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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증거자

  •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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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목 : (27강) 사랑의 증거자 
본문 : 눅6:27-38  
2012-09-09


<본문>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설교>

 

◉ 말씀과 현실 ◉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자유라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시고, 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 곧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굳이 뭔가를 받아야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 해주신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뭔가를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자에게 함께 해주신 그리스도께 대해 감사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마음을 주께 두고 있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오로지 받기 위한 목적으로 주를 찾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과 나에게 함께 해주신 것의 존귀함과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자신의 육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육신에 도움이 되는 예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로 족하고 감사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몰려온 많은 무리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병 고침을 위해서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다면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육신의 병 고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은혜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베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은혜에 대해서는 소경과 같았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생각하는 주의 나라는 부요한 나라고 배부름의 나라고 웃음이 있는 나라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 앞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라는 내용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미움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이 저주의 모습인데,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주의 나라가 세상의 가치관의 기준과 전혀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참으로 부담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주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편한 마음으로 읽기가 매우 곤란한 내용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은 우리의 가치관과 상식적인 기준의 틀에서 벗어난 내용이기에 읽기가 곤란했다면 오늘의 말씀은 너무나 옳고 뛰어난 교훈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로서는 도무지 실행할 수 없음을 알기에 부담이 되는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중심 가르침이 사랑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원수고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자라는 것이 우리를 난감하게 하고 무력감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원수까지 품어야 하는 사랑이기보다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유대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보다는 보복이 더 강하게 우리의 현실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이나 자비하라는 말씀들은 사실 공허한 가르침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교회에서도 사랑과 자비는 이미 공허한 가르침이 되어 무용지물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 몸을 담고 있고 같은 지체라고 하면서도 서로 입장을 달리 할 때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마치 정치인의 놀이처럼 서로를 비판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이처럼 현실이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실천의 수준 ◉


그러면 예수님은 도무지 실현 가능성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이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단순히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구조가 그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나름대로 사랑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당시 율법을 삶의 근간으로 삼고 있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것을 실천하며 스스로를 신앙에 있어서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힘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의 수준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은 죄인들에게도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칭찬받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과 34절의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는 교훈적 권면이 아니라 이미 나름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뭇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는 자들에 대해 그 같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칭찬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2-34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와 ‘죄인’이라는 말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는 일은 죄인들도 그렇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칭찬 들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너희’와 ‘죄인’으로 구분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의미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20절에서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는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를 받았던 세리 마태가 있고,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제자들이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칭함 받을 만한 사람들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죄인이 아닌 의인들인 것처럼 ‘너희’와 ‘죄인’으로 구분하여 말씀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을 보시고 가르치시는 것이라고는 해도 열 두 제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7:1절의“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제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빗대어 하신 말씀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과연 누구일까요? 당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하여 차별적으로 대했던 사람들은 율법 실천에 사활을 걸었던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천적 삶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칭찬을 들었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실천을 그들이 죄인으로 구분하여 차별하는 사람들의 실천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고, 그 같은 사랑은 죄인들도 하는 것이고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칭찬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선대하고 이웃에게 꾸어주는 것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무엇을 하든 자신이 중심에 있고, 자신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칭찬들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을 초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칭찬 받을 것이 전혀 없으며 우월한 것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판하고 판단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주의 은혜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자격 없음 ◉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열심이 있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칭찬을 기대하고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설령 누군가의 칭찬이나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않은 열심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열심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축복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한 것이 있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비춰보면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칭찬들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복을 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여기며 배부름을 얻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35절의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 앞에서 과연 스스로를 상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악한 자에 지나지 않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 받고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된 것도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희생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부요하고 배부름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는 내가 잘해서 상을 받고 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없습니다. 잘했다고 내어 놓을 것이 전혀 없고, 모든 것이 못한 것뿐이지만 그것 때문에 벌을 받는 다면 우리가 있을 자리는 저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은혜의 세계에 불려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여러분을 그만큼 살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은혜를 훼방하고, 영광을 가로채는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을 알고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에 감격해 한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원리로 마음에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우리 자신이 묻혀 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나라는 존재는 내어 놓고 칭찬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내어 놓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사랑의 증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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