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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혀 다른 백부장의 시선(視線)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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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백부장의 시선(視線)

막15:29-39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그리스도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고 하면서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는 묵묵히 있을 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죠. 결국 예수는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애써 이 사실과 상황을 눈감아 버리려고 합니다. 늘 전지하고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만 말하고 그것만이 우리들 삶에 작동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로서는, 그동안 날고뛰었던 능력자 예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겁니다. 이걸 부조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도 모두 이치에 맞는 건 아닙니다. 부조리한 게 하나둘이 아니고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생은 삽니다. 바로 이 지점, 이치에 딱딱 맞아떨어지던 예수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신을 이치에 맞지 않게 자리매김합니다. 바로 이 ‘이치에 맞지 않는 예수의 상황’이, 항상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과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만약 예수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 존재이고, 우리는 늘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어느 지점에 그와 우리가 만날 수 있겠어요? 만약 이렇게 되면 예수는 하늘에만 있고 우리는 늘 땅에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거예요. 이 지점이 바로 ‘십자가상에서의 부조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합니다. 의미가 있는 한에서 희망이 있고 고생도 참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위로를 받고 일어서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기원전 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를 물을 수 없는 사건이나 상황’이 인간 삶에 늘 등장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찰스 다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무능력하게 혹은 부조리하게 예수가 죽었다는 이 이야기도 의미를 찾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원하는 그런 미신 같은 의미는 없습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렇고, 또 아우슈비츠가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절규하셨듯이, 욥도,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절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는 당연히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은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며,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을 한 번 보세요.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과거와 같은 시선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하고 말하였다”(37-39절).

 

사람들은 성전 휘장이 찢어진 기적 때문에 백부장이 이런 고백을 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39절에는 분명히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일은 십자가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백부장은 그것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아마도 나중에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은 기적을 보고 예수에게 고백을 한 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게 죽는 그 모습, 부조리한 그 죽음의 현장, 의미없는 것 같은 죽음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의 입장이지만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부조리하게 죽는 예수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변절하거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과 희망과는 반대로 이치에 맞지 않게 평범한 한 사람처럼 죽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의 예수와는 이치에 맞지 않는 최후를 보고 그는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이 백부장의 관점은 뭐였을까요? 백부장의 인생은 늘 부조리했습니다. 이치에 맞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도 자신과 같이 부조리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그걸 보고 백부장은 알았습니다. 아, 이 양반이 나와 다르지 않구나! 이 양반은 인간 위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존재로구나. 그래서 그가 말했던 겁니다. ‘이분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조리한 예수의 죽음과 이치에 맞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백부장이 비로소 예수와 만나는 지점입니다.

 

바로 이런 백부장의 방식은 갈릴리 사람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련시키는 방식과 같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예수를 따른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삶의 부조리함을 많이 겪었습니다. 억울하게 로마의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많은 것을 빼앗기고 억눌리며 살았고 또한 예루살렘의 종교 귀족들로부터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자기들만 소외되고 빼앗기고 죽임당한다고 하는 배반감과 열등의식 그리고 패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했고 희망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조롱을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하는데도 십자가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최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조리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최고의 극형을 받고 있고, 천군천사가 내려와서 심판을 하면 좋을 그 자리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버림받은 자의 절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 그리고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외아들마저도 이렇게 부조리함의 극치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버림받으셨음을 보면서 자기들이 당하는 부조리함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생애에 직면해왔던 그 수많은 부조리함을 받아들일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부조리한 죽음이 자신들의 그 부조리한 삶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진정한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 날마다 힘든 삶을 살아오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외아들마저도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앞에서 큰 위로를 받고 자기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아들의 슬픔과 같다고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새로운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이고, 시원적 시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은 목적이 있는 의미 있는 것’이라 했고, 다윈은 ‘인생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구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런 ‘목적’지향적인 인생의 너머로 닥쳐오는 부조리한 것들을 세상의 모든 민생들과 일치 시키면서 저들로 하여금 희망 없고 고통스러운 인생들에게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사는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가 희망인 거고,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조리하게 죽고’ 그걸 백부장처럼, 갈릴리 사람들처럼, 희망 없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신과 일치시키며 살 때 기독교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 강한 것 화려한 것만 추구합니다. TV를 켜면 온통 건강하고 화려한 미남미녀들만 사는 것 같습니다. 어두운 곳,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자꾸 안 보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합니다. 교회마저도 자꾸 커지고 웅장해지려고 하고 화려해지려고 하고 그저 복 받아서 더 건강하고 부유해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이렇게 세상을 추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백부장의 시선과 삶의 전한입니다. 세상 이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렇게 예수의 최후가 되지 않고 되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진 십자가에 구원이 있음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도 부조리함도 버림받음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약함과 아픔 그리고 부조리함을 이겨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약함과 아픔과 부조리함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고 찰스 다윈을 넘어서는 십자가에 이치에 맞지 않게 달려 죽은 예수의 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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