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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 이야기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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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s.jpg삭개오 이야기

눅19:1-10, 창조절 아홉 번째(종교개혁 499주년)주일, 2016년 10월30일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킬로 떨어진 여리고 성(城)에 들어가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뒤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처음으로 전쟁을 벌인 장소가 바로 여리고입니다. 이 지명이 복음서에도 몇 번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30 이하)와 시각장애인 치료 이야기(마 20:29-34),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2절과 3절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 뒤에 서서는 예수를 볼 수 없다 생각하여 예수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나무를 우리는 보통 뽕나무로 알고 있는데, 본문은 ‘돌무화과나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도 돌무화과나무로 번역했습니다. ‘수코모레아’라는 헬라어는 양쪽으로의 번역이 다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목에서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우리말은 존대와 하대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번역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았을 테니까,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삭개오 씨, 반갑습니다. 내려오십시오. 오늘 삭개오 씨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가 처음으로 대면한 건지, 아니면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본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지만, 성경본문은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와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랍비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삭개오가 죄인이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에 대한 평판은 극도로 나빴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다음에 삭개오 스스로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8절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라는 표현은 사실적인 겁니다.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을 악용하곤 했습니다. 그런 권한으로 상당한 재산을 착복했습니다. 그 권한이라는 게 아주 막강합니다. 요즘도 기업 하는 사람들이 세무조사 받는 걸 크게 두려워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권의 앞잡이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국노 취급받았습니다. 반로마 무력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은 세리들에게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율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무슨 이유로 사람들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걸까요?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본문이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결론에 해당되는 9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에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15장에만도 세 가지가 나옵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둘째 아들이 그것입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잃었던 한 마리를 찾은 양 주인은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눴고,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었던 한 드라크마를 찾은 어떤 여자도 자신의 기쁨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는 것이 예수 사역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 기자는 반복해서 전한 겁니다.

 

잃어버린 자

예수 주변에는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먼저 보십시오.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지 않았습니다. 어부들이 제일 많았고, 세리도 있었고, 심지어는 무력으로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이나 왕족은 하나도 없었고, 회당장이나 랍비도 없었습니다. 간혹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한 바리새인이나 부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제자가 된 사람들은 신분이 높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주로 거론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 여자, 참척의 고통에 떨어진 과부,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종교 고위층 인사들은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잃어버린 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에 거론되는 이들이 가난하고, 울고,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이었다는 사실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뭔가 불편한 진실입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운명을 우리는 피하고 싶어 합니다.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소외를 질색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신분이 높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능한대로 피합니다. 그들의 문제에 끼어들기를 귀찮아합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린 당시 사람들의 태도가 오늘 우리의 태도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는 사실을 복음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합니다. 삶과 신앙의 불일치입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미뤄두고 삭개오 이야기를 더 따라가 봅시다. 그 과정에서 대답을 저절로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야겠다는 갈망이 강했습니다. 그 갈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가 대중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보통 결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의 신분만으로 보면 가능한 숨어서 권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는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마땅한데 그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세리장의 지위에 올랐다면 나이가 들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명색이 여리고 성의 세금 총책임자입니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아마 그 나무에는 다른 아이들도 함께 올라갔을지 모릅니다. 그 광경이 우스웠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희극처럼 보일지 몰라도 삭개오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영혼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영혼 문제는 구원 문제입니다. 삶의 의미 충만에 관한 갈망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삶의 어두운 심연을 알기에 그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상황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시인들이 언어의 힘에 사로잡히는 거와 비슷한 경험입니다.

 

마틴 루터의 싸움


오늘은 전세계교회가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틴 루터는 지금부터 499년 전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구 위 벽에 95개 조항의 신학논제를 대자보 형식으로 게재했습니다. 95개 신학논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 성당 완공에 필요한 재정을 모으기 위해서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았습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면죄부를 팔던 사람들은 ‘연옥에 있는 조상들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사면,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주술행위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였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면죄부를 구입했습니다. 베드로 성당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다는 것은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뜻입니다. 교황무오설에 대한 비판도 똑같습니다.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교황청, 곧 교황을 비판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1521년 1월21일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받고 곧 파문장을 불태웠습니다. 독일 남서부 지역 보름스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열린 신성로마제국의회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루터는 4월16일에 도착, 17일에 심문, 18일에 자기주장을 철회하라는 제국의회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제국 황제는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루터 책을 소각할 것과 아무도 루터를 돕지 말 것을 선고했습니다. 이 선고는 루터를 누군가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루터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있었다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행히 독일의 작센 주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1년 동안 은신할 수 있었고, 은신하는 동안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루터에게 교황청과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자기의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고행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는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깨달았기에 그는 거대한 힘과 맞설 수 있었습니다. 그게 희극적인 상황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 나선 삭개오에게서 볼 수 있는 영혼 구원의 갈망입니다. 생명 충만, 의미 충만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런 갈망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고향을 잃은 나그네처럼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내면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실존입니다. 문제는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상적인 것들로 인해서 그런 갈망이 숨죽이는 상태에 빠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삭개오의 경우를 다시 봅시다. 대개의 세리들은 세금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거기서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자기에게 권력이 주어져 있는 동안에 돈을 모아야 합니다. 자식을 출세시켜야 합니다. 이런 일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 일상의 일에만 묶여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너머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가 바로 영혼의 갈망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서 재산을 불린다거나 자기 이름을 내는 일에 인생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를 만나러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을 단순히 교회에 잘 나와야 한다는 말로 들을 분은 없겠지요.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에 속한 문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대중들은 삭개오와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스캔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죄인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사건이 그들에게는 이런 스캔들입니다. 일일 티브이 드라마는 대개 선정적인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다룹니다. 시청자들은 그걸 술안주거리처럼 주제로 삼아 수군거립니다. 우리가 연예 기사를 전혀 안 보고 늘 진지하게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수군거리는 여가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혼의 갈망이 시나브로 줄어들고, 결국 영혼의 갈망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늙어 죽겠지요.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무시하고 불쌍하게 여겼겠지만 영혼 구원이라는 점에서는 그들이 오히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기쁨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다는 예수의 말을 듣고 삭개오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면서 예수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고 합니다. 예수에게서 인정받은 삭개오의 즐거움이 무언지 상상이 갑니다. 마틴 루터는 삭개오가 ‘기쁨으로’(mit Freuden) 예수를 영접했다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기쁨은 눅 15장에 나온 세 가지 비유에서 똑같이 나온 것입니다. 영혼의 기쁨입니다. 구원의 기쁨입니다. 존재의 기쁨입니다. 예수와의 관계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잃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삭개오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복음이 성립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바론 이런 기쁨에 자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대답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삭개오는 주변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더 이상 세리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와의 관계만으로 참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재산의 반을 떼어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거나 속인 일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는 말은 곧 재물에 예속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신학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기에 계신가요? 지금 제가 더 이상 긴 설명은 드릴 수 없습니다. 원칙과 방향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한다면 그런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완전히 벌어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완전히 예속당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더 나가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에 예속당하지 않는 사회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 노력해야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삭개오 이야기에 담겨 있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한 분노와 비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우월감을 보이기 위해서 수군거리는, 즉 불평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신 예수로 인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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