩니다. 부모님의 노후를 우리가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려야 됩니다. 무슨 쓸모없는 물건처럼 함부로 대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순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는데, 이 요왕 시대에 순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복 엄마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복 어머니에게 홀딱 빠져 둘이 합작해서 순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은비녀를 우물 속에 떨어뜨려놓고, “야, 가서 은비녀 건져와” 그랬습니다.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가지고 나오려고 하니까 위에서 막 퍼붓는 것입니다. 죽으라고 그런데 마침 밑에 구멍이 뚫려서 살아났습니다. 그 다음에는 곡식 중에 썩은 걸 씻어 지붕에 널어 그것을 거두려고 지붕에 올라갔더니 밑에서 막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 삿갓이 있어 그걸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때 순이 내가 왜 살아야 되는가 하면 ‘우리 아버지가 평생 동안 아들을 죽였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한을 두지 않기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효자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요 황제가 순을 후계자로 삼아서, 왕으로 삼고, 요순시대라고 해서 아주 중국의 평화롭고 번성한 시대로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모를 잘 받들고, 효도하는 것이 복 받는 길이고, 이것이 인간다운 길이고, 더 나아가 이것이 신자다운 신자가 되는 것이고, 신자구실 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부모님 홀대하면서, 교회 와서 이런 직책 저런 직책 맡아서 열심히 일 하는 것 그거 나쁘다 할 수 없지만 부모에게 잘못하면 어떻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오래 믿은 만큼, 오히려 중직을 맡은 만큼 먼저 부모님에게 잘해야 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안에서 잘하고 밖에서 잘해야지, 안에서 엉망이고, 밖에서만 잘 한다고 하면 어떻게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아버지와 더불어 길을 걷습니다. 추운 겨울에 눈이 하얗게 왔습니다. 아버지가 술에 만취되어 가다가 그만 눈 위에 덜렁 누웠습니다. 어린 아이가 옷을 벗어서 아버지에게 덮어주고, 거기서 같이 자다가 두 사람 다 동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동방예의지국이고, 부모 알기를 하늘처럼 알았던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까, 몰래 몸의 살을 뜯어 가지고 잘라서 부모님에게 해드렸다는 그런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원래 예의지국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잘 섬기고 받들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며느리들 때문에, 남자들이 남편들이 부모 잘못 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부모와 부인 사이에서 그만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2) 노후를 보살펴 드림 

룻 보십시오. 돈도 없고 가난하고, 완전히 망한 할머니, 남편도 죽었지, 세 아들 죽었지, 그것도 이방인입니다. 외국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당신이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을 내가 믿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예루살렘 이국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잘 섬김으로 인하여 복을 받아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유명한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정신 차려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우리 인간으로써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선해야 될 일, 가장 삶의 중심에 두어야 될 일, 효도하는 일,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매일매일 같이 생활에 옮겨서 여러분의 삶이 은혜롭고 평화로운 모범적인 삶, 축복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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