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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바라는 딱 한 가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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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딱 한 가지

막10:46-52

 

애들이나 어른이나 뭔가를 항상 바라며 삽니다. 바라는 게 너무 많고 수시로 바뀌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을 딱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 한 가지를 말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쉬울까요 아니면 어려울 까요? 오늘 설교는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자 거지인 바디매오와, 바디매오의 이야기 앞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먼저 바디매오 이야기부터 보겠습니다. 그는 거지들이 흔히 하는 대로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가던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디매오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바디매오가 그렇게 악을 쓰니까 예수께서 가다가 듣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부른다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마치 용수철이 튀듯이 예수께로 갔습니다. 이 장면이 바디매오의 심정을 대변해줍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생명과 다름없는 귀한 것입니다. 한 벌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이랬으니, 거지에게 겉옷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죽으러 가도 겉옷만은 잡고 가는 게 거지이고, 특히 거지에게 겉옷은 구걸을 할 때도 필수품입니다. 누더기 같은 겉옷을 걸쳐야 동정심을 일으킬 수 있고, 집이 없이 살아가니, 동냥한 것을 겉옷의 여기저기에 넣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그만큼 전 존재에 걸쳐 단 하나의 바라는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습니다. 바디매오 에게 이 질문은 여럿 가운데 하나의 바람이 아닙니다. 내게 단 하나의 바람은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물을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고쳐주면 됩니다. 보면 아니까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도 동일합니다. 그 병자에게도 예수는 “낫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단 하나의 바람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바디매오에게 묻습니다. 이 물음은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제게도 동일한 질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에 대답하는 일이 쉬울 거 같죠? 뭐든지 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쉬울 겁니다. 그러나 단 하나만 바란다면 그게 뭐냐고 묻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이만큼 어려운 질문도 없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전 존재를 걸고 구하는 것이 아니고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이 질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예수에게 바라는 걸 구하라고 한다면 그게 뭔지 한 번 생각들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이런저런 욕망의 파편들 말고 인간 존재로써 단 하나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그게 분명했습니다. 너무나 간절한, 너무나 기다린, 두 번 생각할 것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바디매오의 이 대답에서 우리는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에겐 그렇게 간절하게 전 일생에 구할 게 하나 있었고, 예수께서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바디매오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바로 이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이 바라는 그 하나의 소망과 믿음은 상통하는 것이고, 그 하나의 바람으로 인해 구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는 바디매오를 만나기 조금 전에, 바디매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합니다. 이 두 정황은 대비되는 것으로, 정황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도 간구도 구원도 엇갈려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뭐라고 물으십니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0:36) 바디매오에게 묻는 물음과 다른가요? 그때 그들은,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자, 보세요! 이들이 예수에게 바라는 바는 목숨을 내걸고 바랄 수 있는 단 하나의 바람인가요 아니면 보통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꾸자꾸 해 주기를 원하는 여럿 중에 하나인가요? 예수는 장차 십자가의 수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한 길을 가는 중인데, 그의 제자들은 그 하나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는 뜻도 모르고 인간 삶의 무수한 욕망 중에 하나를 끄집어 내 그걸 충족하려고 한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열 제자들은 그런 그들에 대해서 분개합니다. 그들도 똑같은 마음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그런 무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성취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잔뜩 욕만 얻어 챙긴 셈입니다.

바디메오와는 완전히 반대의 정황이 설정되어 있죠? 완전히 반대의 인간이 그려져 있고, 그 인간들의 믿음과 그 결말이 보이죠?

 

우리는 그저 아무 소원이나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독교의 복음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하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 그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욕심나는 것은 많은 데 구할 방법은 없으니 주님께 와서 구하고 악을 쓰고 떼를 쓰면 언젠가는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믿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전합니다. 돈에 욕심이 많고 명예와 지위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바디매오가 구하는 것과 다르고 제자들이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디매오가 바란 것은 이루어졌고 그 일로 인해 그는 구원에까지 당도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바라는 바는 거절당했고 존재까지 부정당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늘날 우리가 이 시점에서 예수께 구하는 것은 뭡니까? 바디매오처럼, 전 존재를 걸고 바라는 그 하나가 바로 내 믿음의 척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과 신앙의 성패를 좌우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디매오는 눈을 뜬 다음에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르다”(akoloutheo)는 말은 제자들에게나 쓰는 전문용어인데 바디매오에게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는 단 하나만을 구하며 따라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바디매오를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이 아니라, 바디매오의 소박하지만 위대한 하나의 소원을 갖고 용수철이 튀듯 전폭적으로 우리를 맡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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