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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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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사도들과 진리신앙의 노선으로 신앙하는 자들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진리의 신앙의 사도들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일반적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채찍질을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선행과 의행만 있을 뿐이지 악행은 없습니다.

 

공회

 

공회는 유대나라에서 모세율법을 전문적으로 잘 아는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모이는 유대에서 알아주는 공표된 공적인 최고의 큰 회의입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은 회당에서 율법선생들이 그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공회원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아니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이방종교인들도 아니고 그 옛날부터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등용된 선민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옛날 구약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능력으로 붙잡고 역사 하시면서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을 시켜서 모세로 통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은 축복으로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루 빨리 하나님 말씀 율법의 정신 사상을 넣으면서, 반면에 애굽성의 소원 목적과 취미와 성질을 버리라는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을 떠난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애굽의 성질과 성분들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면서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고 반역을 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 성육신 당시 때 율법을 잘 아는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문자로 된 율법과 계명을 주장하지만 자기들 속에 종교적인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기도하고 가르치는 그 세상적인 성질 성분은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그 점을 꿰뚫어 보시고 정통으로 지적을 하는 예수님을 죽이고만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자들이 그 때 그 모양과 똑 같습니다. 성경 문자적으로 종교생활이나 행동과 활동, 눈에 보이는 면을 강조하고 가르치지만 성경문자 그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사람이 고쳐지라는 것인데 자기 타락적 주관성의 그 마음은 고치기 싫고 성경문자를 이용하여 자기의 신앙이 옳다고 더욱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회를 열고 즉, 종교적 제도적으로 순서를 밟아서 합리화 시켜서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순서도 그랬고, 선지 사도들을 죽이는 순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었고, 마지막 때에도 역시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 지금 교회들의 신앙상태를 질적 성분으로 분석을 해 보면 여전히 그런 신앙상태의 신앙사상의 현상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계시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속의 숨은 뜻을 찾지 못하고

어떤 자는 성경을 일반도덕처럼 하나의 도덕책으로 보고 교인들을 사랑이라든지, 진실이라든지, 선이라든지를 일반적 도덕적 개념으로 가르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가르치고,

또 어떤 자는 영적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여 귀신들린 짓들을 하는 것인데도 모르니 성령의 역사라고 우겨대고,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일반화 보편화로 만들어 이방우상을 섬기는 온 인류까지 포함시켜 예수 이름으로 구국운동을 하는 자들이 나오고,

또 어떤 자는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시행한다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부자 되게 만들어 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니 구복주의자들이 나오고, 뿐만 아니라 서로들끼리 또 비방하고 헐뜯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이라든가,(딤후 3:15, 1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온전한즉 너희도 온전하라하신 인격의 온전, 성품의 온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에 속하는 건지, 육에 속하는 건지 전혀 분별을 못하고 그들처럼 큰 심판 받을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도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오직 진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인 진리만 버리면 박해는 없습니다. 율법주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진리가 박해를 받고 무시를 받고 천대를 받을 때 그런 종교지도자들에게 다가가서 찬양을 하고 자랑을 하면 박해는 없습니다.

 

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총독과 임금들은 세상 인간들이 만든 곧, 타락된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법을 만들고 기준법을 만들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 기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진리의 성도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인간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고 판단을 한 이스라엘이 하는 짓들을 이방인들이 다 아니까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된 셈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악하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1019, 20: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종교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도들과 진리의 성도들을 박해를 할 것이고, 또 종교인들이 총독과 임금들 앞에 사도들을 내어주면 이들은 일반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사도들을 박해를 할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박해하고 종교인들이 박해하고, 말을 잘못하면 이쪽도 흠 잡히고 저쪽도 흠 잡힙니다. 흠이 안 잡히려면 절대 정확한 답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답변은 아버지의 성령이 사도들 너희들 속에서 할 것이니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진리를 깨닫고 사니 진리가 인격화되었고, 진리 인격화되어서 사니 성령이 주격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진리의 성도가 죽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성령이 알아서 하십니다. 인간 내가 어떻게 말할까를 염려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책임을 전적으로 지고 계십니다.

 

102123: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종교제도, 종교적인 척도, 종교법에 의해서 진리의 사도들이 박해를 받고, 일반적인 척도, 일반법에 의해 가정으로부터 정죄를 받고 박해를 받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기독교 종교인들의 말을 들어본다면 왜 저 사람들이 박해를 받느냐고 묻는다면 저 사람들은 이단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단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할 때도 역시 이단들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 자기가 알고 믿는 것을 기준해서 보니까 박해를 받는 자들은 다 이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핍박을 받는다면 자기가 옳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신앙정신 사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신앙사상은 가난하고 못 살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몰아붙이기 일쑤지! 잘 살고, 부자로 살고, 누리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하며 부러워하는 그런 신앙사상들입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자기의 신앙의 질을 검토해 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면도 그렇지만 신앙사상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쪽 말만 들어보면 잘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방안에서만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서만 들으면 며느리 말이 옳고.

 

오늘날 교회들의 신앙사상들을 보면 잘못된 신앙사상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방 미신성을 가진 신앙, 거짓 신앙성, 일반도덕성 신앙들이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의 경우 식구들의 기준에서 볼 때에 식구 중 한 사람이 잘못된 신앙집단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식구들은 모두 집단 속에 들어간 그 한 사람을 대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집 식구들이 모두 그 한 집단 속에 들어갔을 경우는 대적자가 아니고 다 같이 자기편이 되지만, 그러나 그 곳에서 한 사람이 이탈해 버리면 이탈한 자는 잘못된 집단 속에 들어가 있는 식구들에게 대적자가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두 번째의 경우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에서 분명히 외식운동하는 교회로서 잘못된 교회인데 겉으로 볼 때는,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온 식구들이 모두 그 교회 다니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한 사람이 성화구원이 있는 진리신앙의 노선으로 갔다 그랬을 경우 온 집안 식구들이 그 한 사람을 미워하고 대적을 하게 됩니다.

 

조직에서 이탈되면 조직이 다 대적을 하고,

가정에서 이탈되면 식구들이 대적을 하고.

 

미움을 안 받고 조용하게 살고 싶으면 합리화를 시키는데 합리화된 곳에서 이탈을 하면 역시 또 미움을 받습니다.

 

대적을 받기도 하고 미움을 받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는 그 유형들이 매우 다각적이고 참 복잡합니다. 왕따 당하는 유형이 다양합니다. 보통 보면 박해받고 미움받고 대적을 받는 경우가 자기가 잘못해서 받은 일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21절의 말씀의 해석을 단순히 가족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말하기도 하고, 또는 말세는 집안식구들끼리 서로 일반적인 사랑이 식어서 원수가 되는 그런 면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을 해 보기로 합시다.

 

세상은 아담 타락 이후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타락된 인간의 기준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세상은 타락된 인간들이 훨씬 많은지라 타락된 데서 나온 그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이방종교인들도 역시 그와 같은 사고방식이고,

심지어 속화된 기독자들은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그 기준을 가지고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사상으로 볼 때는 사도들의 진리신앙이 이단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는 예수가 이단으로 보이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이 말하는바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썼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지식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 성장하라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이 신앙사상은 하나님의 온전 즉, 하나님의 지혜 지식적 온전, 하나님의 도덕적 온전. 이 온전성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 예수를 닮는 것이라!

 

이 입어진 성품은 영원히 궁극적인 세계인 신령천국에까지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이기 때문에 이것을 영원 궁극적 성화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사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서만이 되어지는 신앙이며, 또한 영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신앙 노선에서 마귀의 활동들을 보면 때로는 충돌적으로, 때로는 마찰적으로, 때로는 호응하는 척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활동의 그 수법이 매우 다양한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가정환난이요, 가정이 파괴됩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는데 내어주고,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는데 내어주고, 사랑도 없고 윤리와 도덕성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고,

소속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고,

명령을 받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고,

소원목적이 취미가 다르기 때문이고,

사단 마귀의 역사에 휘말린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의 교육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이요 생명의 교육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귀신의 활동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 사회적으로 가정의 무질서와 일반 도덕성의 파괴와 가정파탄이 일어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사건이 왔을 때, 예를 들면 전쟁이 났을 때 내가 예수 믿는 신앙을 버리면 우리 식구들이 다 살고, 예수 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식구들이 다 죽고, 나도 죽게 됐을 경우 예수 믿는 자는 미움의 대상으로 냉대와 박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여기서도 분석을 해 보면

예수핍박 진리핍박 성도핍박의 이유가 되는 것이고,

집안 식구들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옳음을 선택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옳음을 버렸으니 결과적으로 집안 식구들이 좋은 것이 있을까?

 

이것은 저주요 앙화요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죽이고, 성도를 환난 핍박을 준 자들의 역사가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영적 신앙 면으로 보는 장면인데 신앙사상적이라서 보이는 육의 눈으로서는 식별이 안 되고 영의 눈이라야 식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기꾼이 다 뺏어갈 목적으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사단 마귀가 진리생명의 신앙을 죽이고 진리생명의 신앙을 못 갖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사단 마귀의 수단 방법 중 하나인 호응적 대립성의 수단 방법을 모르면 안 되는데, 영으로 진리이치로서 알아 성도 자기를 위하는 척 하지만 자기의 어떤 면이 죽고 망하게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는데 내어준다

 

육적 혈통적인 형제가 있고,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면에 형제가 있습니다.

 

육적 혈통적 형제라 할지라도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또한 신앙의 형제입니다. 육적 혈통적 형제는 육적인 사랑으로 연결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는 진리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결이 아니라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영원히 가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의 사랑은 진리를 받으면 진리를 먹고 진리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적인 사랑이 자꾸만 성장하고 진해집니다. 그러나 진리사랑을 먹지 못하면 진리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명적 사랑으로 자라지를 못하게 됩니다. 동시에 육적 세상적인 사랑을 먹기 때문에 육적 세상적인 사랑으로 진하게 자라게 됩니다. 이 사랑은 이방 불신 세상의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사건 환경을 만날 적마다 변질되는 사랑입니다. 사단 마귀가 거짓 종들을 통하여 성경구절을 인용을 하니 꼭 하나님 사랑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사랑, 진리사랑인데 거짓 종을 통해서 나올 때는 사람이 바꾸어지는 진리사랑은 없어지고 육적 물질적 세상적인 사랑으로 변질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진리생명의 사랑은 자라지 못하니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 사랑에서 육적 사랑으로 바꾸어지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세상 것을 자랑하고 가르치고 구하게 되면 형제의 신앙생명은 죽는다.

신앙하는 목적이 종교적 사역목적이 되면 그 형제의 신앙생명은 죽는다.

육적 소원 목적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신앙생명은 죽는다.

그런 가르침, 그런 교회로 들어가면, 그런 곳으로 보내면, 그런 곳으로 끌려가면 형제의 신앙생명은 죽는 것이다.

 

신앙생명이 죽으면 결과적으로 성화구원은 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학생이 배움이 없는 곳으로 가거나, 자기가 배우지 않거나 하면 그 학생의 실력적 장래성은 죽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전도를 해서 데려오면 너희들보다 더 악한 지옥자식을 만드는구나!’ 오늘날 예수 믿는 형제가 신앙생명이 죽는 교회로 많이 보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 마귀의 호응적 대립입니다. ‘예수 믿어라, 잘 믿어라, 열심히 믿어라, 죽도록 믿어라해 놓고는 신앙생명을 성화구원이 되지 못하도록 쫄딱 망하여 죽게 하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이 성장되는 진리생명의 이치를 모르면 형제를 죽는데 내어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저렇게 하면 신앙이 죽겠구나, 이렇게 하면 신앙이 살겠구나, 이런 일을 시키면 깨닫는 면에 도움이 되겠구나, 저런 일을 시키면 성경을 못 보겠구나, 이런 일을 시키면 성경을 많이 보겠구나하는 그런 생각들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시키면 은혜가 도로 다 쏟아지겠구나!’ 그런 느낌들이 없습니까? 예를 들어 성경 잘 가르쳐 놓고는 우리 멍석 펴놓고 윷놀이 합시다하면 받은 은혜는 다 쏟아져 버립니다.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 감화성이 지속되지 못하고 그만 끊어지고 맙니다.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일반적으로 인간 못된 아버지는 그런 일들이 혹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비가 자식을 몸파는 데로 내어 보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말씀도 영적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비는 양육자요 보호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있어서 아비는 자식에게 가정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은 가정교육에서 사람을 바로 알고 웃어른들을 바로 공경하는 도덕적 관계성의 질서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자식을 영 위주로 교육을 잘 하므로 본질적 신앙으로 신앙생명의 성장이 됩니다. 그런데 아비가 이방종교적인 풍속 습관이나 가르치고 이어 받게 한다면 자기의 자식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죽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교역자는 영적으로 성도를 양육시키는 영적 아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교역자가 세상에 속한 정신 사상을 복음이라고 이어 받게 한다면 영적 신앙생명은 죽는 것입니다. 결국은 육운동, 사망운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 신앙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돌아다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으로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아주 흔한 것입니다. 어떻게 아주 흔한 것이냐 하면 우리가 영적 표면만 보더라도 세상은 불에 다 타집니다. 그런데 자식의 삶의 목적을 세상목적적인 소원을 가지고 살도록 교육을 한다면 역시 세상과 함께 불타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상이요, 결과적으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로써 태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산 몸으로 주님의 것으로써 삶이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바쳐지는 번제물입니다. 피 한 방울까지! 이방 세상에게 바쳐질 번제물은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로다!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인다

 

자기를 낳고 기르고 교육시켜준 부모를 왜 죽이느냐? 흔히들 말하는 소리가 부모는 자식이 못 돼 먹었다, 불량배라할 것이고, 자식은 말하기를 왜 구박을 하느냐, 부모 없이도 살 수 있는데 왜 간섭을 하느냐하고, 제 삼자들은 말하기를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부모를 대적하고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부모공경성이 싫다는 것입니다. 어른노릇 하려는데 원수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신앙 면으로 분석을 해 보면

사는 삶의 목적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사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인간사회가 그 만큼 악해진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진리신앙사상은 그 어느 쪽으로던 속하여진 일반 사회적 도덕성적 기준이 아니고 신령성, 천국성에 관한 도덕성이기 때문에 대적하여 죽이는 일에 합류하거나 동참할 수 없는 도덕성입니다.

 

다시 정립하자면 대적을 하는 것도

서로 육적이면서 모두 의사성이 안 맞아서 서로 대적을 하는 것도 있고,

육이기 때문에 영을 대적하는 것도 있다.

 

죽이는 것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육신 신체를 죽이는 것.

옛 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육의 사람이 물질성적 세상 쪽으로 가게 해서 신앙생명을 죽이는 것.

 

현재적 자기 속에서도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죽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옛 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새 사람의 일을 죽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훼방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

 

*************************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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