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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혜사 성령

  • 양주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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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4:26/ 2016년12월11일)


서론


옛날 그리스 헬라시대에 어떤 큰 부자집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머리가 좀 둔해서 많은 재산을 경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많은 돈과 부동산을 아들에게 다 상속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친구를 사겼는데 그 친구는 굉장히 머리가 좋고 웅변도 잘하고 능력이 많은 친구이지만 가난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 부자집 아들에게 와서 “자네가 이렇게 많은 부동산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다 관리할 줄 모르니 나에게 다 넘겨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돈 필요할 때 돈 내주고 재산도 늘려 줄테니까 내게 다 맡겨라. 나를 믿어라. 친구 좋다는게 뭐냐”라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인감도장도 주고 부동산 서류도 주고 돈도 다 그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니까 그 친구가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온 식구를 다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그 부자집 아들에게 “야 임마 나가. 합법적으로 이집도 내 집이고 이 땅도 내 땅이고 부동산도 다 내꺼다. 니가 나에게 넘겨주지 않았느냐” 그래서 그 부자집 아들은 졸지에 밖으로 쫓겨 나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억울해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이 유명한 재판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재판관이 원고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집과 부동산도 원래 당신 것인데 사기를 당했다고 하니 이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그런데 이 사람이 머리가 둔하고 말도 잘 못하고 사람이 좀 모자라니까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이 그럼 피고가 변명해 보라고 하자 그 나쁜 친구가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 집에서 봉사해 주고 섬겨준 대가로서 다 얻은 것으로 합법적으로 내 것입니다”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재판관도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도 다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그래서 이제 원고인 부자집 아들은 재산을 다 잃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고소한 죄로 잡혀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의 법정에서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물어보는게 있습니다. “원고 너에게 보혜사가 있느냐?” 보혜사가 있으면 보혜사를 통해서 설명을 해보라고 반드시 기회를 줍니다. 그때 저 뒤에 그 동네에서 아주 명망이 높고 오래 살았으며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일어나 그 부자집 아들에게 “나를 보혜사로 인정하시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정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도울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날 인정하시오. 날 인정하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집 아들 재산을 뺏은 나쁜 친구도 견제를 합니다. “인정하지 마라. 인정하면 가만 안둔다. 보혜사만 세워봐라 가만두는가”라며 협박을 합니다. 부자집 아들은 어쩔줄을 몰라 벌벌 떨며 울고 있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재판관님, 저 어른을 내 보혜사로 인정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어른은 법적으로 보혜사로 인정되어 앞에 나와 궁중들 앞에서 억울한 부자집 아들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울고있는 부자집 아들에게 “이제 울지 마시오. 내가 억울함을 다 풀어주겠소. 나를 의지하시오”라고 말합니다. 보혜사가 일어나서“재판관님, 내가 오랫동안 이 동네에 살아서 이 부자집 아들과 그 친구라는 젊은이 둘 다 잘 아는데, 이것은 다 친구라는 젊은이가 꾸민 사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말을 유창하게 하며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보혜사로 인해 재판장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저런 나쁜 놈이 있나”라며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이 부동산과 재산을 모두다 원고에게 돌려줘라. 그리고 이 사기꾼은 당장 체포해서 감옥에 넣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처럼 보혜사가 이 사람을 살려준 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한문으로 보호할 보, 은혜 혜, 스승 사 입니다.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곁에’라는 의미의 단어와 ‘부르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합쳐진 말로 ‘바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의미 입니다. 이 단어는 조금전 말씀드린 예화에 나오듯이 헬라 세계에서 재판정에 선 원고를 돕기 위해 부름받은 변호사( lawyer), 혹은 어려운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부름받은 상담자(counselor), 또는 좌절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위로자(comforter)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돕는자이시요, 우리가 환난에 처했을 때의 위로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세상에서와 하나님의 법정에서 변호하실 변호사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상담자이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교사이십니다. 오늘은 이 좋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함께 나누겠습니다.


본론


기독교의 핵심이자 가장 독특한 점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각각 삼위로 존재하면서 세 위격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One substance, three persons.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신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  One substance, three persons.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완벽한 한 본체이시며 동시에 삼위로 존재한다. 이게 이해되셨다면 거짓말 이에요. 우리 인간의 지식에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평생을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다 결국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려하면 머리가 돌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기독교의 핵심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데 성령님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해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은 쉽게 예기해 하나님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God is spirit)”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로 떠나신다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온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러 가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쨋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마치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선장을 잃은채 표류하는 배 위에 있는 초보 선원들과 같은 심정으로 두려워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당신이 승천하신 후  당신을 대신해 제자들을 도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어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또한 보혜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로서 오신 보혜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일 설교가 뭐였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됨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더이상 죄와 사망의 종이 되지 않고 어둠가운데 거하지 않고, 빛과 생명과 의의 길 가운데 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더이상 죄짓지 말라가 아닙니다. 어둠을 떠나라도 안됩니다. 어둠에 거하고 죄짓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걸 벗어나는게 안되니까 문제지. 예수님의 말씀은 딱 한가지 성령 받으라. 신앙 생활의 모든 근본 해결책은 성령받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는 어둠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는 죄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하나님 말씀이 더이상 수면제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될 것이다.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강림 사건 이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요한복음14장17절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먼저 성령의 본질은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입니다. 그분은 진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셔서 성도인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셨슴에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부분들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마다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반대로 성도들은 성령을 아는데 그 까닭은 바로 성령이 성도들과 함께 거하며 성도들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의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는 성도와 성령간의 교제를, 17절의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는 성령과의 동행을, 또 17절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성령의 내주를 나타냅니다. 날마다 성령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성령의 내주가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과의 교제요 동행이요 성령의 내주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수면제같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령받고 주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은 성경 말씀도 꿀같이 달고, 삶의 모든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또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환난과 시련이 닥쳐온다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늘 곁에 계심을 믿고 담대히 행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40여 세 된 선천성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말할 수 있었던 담대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언제나 혼자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항상 성령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외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혜나 지식, 경험, 능력을 의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성령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하려하면 어떻게 목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설교를 한다할지라도 성령받지 않은 사람이 설교하면 감동이 없고 메마른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전하는데 어떻게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사가 힘든 것입니다. 또하나는 목회자는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희망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쉽지 인간이 어떻게 항상 남을 위로하고 용기를 줍니까? 물론 목회자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는 쉽게 그럴수 있지만 영적으로 다운되고 맘대로 일이 안될 때, 남에게 웃으면서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령님 저와 함께해 주시옵소서. 저의 힘으론 절대로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이렇게 부족하고 약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일으킵니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까?” 설교준비하면서, 운전하고 가면서도 계속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느순간 성령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걱정 하지 말아라.” 그리고 성령님께서 제가 처음으로 목회를 할 때 받은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매(사6:12)”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은 약하고 보잘것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단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의 모든 군사를 다 쳐부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내가 무엇을 못하겠나 하고 힘을 얻어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인정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을 보면 어쩔땐 미친사람 같습니다. 화날때도 “할렐루야. 기도합시다”하고 얼굴이 평안합니다. 세상이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겁이 굉장히 많고 의심도 많은 사람인데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내 안에 모시니까 두렵지가 않습니다. 혼자 운전하고 가면서도 옆에 성령님이 함께 앉아 계시다고 생각하니 운전하다 성질날 때도 순간적으로 화가 사라지고 평안해집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기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막 신이나요. 그래서 제가 미친사람처럼 신나서 어쩔줄 몰라하면 저희 아내가 “저게 뭘 잘못먹었나? 조울증인가?” 하고 이상한 눈으로 봅니다. 막 무슨걱정을 하다가도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돌아오면 안심되면서 기쁜거에요. 설교할 때도 제 지식과 제생각으로 어떻게 앞에나와 말씀을 전합니까?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시면 말씀전하는게, 생명의 진리를 전하는게 그렇게 신나고 좋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언제나 성령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14장26절은 이 좋은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지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임하면 첫째, 그분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으면 부활도 이해가 되고, 기적도 이해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계속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땅의 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지식,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 육의 지식이 아니라 영의 지식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지 않고는 말씀을 풀수가 없습니다. 영은 영으로 받아들여야지 영을 육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려 하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박사학위 몇 개씩 받은 목사님일지라도 성령체험이 없으면 설교에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여러번 읽더라도 성령받지 않고 읽으면 졸음만 옵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말씀을 보면 달라집니다. 글이 살아서 역사하고 말씀이 나에게 꽃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둘째,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약 중에 가장 좋은 약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신약과 구약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절망과 위기에 처했을 때 성령님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여러분을 건져내시고 위로하시며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 삶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풀 것인가? 직장에서 안맞는 사람이랑 싸우는데 잠깐만 하면서 성경책을 꺼내 막 뒤질 시간이 어디있습니까? 골프를 치다 공이 이상한데 걸렸는데 몇번 아이언을 써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그때 잠깐만 하고 골프사전을 검색해서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때 타이거 우즈가 옆에 있다가 몇번 아이언 쓰시죠. 이렇게 공을 보내시죠. 하면 멀마나 좋겠습니까? 보혜사 성령님께서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 위기를 이길수 있는 말씀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십니다.


갑자기 암선고를 받았을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성령님이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모든 의욕을 잃고 절망과 두려움에 어쩔줄 몰라하는 자를 일으키실 줄로 믿습니다. 회사에서 실직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또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외롭고 고독한 상황에 처한  자에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라(사26:3)”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위기에서 건지시고 성령님이 주시는 용기를 갖고 굳건히 서게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순간순간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그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운데 거할수 있도록 우리와 교제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 말씀이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도우시며 생명을 갖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을 여러분 마음 가운데 초대하셔서 언제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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