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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과 화

  •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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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목 : (26강) 복과 화 
본문 : 눅6:20-26  
 2012-09-02


<본문>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설교>

 

◉ 현실과 다른 말씀 ◉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19절의 말씀대로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신기한 일일 뿐이지만 병든 사람들, 그것도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은혜의 경험이고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몰려 왔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와 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쓴 것입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오니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를 만지고자 한 것입니다.

 

민중들이 그리고 병든 자들이 모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열광하며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복 있는 자와 화가 있을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전통과 상식과 기대와 소원 그 모든 것을 뒤 엎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즐거움과 행복이 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삽니다. 그리고 풍요와 즐거움과 행복을 제공해주는 그 모든 것들을 복으로 여깁니다. 복 있는 것과 화 있는 것의 기준이 세상에서 얼마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는가로 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처럼 풍요를 누리는 나라는 복 받은 나라로 여기고 에디오피아나 소말리아 사람들은 저주 받은 나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는 나라이기 때문에 복을 받았고 에디오피아나 소말리아처럼 기아에 시달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까요?

 

풍요가 복이고 빈곤이 저주라는 시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 해석 문제에 있어서 참으로 곤란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과 주림, 즉 빈곤이 복 있는 것이고 부요가 화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누구도 빈곤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요를 화, 즉 저주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괴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씀이 성경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르면서 성경이니까 ‘아멘’하는 것입니다.

 

결국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20-23절)는 말씀은 추상에 머무르게 될 뿐입니다.

 

◉ 예수님이 복음이 되는 사람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이사야의 글과 연관이 있습니다. 4:18절에 있는 이사야의 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 되고, 예수님이 오신 지금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오셨고 따라서 부요한 자들은 아예 복음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는 일단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인데, 성경은 천국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글은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신다는 뜻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부요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아닌데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 주린 자들, 지금 우는 자들, 인자로 인해서 미움과 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시고 복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글에는 이들이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에게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은혜의 나라는 가난과 부요가 기준이 되어 차별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차별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한 자로 낙인 찍혀 무시 받는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소유와 업적으로 판단 받고 그에 따른 대우를 받는 세상에서 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의 나라는 소유와 업적으로 대우 받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주어진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이 크다 인정을 받습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 있어야 인정받는 나라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어야 크다고 대접 받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한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게 하셨기에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다.


◉ 복 있는 자 화 있는 자 ◉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4-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가 이 말씀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 말씀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해 고민을 했다면, 적어도 예수님은 내가 부요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부요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성경은 덮어 버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교회가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화 있을진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천국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흘러갈 때 들어갈 수 있는데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시하면서도 천국을 말합니다. 정말로 천국에 관심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눈길을 돌려서는 안되는데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짓밟고 있으면서도 천국을 말하는 모습들이 한마디로 코미디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셨다면 신자는 가난한 자가 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신자다운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믿는다면 부요한 자가 되어서 부요를 위로로 삼는 인생은 되지 않아야겠다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옥에 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진 것이 없고 힘으로 내세울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힘과 능력이 되시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생명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다는 복음앞에서 세상의 모든 힘과 능력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있어서 그것을 자기의 힘과 능력을 삼고 자랑하는 부요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자신의 힘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요한 자들은 화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가난과 부요의 의미 ◉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말씀한 가난과 부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힘과 능력으로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상태가 가난이고, 반대로 내세울 것이 많은 힘과 능력이 있는 상태가 부요인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복으로 여기며 그 복으로 위로를 받고 웃으며 살았기에 천국에서의 위로와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요한 자가 화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겠습니까? 지금 주린 자가 복이 있고 지금 배부른 자가 화가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고 지금 웃는 자가 화가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겠습니까?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그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리는 것이 복이 있고 사람이 칭찬하는 것이 화가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 우리를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버림받은 복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그러한 복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하면서 부요를 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예수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의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십자가의 세계에서 인간이 가졌다고 하고 힘과 능력으로 여기는 것들이 생명의 문제에서 얼마나 무능력하고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힘으로 여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무너지게 하셔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로 예수님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란 십자가의 세계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절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만이 참된 복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헛됨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의 것 때문에 주려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대해 주려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감으로써 배부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십자가로 인해서 자신의 죄로 인해 울게 되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웃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보면 복은 세상에서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되고 칭찬 듣는 몸이 되고 인정받는 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 되어 사는 것을 소망하게 되는 그것이 곧 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복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배부름을 얻고 기뻐하기 위해 예수를 찾지도 그 이름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다만 나를 가난하게 하시고 주리게 하시고 울게 하시고 인자로 인해 미움 받고 욕먹고 버림받는 복된 사람으로 만드실 예수님을 찾고 이를 위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자 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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