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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로 아나니

  •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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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목 : (28강) 열매로 아나니 
본문 : 눅6:39-49  
2012-09-16


<본문>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설교>


◉ 루터의 세 가지 명제 ◉


종교 개혁자인 루터가 주장했던 세 가지가 있는데 ‘오직 성경’ ‘오직 은혜’‘오직 믿음’입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기독교, 특히 장로교회가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주장과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루터가 주장했던 세 가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자신들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온전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당연시한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자의 신앙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결국 교회의 대표자의 자리에 있는 사제가 교인들의 신앙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권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회의 권위는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오직 성경만이 권위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성경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목사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규정하는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교인들에게 성경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며 은연중에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목사의 권위 아래 붙들어 놓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오직 성경’은 교인들만이 아니라 목사에게도 해당됩니다. 즉 목사 자신도 성경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지 성경을 내세워서 교인들을 판단할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는 주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은혜와 함께 인간의 공로, 즉 행함 또한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라는 사실만을 내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라는 말은 행함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현대 교회는 여기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복의 근거로 인간의 행함을 내세우고, 누구의 행함이 더 나은지를 비교하며 신앙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현실입니다.

 

‘오직 믿음’ 또한 신자가 의로운 자로 여김 받는 근거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 또한 카톨릭 교회가 행함을 근거로 해서 의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에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 믿음과 행함 ◉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직 믿음이 옳습니까? 그렇다면 행함을 근거로 의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에서는 벗어나 있는 것이 믿음의 길을 바르게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에 대해 옳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바른 믿음의 길을 간다면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삶이 변화 된다면 분명 그 행함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오직 믿음’에 동의하면서도 행함을 배제하지 못하고 믿음과 연결시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는 말을 근거로 하지만 야고보서가 말한 행함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행함의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 은혜, 믿음을 말하면서도 그 본질을 잃어버린 채 껍질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신자의 행함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즉 행함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신자라면,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온 마음을 두고 하늘에 소망을 둔 믿음으로 산다면 분명 그 삶은 교회 안에서 덕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모범을 보이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즉 43절의 말씀처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행위가 신앙 규정의 절대적인 규범과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결국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하고 행위에 기준을 둠으로 인해서 비판과 헤아림이 자리하게 되고, 41절의 말씀처럼 자신은 보지 않고 타인의 허물에만 집중하는 양상만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 맹인의 인도 ◉


39절에서 예수님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맹인은 인도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 남을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남을 인도하려면 반드시 가는 길, 가야 할 길을 알아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맹인은 길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눅 4:18절에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눈 먼 자를 보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으며, 여기서 눈 먼 자는 당시 유대인들, 그것도 유대교 율법주의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눈 먼 자, 즉 맹인은 단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응하게 된 은혜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어떠하든 예수님이 그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유하게 하시기 위한 오심이기 때문에 분명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한 신앙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분명 남달랐습니다. 그들만큼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서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고 자연히 자신은 선하다는 생각에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함을 강조한다거나 흔히 말하는 실천적 삶으로 의를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불의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는 것이 되니까 아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기준으로 세워서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인간의 죄인 됨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누군가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린 인간이 율법 또한 자기 의와 공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해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어서는 자신들을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르치며 더욱 세분화 된 조항까지 만들어 내면서 실천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든 유대 백성이든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율법에 갇힌 신앙이 길을 가게 된다면 결국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들보와  티 ◉


율법은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를 구분합니다. 지키는 자는 지키지 않는 자를 비판하게 되고 율법을 기준하여 타인을 헤아립니다. 하지만 은혜는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구분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킨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예수님의 순종으로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해졌다고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선생과 제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룩은 인간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든 신자든 은혜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입니다. 목사는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돕는 위치에 있을 뿐이기에 특별히 목사의 믿음이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틀 안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있기 때문에 제자와 선생이라는 관계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가 선생보다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 안에서 목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증거하는 도구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선생으로 가르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예수 안에서 모두가 온전한 자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선생과 제자라는 구분은 없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으로 자처하고자 한다면 선생은 가르침을 받는 자보다 우수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우수한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실천적인 삶이 더 강했고 우수했기 때문에 선생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로 여기십니다.

 

인간의 속성은 자신에게는 항상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너 때문에’라는 말로 책임 전가를 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가볍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한 관대함으로 인해 들보가 들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티,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비판과 헤아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는 말씀을 보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고 빼는 자가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말은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의 들보를 본다고 해도 그것을 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눈의 들보를 빼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빼겠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도 못하고 뺄 수도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저주에 갇힌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으로만 말할 뿐이지 속마음으로까지 인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괜찮게 살아온 삶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 나무와 열매 ◉


43절에 보면 좋은 나무 못된 나무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러분은 좋은 나무입니까 아니면 못된 나무입니까? 설마 자신을 좋은 나무라고 여기시는 분은 없겠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못된 나무입니다. 그런데 못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힐 수가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의가 되고 공로가 될 열매가 맺힐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좋은 나무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좋은 열매가 맺어질 가능성은 좋은 나무인 예수님에게 가지로 붙어 있을 경우뿐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며 따라서 가지에 지나지 않은 우리의 의도 공로도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자기 눈의 들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비판과 헤아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함께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향한 감사함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열매이며, 그 같은 열매는 그 마음에 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 악으로 가득한 본래의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좋은 열매가 있는가? 나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는가?’자신을 살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살피게 되면 결국 좋은 열매, 선한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주를 바라보게 되면 나의 행위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행하심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 나를 거룩한 자가 되게 하였다는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의한 행함입니다.

 

그렇게 보면 49절의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의가 되지 못하기에 결국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신자라면 여러분에게서 무엇이 나오고 맺어지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자연히 나의 행위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만 부각될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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