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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나이팅게일과 크림반도

  • 최한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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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과 크림반도


흑해 북쪽에 크림반도라는 이름을 가진 반도가 있다.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동쪽으로는 게르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마주보고 있다. 지금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서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크림을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또 다른 냉전이 러시아와 서구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자기편에 항상 있을 것으로 생각한 크림반도가 서방에 기울면서 예견된 사건이다. 이 크림반도에서 19세기에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크림반도는 알지만 과거 19세기(1853~1856)에 일어난 “크림전쟁”과 그 때 활동한 나이팅게일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6세기 이래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한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점점 약해졌다.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한 러시아가 프랑스의 나폴레올 3세 때, 오스만 제국 내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교도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과 사르데냐가 오스만 편을 들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크림 전쟁”이다.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플 항구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패했다. 당시 전쟁으로 콜레라가 발생하여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다친 병사들은 크림에서 이스탄불로 옮겨졌지만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는 간호사를 천한 직업으로 여겼기 때문에 선뜻 간호사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용기 있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나이팅게일은 전문적인 간호교육을 받았고 교양과 통찰력이 있었다. 그녀는 38명의 간호사대를 조직하여 이스탄불에서 전쟁터에 있는 위스퀴다르 병원으로 갔다. 이름은 병원이었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군인 환자들이 군복을 입은 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깨끗한 환자복을 입히고 시트를 청결하게하고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해주었다. 밤에는 등불을 들고 치료해주므로 ‘등불을 든 천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녀의 활약성이 전해지자 뜻있는 분들이 성금을 보내어 이것을 토대로 전쟁이 끝난 후에 런던에 간호학교가 세워졌다. 나이팅게일이 꾸준히 쓴 “병원에 관한 노트”와 “간호 노트”는 각 나라로 전해져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을 위한 기초교재가 되었다. 여성의 사회 참여와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는 변화까지 일어났다. 지금도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면서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라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다.


후에 국제 적십자사를 만든 앙리 뒤낭은 “내가 국제 적십자사를 만든 것은 크림전쟁에서 보여준 나이팅게일의 희생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국제 적십자사는 나이팅게일이 만들었다”고 했다. 나이팅게일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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