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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인생이 되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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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이 되는 길 (잠언 16장 18-25절)


< 교만은 패망의 선봉 >

 오래 전에 우리 교회가 외적으로 많이 초라할 때 전도사 공고를 냈었습니다. 그때 A신학대를 졸업한 청년이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인터넷 말씀사역의 영향력과는 달리 생각보다 교회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이미 오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인터뷰 때 어려워하는 모습이나 공손함이 없이 점수 깎이는 말만 골라서 했습니다. “연봉을 얼마 주실 것입니까? 저는 조만간 하버드나 예일 대학원으로 진학하려는데 유학비를 대줄 교회를 찾는 중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작은 줄 몰랐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곧 인터뷰를 끝냈습니다.

 한국 목회자라면 A신학대의 수준을 다 아는데 하버드나 예일대를 언급한다고 “우리 교회로 와주세요.”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이 높으면 ‘취직’도 힘들지만 ‘취집(집에 취직하는 것)’도 힘듭니다. 즉 마음이 높으면 결혼도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제가 두 딸에게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분위기보다는 노는 분위기를 더 만들어주려고 한 것은 마음의 여유를 통해 인성과 창조성을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성적보다 성품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여기고 특히 성품과 관련된 얘기를 두 딸에게 많이 해주었습니다. “얘들아! 나중에 남편을 잘 섬겨주어야 해!” 수구적인 남존여비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섬김의 원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즉 딸이 먼저 섬겨주는 분위기를 만들면 자연히 부부가 서로를 섬겨줄 가능성도 커집니다. 또한 성적이 좋은 것보다 요리를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농담조로 진담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적은 자기존재를 높이는 것이지만 요리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마음이 바탕으로 깔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개발을 위해 잠깐 미술학원을 보냈어도 전체적으로 성적향상을 위한 학원비 지출은 거의 하지 않고 성품개발을 위한 여행비 지출은 과감히 했습니다. 그렇게 성적을 높이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전혀 하지 않은 채 믿음과 성품 교육을 많이 했던 것은 장래에 남편을 겸손하게 잘 섬겨주고 성원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길을 가르칠 때 자녀가 자기 주관대로 갈 때가 많은데 다행히 두 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편을 높여주려는 기본 틀이 잘 형성된 것 같아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지만 패가망신의 선봉도 됩니다. 반대로 겸손은 행복의 선봉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핵심 요소입니다. 마음이 높으면 어디서도 환영받거나 쓰임받기 힘듭니다. 교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실력과 능력이 필요해도 교회에서는 마음과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연약한 사람을 쓰십니다. 교만과 자기우상화를 버리고 자기가 별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교만은 고난을 부르지만 교만을 버리면 고난도 사라집니다.

< 좋은 인생이 되는 길 >

 본문 20절은 ‘좋은 것을 얻는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얻고 좋은 인생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을 낮추십시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람을 망하게 하는 제일 원인은 교만이고 흥하게 하는 제일 원인은 겸손입니다. 가장된 겸손이 아닌 참된 겸손은 늘 이익이 됩니다. 겸손한 믿음은 마음과 정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최고의 자녀 교육도 겸손 교육입니다. 자녀에게 예의 바른 삶을 가르치고 존댓말을 쓰게 하면 겸손의 틀 형성에 매우 유익합니다.

 마음을 낮추려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시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교만한 자와 함께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하다고 느끼면 아무리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피하든지 멀리 하십시오. 그로부터 얻는 떡고물은 좋은 떡고물이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은 멀리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외형으로 과시하고 자랑하고 없는 사람을 차별합니다. 또한 자기 논리와 자기감정만 생각하니까 같이 어울리면 마음고생도 심해집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고 가난하고 비천한 병약자도 최대한 존중해주십시오. 다만 교만한 사람은 지혜롭게 멀리하십시오.

2.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좋은 것을 얻으려면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에 주의하는 삶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말씀대로 힘써 실천하는 삶을 뜻합니다. 좋은 인물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말씀 안에서 선한 결단을 하고 그 결단대로 밀어붙이는 삶이 탁월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약 15세의 청소년 때 바벨론에 잡혀갔지만 바벨론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답게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처럼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며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결국 인물이 됩니다. 말씀을 묵상만 하거나 듣기만 하면 큰 유익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실천이 없다면 허무한 일입니다.

 설교보다 실천이 필요합니다. 설교는 아무 때나 하면 안 됩니다. 목회자도 강단을 내려오면 설교적인 어투를 최대한 버리려고 합니다. 믿음을 입술로 나타내기보다 행동으로 나타내려고 하십시오. 믿음은 지식이나 경험이나 관념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듣기만 하고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뒷받침될 때 좋은 인생의 가능성과 인물의 가능성이 커집니다.

3. 선한 말을 사용하십시오

 입이 지혜와 명철로 선하게 사용되면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생명샘이 되지만 지혜가 없이 입을 미련하게 사용하면 고난과 징계가 뒤따릅니다(21-22절). 지혜로운 사람에게 꼭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입술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면 입을 슬기롭게 사용하면서 듣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들고 분위기도 좋게 만들고 또한 지식과 창조성이 넘치는 설득력 있는 말을 잘하게 됩니다(23-24절).

 좋은 소식과 사랑의 말을 많이 전하고 나쁜 얘기는 힘써 피하십시오. 가정에서도 이런 말을 많이 하십시오. “여보! 괜찮아요.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얘들아! 너무 염려하지 마! 편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교회에서도 이런 말을 많이 하십시오. “목사님! 힘내세요. 저도 열심히 참여할게요.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그런 말들이 넘치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늘 믿음으로 말하십시오. 장점은 크게 말하고 단점은 작게 말하십시오. 작은 일을 큰일처럼 과장해 말하면 듣는 사람도 불안해집니다. 반대로 큰일을 작은 일처럼 최소화해서 말하면 듣는 사람도 평안해집니다. 현실이 힘들어도 좋은 말을 들으면 피로가 싹 가시게 됩니다. 나쁜 소식은 뼈와 건강을 약화시키지만 좋은 소식은 뼈와 건강을 강화시킵니다. 뼈와 관련된 병인 디스크나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좋은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4. 쇼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 말씀을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쇼 윈도우 인생이나 외식주의 인생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보는 것만 믿고 따라가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사람 및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닙니다. 표적은 사탄도 줍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하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신 13:1-5).

 ‘이적과 기사가 생기는 것’과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는 것’은 유사한 말 같지만 내면의 가치는 크게 다릅니다. ‘은사가 있는 것’과 ‘은사를 보여주는 것’도 매우 다릅니다. 기적과 표적을 보이면서 자랑하고 선전하는 사람은 대개 가짜 선지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이 ‘능력의 종, 치유의 종’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워서 버젓이 21세기의 백주대낮에 사람들을 미혹해 물질을 갈취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기적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적을 보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소수의 제자들만 남기셨습니다. 참된 목자는 기적을 일으키고도 잘못된 기적신앙과 기복주의에 빠질까봐 몰려오는 사람들을 물리칩니다. 반면에 거짓 목자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선전하거나 심지어는 기적을 꾸며내면서 잘못된 기적신앙과 기복주의로 사람들을 끌어 모읍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표적을 내세우고 선전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절대 따르지 말고 그런 집회에는 참석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연출된 치유 쇼에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그런 치유 쇼에 절대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저는 ‘연기’와 ‘쇼’ 쪽으로 안목이 둔해서 누군가의 연기와 쇼에 속았던 경험이 많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와 쇼를 잘 분별해서 속지 말자!”는 다짐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연기와 쇼에 탁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그렇게까지 거짓 연출을 할까? 정말인지 몰라.”라고 하다가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목사가 여 전도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교회에 소문이 돌자 강단에서 호소하듯이 말했습니다. “저는 일찍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성욕을 없애려고 거기를 자르고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 고백은 단숨에 스캔들을 잠재웠습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괜히 목사님을 오해했다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고자가 되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목사는 정관수술을 하고 고자가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가 커졌다고 교회성장 세미나 강사를 했었습니다.

<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 >

 거짓 종교인의 연출된 쇼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땀이나 과정이 생략된 채 기적과 대박을 통해 지위나 자리나 소유를 너무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특별한 기적과 대박이 없어도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그런 신실한 믿음이 준비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되고 필요하다면 기적적인 역사도 주어질 것입니다.

 예언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박 날짜와 대박 종목과 대박 선택을 알아맞히는 것은 기독교의 예언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대상황을 분석해서 그 시대에 가장 합당한 바른 길을 가르쳐주어 진짜 복된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언자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개괄적인 원리인 신학도 잘 알아야 합니다. 탐욕의 렌즈나 세상의 렌즈가 아닌 성경의 렌즈를 끼고 세상과 현실을 볼 수 있다면 순수한 어린이도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적, 대박, 예언, 투시, 쓰러짐과 같은 표적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표적이 있어야 믿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없어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정의만 분명히 알아도 외형주의와 성공주의와 기복주의와 무속주의로 영혼을 미혹하는 이단교주들의 마수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복만 추구하지 말고 문제해결이나 기도응답에도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으로 무장하십시오. 하나님이 죽게 하시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살게 하시면 삶을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이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탁해서 사는 길과 복된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저리 가세요. 왜 저와 하나님과의 길 중간에 막아서 뭘 해주겠다고 하십니까? 전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것입니다.”

 신앙은 청탁이나 거래가 아닙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녀를 일찍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무수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도 그런 상황은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두 딸을 지켜주세요. 그러나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도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 그때는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그런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미신적인 틀에 젖은 분은 가끔 생각합니다. “왜 이 목사님은 죽는 얘기를 자주 할까?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재수 없는 말 같다.” 그런 미신적인 사고를 탈피하십시오. 십자가가 재수 없는 것입니까? 잘 죽을 줄 알고 잘 죽음에 대비할 줄 알아야 진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미신에 넘어가고 죽음의 기운이 더 찾아오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을 가지면 더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죽이십시오. 자신을 비우면 좋은 것이 더 채워지고 자신을 죽이면 좋은 인생이 더 펼쳐집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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