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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랑스러운 성도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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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성도 (고린도전서 9장 12-16절)


1. 복음 중심적으로 사는 성도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복음’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개척 목사로서 교인들로부터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해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당연히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16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어떤 일도 했습니다(23절). 복음이 주는 축복되고 은혜로운 삶에 동참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 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그처럼 복음 중심적으로 살아야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교인이 됩니다. 무엇이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까? 복음은 은혜입니다. 결국 은혜 중심적인 삶이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전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이 바로 복음 중심적인 삶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 가끔 속상한 일도 겪고 마음에 맞지 않는 장면도 봅니다. 그때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비판하기보다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은혜로 품으십시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가장 다릅니까? 은혜를 앞세워 사는 것이 가장 다릅니다. 왜 은혜를 앞세워 살아야 합니까? 사실상 자신도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래 전에 새 차를 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꿈에서 누가 제 차의 옆 부분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다른 때는 그냥 보내주는 편인데 새 차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완전히 인간성이 드러났습니다. 그 사람 멱살을 잡고 “이 사람아! 내 중학교 동창이 사준 새 차를 이렇게 만들면 돼!”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깬 후에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다시 한 번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저의 본 모습입니다. 저의 부족함을 지켜주세요.”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성인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고 다 서로에게 은혜를 주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머리로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판단이 정확하면 할수록 마음은 멀어집니다.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입니다. 그런 넓은 가슴을 가진 성도가 자랑스러운 성도입니다.

2. 헌신의 가치를 아는 성도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헌신적이었기에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13-14절).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 공급되는 것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즉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헌신하면 그것을 통해 사역자들이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대가를 바라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15절).

 왜 그가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진정한 축복과 은혜는 헌신하는 삶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모르는 사람은 봄에 뿌릴 종자를 먹는 사람과 같고 펌프에 넣으려고 보관한 마중물을 마시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마중물을 펌프에 넣으면 엄청난 물이 펌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 마중물까지 마셔버리면 펌프에서 더 이상 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인생 펌프가 메말라서 은혜의 생수가 솟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물까지 자기가 마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축복받기를 원하면 헌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쁘게 헌신하십시오. 믿음 생활을 하면서 헌신을 하지 않는 미지근한 모습 속에서는 결코 축복된 삶이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인생의 고통만 가중될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피하고 우중충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고통도 많고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고민과 같은 영적 신경통도 많습니다. 왜 현대인의 불행합니까? 헌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조금 힘든 일이라면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면 곧 불평과 불만과 분열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지 십자가를 지고 힘든 일을 맡아서 하려고 할 때 본인에게는 기쁨과 보람이 넘치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인정해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자랑스러운 교인이 될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종처럼 자신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19절). 주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주고자 하면 감사가 충만해지지만 받고자 하면 불평이 충만해집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도 어려운데 힘써 남을 돕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경제적으로 축복해 주시고 저의 앞날과 가정을 지켜주소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나눈 사랑의 씨앗은 언젠가 신비한 축복의 열매가 되어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1984년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꽤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대부분 교회를 위해 썼고 결혼 대비를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돈 한 푼 없었어도 결혼은 매주 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미래의 대책이 없는 삶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도는 저축도 하고 모으는 재미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아껴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쓰십시오.

 물질 생활할 때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열의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둘째, 한 달에 하루 버는 몫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신 14:28-29). 즉 하나님을 위해 10분의 1을 쓰고 선교와 구제를 위해 30분의 1을 쓰라는 것이 성경의 기준입니다. 선교사님들의 기도요청 편지를 받으면 재정적인 문제로 인한 기도제목들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제목들에 잘 반응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능력도 구하고 좋은 일을 위해 늘 앞서 나서려고 하십시오.

  선교사님들이 전방 선교지에서 고통을 식탁을 대할 때 후방에 있는 우리만 맛있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대중들이 먹었던 것은 음식 이전에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도 있습니다. 좋은 일을 위해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각종 문제와 장벽들이 무너지고 자기 영혼이 소생한다는 의미에서 선교는 봉사가 아닙니다. 선교는 자신의 생존과 축복을 위한 마땅한 행위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도 선교해야 합니다.

4. 평화를 위해 애쓰는 성도

 사도 바울은 거룩한 변신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본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평화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삶이 힘든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에 있지 않고 인간관계의 불화 때문입니다. 왜 인간관계에 불화가 생깁니까? 높은 마음을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낮아지고 약해지겠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참된 권위는 권위주의를 버릴 때 주어집니다. 잘난 체 하는 자는 반드시 낮아지지만 겸손한 자는 반드시 높아집니다.

 또한 평화를 위해서는 “내가 이 원수를 꼭 갚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원한은 하나님이 다 갚아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대기 시작하면 문제는 커집니다.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더 나아가 성경은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원수 갚지 않는 것도 힘든데 원수를 축복하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사람에게는 원수를 축복할 능력이 없지만 그 능력을 구해보십시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능력을 구해보십시오. 원수를 축복하라는 것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누가 잠을 못 잡니까? 원수는 그 시간에 잠을 잘 자도 자신이 오히려 잠을 못 잡니다.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원수는 소화도 잘 되어도 자신은 소화가 안 됩니다. 그러면 잘못은 원수가 했는데 축복하는 마음이 없어서 벌을 자신이 받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잠 잘 자고 밥 잘 먹게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사실상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이해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신이 원수의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을지 모릅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면 원수를 축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갈등과 아픔이 있을 때마다 늘 남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얼마나 다릅니까? 다른 성격, 다른 처지, 다른 상황을 이해하면 됩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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