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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직업관

  •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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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직업관
데살로니가후서 3:1-12

인간의 조상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창 3:19)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린다는 말은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 생명과 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 할 때는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될 때 만나가 그쳤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광양에서는 일할 수 없이 자주 옮겨야 했으니까 만나를 주셨지만 가나안에서는 이제 일할 수 있으니까 일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의 직분과 책임을 수행하는 창조의 일터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일터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창조적 인간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일하는 것이 나의 인생 철학의 근본이다"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을 해야 건강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낍니다. 무위도식의 허송세월은 우리의 생명을 좀 먹고 정신을 퇴보시키고 성격을 병들게 하고 영혼을 타락시킵니다. 사람이 할 일 없이 놀기만 하면 우리는 권태에 빠지고 생의 허무감과 무의미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 성취의 기쁨이 생기고 일을 계획할 때 희망의 기쁨이 솟습니다. 일에 열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납니다. 자주 쓰는 호미는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쓰지 않는 호미는 녹이 씁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해야 우리의 심신이 건강하고 쾌적합니다. 서서의 철학자였던 칼 힐티는 그의 저서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의 최대의 부분은 계속되는 일에 있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때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다. 행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일을 찾아라"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활동이다. 내 시간을 지루하도록 길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태다" 옳은 말입니다. 활동(活動)은 문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요, 움직인다는 것은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활동한다는 것은 일하고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활동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요, 크게 활동하는 민족이 훌륭한 민족입니다. 적게 활동하는 사람이 적은 사람이요, 적게 활동하는 민족이 적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활동적인 사람 활동적인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철혈 수상이라고 말하는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오직 세 가지 말뿐입니다. 일해라. 좀더 일해라. 끝까지 일해라" 우리는 일하고 활동하는데서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하여 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부지런히 일합니다. 도둑놈도 열심히 활동합니다. 그런데 마귀나 도둑놈의 일은 파괴적 행동이요, 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일의 내용과 목적이 중요합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생계유지를 위한 기본 수단입니다. 그래서 직업을 생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업(業)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시업(始業)이라하고, 일을 마치는 것을 졸업이라, 종업이라 합니다. 일을 해야 할 내용과 사항을 업무라 하고, 일의 성과나 성적을 업적이라고 합니다. 큰 일을 대업이라 하고, 일하는 사람을 업자라고 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창업이라 하고, 공부하는 일을 학업이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란 것은 일의 산물입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위대한 것, 모든 가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노동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는 일이 고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고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미건조하고 단순한 작업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때 그 일은 권태와 실증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에 기쁨과 보람과 재미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일한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요 저주스러운 고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고프키는 "일을 즐거움이라면 인생은 낙원이다"고 말했는데 바꿔 말하면 일이 의무라면 인생은 지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이 기쁨의 원천이 되고, 창조의 보람이 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현대 산업심리학과 도덕의 문제입니다. 영국 격언에 '근면은 행복의 오른손이요, 절약은 행복의 왼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고 직업에 열성을 다 한다는 것은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직업을 생계유지를 위한 기본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책 또는 직분이란 말을 씁니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다양한 부업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누구는 농부가 되어 농사일을 맡고, 누구는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직책을 다하고, 누구는 상인이 되어 장사를 하고, 누구는 공무원이 되어 행정의 일을 맡고, 누구는 군인이 되어 국토방위의 책임을 다 합니다. 이 땅의 직업을 세분하면 4만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직업은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서 각자가 맡은 사회적 역할이요, 사회적 분담이요, 사회적 기여입니다. 직업은 일면으로 우리의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으로서 생업인 동시에 다른 편으로 보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직업은 우리의 직분이요, 직책입니다. 직책이란 직업에다 책임의식을 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이란 말은 직업에다 본분의식을 더한 것입니다. 자기 직업에 대한 투철한 본분 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책관념과 직분의식을 갖는 사람은 자기의 직업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업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맡은 직업을 성심 성의껏 열심히 감당하는 것이 내 인생의 책임이요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정열과 성실을 다 합니다. 이것을 직분사상, 직책사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이런 고도의 직업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 갈 때 저마다 지위가 있고, 그 지위에는 반드시 따르는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무에 대해서 강한 사명감과 성실한 태도와 헌신적인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직분사상입니다. 사회는 무대요 우리는 그 무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맡은 배우와 같습니다. 배우는 자기의 역할을 연출할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연이라고 합니다. 명배우의 명연기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저마다 세계라는 무대, 사회와 역사라는 무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맡습니다. 우리는 내가 맡은 역할을 잘하는 명연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역할처럼 중요한 것이 없고, 구실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구실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에서 제 구실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구실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직업을 통해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은 사회적인 구실이요 사회적인 역할의 표현입니다. 교수가 되었으면 교수구실을 잘하고, 의사면 의사의 구실을 잘하고, 회사원이 되었으면 회사원의 구실을 잘하고, 기업가면 기업가의 구실을 잘하고, 정치인이면 정치인의 구실을 잘하고, 군인이면 군인의 일을 잘하고, 가정주부면 가정주부의 구실을 잘하고, 학생이면 학생의 구실을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임금님다워지고, 신하는 신하다워지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지고 아들은 아들다워지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하만물에는 다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알맹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마다 저다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종사하는 일에 일인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분투노력이 필요합니다. 고심 참담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장고나 피리도 10년을 해야 제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지난달 Boston 마라톤 대회에서 월계관을 쓴 이봉주 선수가 하루 이틀에 세계의 일인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훈련해서 세계마라톤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걸작이나 대가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요 요행의 결과가 아닙니다. 피와 눈물과 땀의 산물이요, 정성과 고생의 결과입니다. 물건을 만드는 것은 동시에 내 인격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에 열중하는 것은 내 인격에 열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직업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성장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일은 고귀한 마음의 영양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전심전력하고 자기 직분과 직책에 헌신 몰두 할 때 우리의 정신은 고귀해지고, 우리의 인격은 심화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의 직업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직업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경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업을 사회적인 역할로만 보지도 않습니다. 물론 어떤 특수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직업에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직업관이 비신자와 의미가 아릅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천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직업은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소중한 일이요, 책임이요, 위탁이요, 사명이요, 심부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성합니다. 직업을 나타내는 영어단어는 일곱 개가 있습니다. job, business, profession, occupation, calling, vacation, employment라는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천직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세 개뿐입니다. calling이라는 말 vacation이라는 낱말 그리고 profession 이라는 말입니다.

calling 이란 말은 부른다는 뜻입니다. 왜 천직을 calling 다시 말하면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일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을 불러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일을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내 정성과 능력과 지혜와 책임을 다해서 열심으로 해야 합니다. 내 전력을 기울여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계속)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말년에 쓴 편지 디모데후서 마지막 부분에 보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의 살아온 일생을 잠깐 돌이켜 보면서 한 말 "관제와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호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인생의 개선가가 아닙니까? 그는 전력투구의 자세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구시합을 할 때 투수는 스트라익을 넣기 위하여 또 승리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공 한 알을 던지는데 온 지혜와, 온 정성과, 온 능력, 온 기술을 집중시킵니다. 이것이 전력투구입니다. 인생을 전력투구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충실감과 보람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성공한 사람, 사회에 큰 일을 한 사람은 모두가 전력투구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승리는 전력투구의 산물입니다. 나의 생명을 완성하다는 것, 나의 생명을 실현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최선을 다해서 살 때 권태니, 허무니, 불안이니, 태만이니, 불만이니, 낙심이니 하는 어두운 감정들은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전력투구하지 않는 데서부터 그런 어두운 감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부정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자기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지방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가 신통치 않다. 나는 특별한 재능도 없다. 우리 집안도 별 볼일 없다. 나는 무능력자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다. 나 같은 것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위축되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 삽니다. 인생에서 자신감과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섦의 의욕을 잃고 전지의 기력을 상실하고 말아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플러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소중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절망이나 불가능은 없다. 이와 같은 삶의 긍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소망과 용기로 심신이 부풀어오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낙심이나 위축 좌절감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희망과 확신, 그리고 용기를 갖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의욕이 솟구치고,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은 절대로 내게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늠름하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소망의 등불이 있고, 확신과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소망은 강한 용기요, 새로운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강한 용기와 새로운 의지를 가지고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에게서 모든 공포를 쫓아내 버립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소망은 생명에 이르는 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가령 여기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보람도 없고 사는 의미도 없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되는 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삶의 의욕도 없고 무슨 일을 해도 성의와 열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약속을 해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무계획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상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하는데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생애를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한 자세로 신의와 책임을 지키면서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행동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생활에는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를 창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자의 삶의 자세와 이상주의자의 삶의 자세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관이 우리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인생관은 우리 삶의 나침반이요, 생의 길잡이입니다. 성공한 사람,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모두가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한민족,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 국민의 인생관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번영과 부강의 상징이 되고, 세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게된 것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국민에게는 청교도적 개척자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빈곤과 쇠퇴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향락주의적 인생관에서 유래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이 주색잡기에 있다고 보고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기를 즐기는 타락적, 퇴폐적 인생관이 그들의 사회를 가난하고, 뒤떨어진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한 민족이 번영하려면 그 민족의 인생관을 옳게 건설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관이 옳아야 합니다. 인생관은 한민족이나 한 사람의 정신적 지주요 마음의 대들보요, 생활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그 나무는 힘차게 자라납니다. 사람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 인생관이 건전하고 착실해야 그 민족은 부강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해서 스웨덴의 석학 구너뮈르담(Gunner myra)은 "국빈론"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시아의 빈곤은 자원이나 자본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역 주임의 불합리한 생활태도와 인습적인 사회제도에 기인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귀담아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가 가나하게 될 결정적인 요인은 주민들의 의식구조와 정신자세와 인생관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능률, 비활동, 비합리의 악을 없애고 능률과 활동과 합리의 생활기풍, 사회윤리를 일으켜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민의 인생관을 개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냐?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긍정적이고 이상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민족과 국가에 공헌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 의미 있고 보람되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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