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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절에 주님의 음성을 듣다

  • 양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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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부활절에 주님의 음성을 듣다

마28:1-10

2015.4.5 


마 28:1-10절 2015.4.5
오늘은 성찬식이 있기 때문에 짧은 설교를 더 짧게 하겠습니다. 먼저 인사합시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새벽녘에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무덤으로 찾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여인들이 무덤에 간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서에는 여인들이 무엇 때문에 무덤에 갔는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즉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를 치룰 때에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향품을 넣어 무덤에 안장합니다. 그런데 이미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무덤에 안장되셨는데, 왜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해서 무덤에 찾아갔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할 때에 향품을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신을 달라고 해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세마포로만 시신을 싸고 향품을 넣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등이 이것을 지켜보다가 아리마대 요셉이 향품을 넣지 않은 것을 보고서 그것을 넣으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이렇게 하는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거짓메시아로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알고서 도망을 갔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는 시신 가까이 있던 자는 단 한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도대체 이 여인들이 모험을 무릎 쓰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여인이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어떤 자입니까? 유대인들은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지명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사랑받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달라는 ‘망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탈무드의 증언에 의하면 막달라 지방은 염색과 직물공장, 생선저장 및 가공과 조선업 등이 발달한 상당히 부유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이교도였다고 합니다. 성적 비행이 심하여 부도덕하여 후대 이 도시의 몰락을 방종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혹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유한 고급 창녀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귀신들렸던 자로서 고침을 받은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에게 시달려 본 자는 그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 압니다. 저는 축사사역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귀신에게 시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신을 귀신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옥합을 깨서 주님께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거기서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후 두 번이나 향유를 부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그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정말 아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때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께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죄 때문에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았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영생과 천국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정말 깨달으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시신은 없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덤의 입구가 큰 돌로 막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우리의 무덤과 좀 다릅니다. 굴을 파고 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굴에 넣고 그 입구를 큰 바위 돌로 막았습니다. 더군다나 무덤의 입구를 로마제국의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던 사람의 시신이 없어지고 무덤이 텅 비어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는데 제자들이 시체를 감추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당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세계 최강인 로마제국의 경비병입니다. 그들을 힘으로 물리치려면 그들보다 강한 군대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따라서 그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여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무덤에 안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거짓말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다가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10여 년 전에 ‘마이클 베이전트’라는 사람이 ‘지저스 페이퍼’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조작된 것이며, 실제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은 일어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생존하면서 자신의 종교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철저히 상상력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는 ‘다빈치코드’를 쓴 ‘댄 브라운’과 같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탄의 사주를 받아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무너뜨리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인도선교사 ‘스텐리 존스’가 인도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던 중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가면 마호멧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고, 인도의 능수해안에 가면 석가모니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했던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없는데 과연 예수가 정말 이 땅에 있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스텐리 존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덤에 들어갔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무덤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언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8장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안식 후 첫날’입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일요일에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바로 부활하시지 않고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 날이 되려는 찰나에 부활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7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6번째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쉬셨듯이, 예수께서도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실 때에도 율법을 좇아 할례와 정결예식을 행하셨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구속사역을 다하신 후 안식일에 안식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토록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을까요? 그것은 율법아래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철저히 율법을 지키심으로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이루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율법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아래 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저주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저주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죄 때문에 죽어야만 되고 죽은 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신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죽지 않고 영원히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께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6절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입니다. 천사가 ‘그냥’ 살아나셨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냥 살아나셨다고 말씀하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죽음을 목전에 두시고 평소 제자들에게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우리의 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고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런데 주님의 약속가운데 성취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약속이 이루지기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어떻게 전하라고 했습니까? 그 사실을 ‘빨리’ 전하라고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천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그냥 전하라고 하지 않고 ‘빨리’ 전하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절박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게으르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빨리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를 삼는 이유는 복음을 빨리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제자를 삼으면 복음을 빨리 전할 수 있습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복음을 전할 사람이 제곱 승으로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제자 삼는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제자훈련을 받은 의미를 깨닫고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악한 마귀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있을 때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과 3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가난했고 복장은 허름했으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얼굴에는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할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늘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소. 하지만 나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 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비결은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고난은 기껏해야 사흘뿐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사흘만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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