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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도 갑질하잖아

  • 양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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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너도 갑질하잖아

빌2:1-11

2015.1.11

요즈음 갑질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한항공 부사장인 조현아씨가 규정대로 땅콩을 서비스하지 않았다고 승무원을 무릎 꿇게 하고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후 비행기를 회항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또 백화점에서 모녀가 주차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리고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또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자에게 여러 번 택배를 찾아가라고 했다고 경비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최근에는 대전의 모 백화점에서 옷을 사간 여자가 립스틱이 묻어 있는 옷을 바꿔달라는 과정에서 시비가 일자 종업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이런 갑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언론에 보도 되지 않아 그렇지 갑질로 발생하는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 갑질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카트’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트는 한국 상업영화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다룬 영화입니다. 줄거리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좀 더 알려고 검색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823만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된다는 것과 그중에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430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사회가 갑질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갑질은 우리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인간이 사는 세상에만 갑질이 일어나는 것이라 동물세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자가 사냥을 하면 가장 먼저 대장 수사자가 먹고 그다음 암사자들, 어린 새끼들이 차례로 먹습니다. 그리고 사자 가족이 먹다 남긴 찌꺼기는 하이에나와 독수리, 자칼이 와서 처리합니다. 그런데 대장 수사자는 자기가 왕이라 생각하고 사냥을 하지 않았어도 그 누구에게도 자기보다 먼저 먹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만일 대장 수사자의 뜻을 어기고 사냥한 고기를 먼저 먹으면 결국 물어 죽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갑의 횡포는 만연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나도 갑질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와 을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량으로 가기 때문에 결정권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월적 지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안 가면 됩니다. 지난 번에 호주 세미나에 참석했던 목사님들이 3월 초에 세미나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중에서 교회 사정으로 빠지는 목사가 생기자 이 일을 추진하던 목사님이 다른 사람을 보충할 때까지 보름 정도를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 집회를 핑계로 하루만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연락이 오지 않아 일방적으로 취소하였습니다. 갑질은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갑질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고민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갑’은 계약관계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계약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진 자를 갑이라고 하고 그 상대방을 을이라고 하는데, 갑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말과 행위를 통칭해서 갑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갑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대등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 때에 머리나 발에서 뼈를 빼서 만들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만들었습니다.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비록 하와가 아담에게서 만들어졌지만 하와가 아담에게 종속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로 하와를 이끌어 오시자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어떻게 깨어졌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한 가지만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뱀의 형상을 입고 하와에게 다가가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러자 하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동산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 우리는 하와의 대답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두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변조하자 뱀은 하와의 마음이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때에 최종적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한 마디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와는 이 말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주자 그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모두 선악과를 먹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16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하와가 남편을 원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여자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남편의 지배를 받아야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초의 갑질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하와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갑질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갑질의 근원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갑질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성공의 적, 교만에서 교만의 7가지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 속성이 ‘보편성’입니다. 즉 누구나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갑질을 크게 셋으로 구분해보았습니다. 행동으로 피해를 입히는 갑질은 대갑질, 말로다 피해를 입히는 갑질은 중갑질, 자신의 생각에서만 일어나는 갑질은 소갑질로 구분했습니다. 이번에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땅콩 서비스 문제로 비행기를 회항하고 승무원들에게 폭행하고, 모 아파트에서 젊은 사람이 경비원들을 폭행하고, 백화점에서 모녀가 주차 안내원을 무릎 꿇리고 폭행한 것은 대갑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 시향의 박현정 대표가 막말로 직원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중갑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갑질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갑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행동으로는 갑질을 하지 않아도 말과 생각으로는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갑질, 중갑질, 소갑질이 고정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갑질이 자라서 중갑질이 되고 중갑질이 자라서 대갑질이 되는 것입니다. 조현아씨가 처음부터 대갑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소갑질이 자라서 중갑질 정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부친의 힘을 등에 업고 대한항공의 부사장의 자리에 올라가자 더욱 교만해지자 대갑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갑질은 중갑질로, 중갑질은 대갑질로 변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제2의 조현아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갑질에서 중갑질이나 대갑질로 발전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대로 갑질의 발전을 막지 않으면 개인의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낫다고 생각하는 소갑질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갑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갑질이 자라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행동으로 피해를 입히면 우리 사회는 계층간의 갈등으로 건강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하면 분노하고 강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갑질이 자주 일어나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갑질을 찾아내서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부부관계를 보십시오. 남편과 아내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남편들이 갑질을 했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에게 갑질을 하면 안 됩니다. 요즈음 황혼 이혼이 늘고 있는 것은 남편들의 갑질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아내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끝까지 함께하려면 지금이라도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역시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하지 자식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신이 낳고 키웠다고 자식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번에 서초구에 사는 40대 가장 강모씨가 생활고를 비관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시어머니의 갑질은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 며느리 시절 갑질을 당했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시어머니가 되면 또 며느리에게 갑질을 합니다. 시어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닙니다. 법적으로 새로운 모녀관계가 된 것입니다. 요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멸시 천대를 받는 것은 갑질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큽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종종 발생하는 갑질을 발견하고 을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둘째로, 직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국영기업과 민간기업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직장생활은 상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사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사는 갑이고 부하직원은 을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사는 갑질을 하면 안 됩니다. 또한 직원은 오너의 부속품이 아니고 회사의 발전을 위해 동역하는 존재하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로 함부로 해고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그리스도인은 혹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어도 갑질을 하면 안 됩니다.


셋째로, 학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학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가르치는 자는 갑이고 배우는 자는 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이든 교수든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박사과정에서는 학생을 자기의 사적인 일에 머슴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얻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울분을 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갑질을 하면 안 됩니다.


넷째로, 교회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작은 교회는 거의 부교역자가 없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부교역자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중대형교회에서는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교역자가 설교를 잘해서 교인들에게 인기를 끌면 은근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압력을 넣거나 기회가 나면 쫓아버립니다. 우리교회 이은성 목사님도 그런 피해를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교역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동역자이지 갑질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중대형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청빙을 받은 경우는 미묘하게 갑과 을의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갑에 해당하는 당회원들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담임목사를 쫓아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당회원이 아닙니다.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질하는 그 순간은 황홀할지 몰라도 그 결과는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이보다는 비록 평범할지라도 평등함을 즐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한 마디로 갑질을 하지 말아야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너무 멋진 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단지 갑질을 하지 않아야 가장 안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지 갑질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지 않습니다. 갑의 자리에서 을의 자리로 내려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본을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얼마든지 갑질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질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갑의 자리를 버리고 을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올라가도록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때에 우리 사회는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쳐봅시다. “우리 함께 예수님처럼 갑이 아니라 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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