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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빚 탕감의 사명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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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설교제목 : 빚 탕감의 사명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1~35)】

 

  <성경 이야기>

  오늘 성경은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오늘 성경은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 핵심 속에는 ‘빚을 탕감해 주는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아마 추정하건대, 기록자인 마태가 예수의 메시지를 기록하면서 ‘빚 탕감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용서 이야기’로 그 기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오늘 성경의 핵심적 메시지는 ‘빚 탕감 이야기’이고, 저는 오늘 그 ‘빚 탕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빚 이야기, 희년 이야기>

  고대시대에 이스라엘은 ‘빚을 탕감해주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희년 제도입니다. 50년에 한번 꼴로 고대 이스라엘은 “모든 빚을 탕감해 줘서” 모든 이들이 평등한 가운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용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빚 탕감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는 예수의 독창적인 견해라기보다는 고대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중전통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독특한 관습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빚 탕감 전통’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빚의 증가’가 개인적 차원의 결과물인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 제도적 차원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흥청망청 사는 사람들이 빚을 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 그래서 그런 경우의 빚은 아무런 변명거리도 안 되지만 - 근원적으로 보았을 때 ‘빚의 증가’를 사회제도가 만들어 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의 빚, 서민들의 빚>

  우리나라 전국의 농가들마다 억대의 빚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 전국 요소요소의 땅들을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준 농협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농민들은 왜 빚을 질까요? 그 농민들 전체가 매일매일 흥청망청 돈을 써버려서 눈덩이 같은 빚을 지는 것일까요? 글쎄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농가부채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에서 찾아져야할 것입니다. 196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국가운영 전략은 ‘공업화’였습니다. 즉 농업화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운영기조를 공업화로 세운 후 모든 물적 인적 지원을 공업화에 쏟아 부었습니다. 당연히 농업쪽은 ‘우민화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1960년대 이래로 최근까지 젊은 청년이 농사를 짓겠다고 나서면 바보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농업’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는 분야로 만들어 놓았으니, 농민은 빚이 늘고 농협은 땅이 늘어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도시 서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 없고, 빽 없고, 능력 없고, 학력 없고, 재산 없는 도시 서민들이 악독 사채 업자를 만나서 그나마 몇푼 돈 마저 빼앗기고, 때로는 인생자체를 망치는 비극적 현실은 인류가 만들어 놓은 ‘구조적 병폐’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책 이야기>

  요즘 『나는 사회주의자다』(고토쿠 슈스이 지음, 교양인출판사)를 의미 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책의 내용 중에는 우리들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할 소중한 메시지들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빚 문제’와 관련해서. 그래서 그 내용을 일부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릇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천지의 가장 중요한 법이다. … 그런데 돈을 가진 자는 모두 무위도식한다. 단지 무위도식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의식주 대부분을 빼앗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석가가 개탄하고 예수가 통분한 일이다.】

【예쁜 옷을 걸치고 맛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항상 소비자이지 생산자가 아니다. 일거에 수천만원의 부를 얻는 것은 항상 투기꾼이지 생산자는 아니다.】

【사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자본가 전체를 죄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본가는 모조리 잔인하고 각박한 사람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자유경쟁이 결국 자본가를 저도 모르게 각박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을 어쩌겠는가. 무릇 자유 경쟁은 비단 노동자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자본가도 거의 견디지 못하게 한다.】 【토지와 자본 등 모든 생산수단은 인류 전체를 생활하게끔 하는 근본 요건이다. 이것을 독점하고 점유하는 것은 곧바로 인류 전체의 생활을 좌우하고 삶과 죽음을 제압하는 것이다. … 그리고 지주와 자본가로서 끌어 안은 재부(財富)는 결코 근면과 검약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조상의 양도다. 어떤 것은 투기의 승리다. 어떤 것은 이자의 누적이다. … 그들은 조금도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따뜻하게 포식하고 편안히 놀면서 다수 인류의 노동결과를 약탈한다. 그리고 약탈한 부는 더욱 전화하여 자본이 되고 다시금 많은 부를 약탈하는 무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동안에 부유한 소수는 더욱더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다수는 더욱 더 가난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 지는 푸르동(1809~1865)은 “재산은 강탈의 결과다. 자본가는 도적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책의 글들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시금 여미었습니다. 우리가 극렬한 사회주의자, 혹은 폭력적 무정부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이 책의 이야기에는 우리들이 가슴에 깊이 담아야할 아주 중요한 메시지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비판적 읽기>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볼까요. ‘빚 탕감 이야기’를 용서의 관념과 연결시킨 마태의 기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빚을 탕감해주는 일은 은혜를 베푸는 식의 용서 차원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를 진정한 벗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나 당연히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빚 탕감의 사명>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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