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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연출하셨을까?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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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왜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연출하셨을까?

눅9:28-36

2016.6.19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던 중 갑자기 그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으며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는 누가복음만 기록하지 않고, 마태복음(17장)과 마가복음(9장)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는 마태와 마가복음에 없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8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예수께서 왜 소위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복음이 마태와 마가복음과 다른 점입니다. 왜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을 특별히 기록하였을까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복음서마다 예수님을 다르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 마가는 종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살 수 있도록 피조된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피조물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언제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4장 26절을 읽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성경은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에 기도하기시작했을까요? 그것은 에노스가 ‘연약함’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연약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는 자만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경력이 화려해도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도 전심으로 주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주님께 무릎을 꿇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영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을까요? 그것은 특별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을 눈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특별히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있다면 일상의 장소를 떠나 특별한 장소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중대한 문제 앞에서는 특별히 기도하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이 몰려오자 얍복 나루터에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기 전 시내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울 때에 갈멜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도 특별히 기도할 제목이 있을 때마다 특별한 장소에서 기도했습니다. 세 번의 장기 금식을 할 때도 그러했고, 40일간 매일 17시간 기도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다고 우리도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다면 장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곳이 집이든 직장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한 문제를 주님께 부탁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해결을 받고자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9절을 읽겠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성경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와 변화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변화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절대적 상호의존관계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에 자신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고 기도하는 대상에게도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자나 자녀의 변화를 위해 잔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부부간에 서로 상처를 입습니다. 자녀들은 더 이상 잔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막습니다. 심한 경우는 집을 뛰쳐나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에게든지 상대방에게든지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변화를 주시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중국에는 리수스 족이 있습니다. 리수스(Lisus) 족은 큰 산맥을 중심으로 남 리수스와 북 리수스 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습니다. 영국의 프레지어 선교사가 리수스 족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넓은 땅 어디에 가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오전에는 남 리수스 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오후에는 북쪽 리수스 마을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10년동안 그렇게 사역하는 가운데 100여 명의 리수스 족이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우연히 남 리수스 족 한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남쪽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오전에는 남 리수스를 위해서 기도했고 오후에는 북 리수스 마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남 리수스 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수천 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무려 100배 가까이 더 많은 사람이 남쪽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프레지어 선교사는 이렇게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는 것임을 알았다. 기도가 사역이었다.”그렇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큰 기적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점점 기도할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변화와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살 것인지를 …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와 기적을 맛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변화산 사건을 보여주셨을까요? 누가복음 9장 30-32절을 읽겠습니다.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함께 간 제자들은 깊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다가 깨어나 보니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고서 그들이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들이 구전으로 모세와 엘리야의 특징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것과 외모가 일치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의 손에 율법의 사본을 갖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불수레를 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듣던 중 직감적으로 그들이 각각 모세와 엘리야임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30-3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본문에 ‘영광중에 나타나서’가 있는데 이것의 주어는 누구일까요? 언뜻 보면 예수님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입니다. 즉 두 사람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인물 중에 누가 감히 예수님과 거의 동격의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그들이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별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별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별세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려면 31절을 영어버전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버전은 31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영어버전과 우리말 번역이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말 버전에는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에 대한 해석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별세’에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를 포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fulfillment’는 ‘이행, 달성, 완수’라는 의미가 있는데, 예언과 관련해서는 ‘성취’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한 별세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는 죽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별세’가 헬라어 ‘exodus’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어떻게 출애굽을 했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림으로 장자의 죽음에서 벗어나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자신이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산 사건을 연출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경험할 때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변화산 사건을 보고서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3절을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는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 수준으로, 즉 그들과 동격 정도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신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메시아임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을 체험하기 전부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히고 두 배에 고기가 가득차서 물에 잠기는 것을 보고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산 사건을 목도했지만 여전히 예수께서 자신들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메시아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주인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아직도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도 축복의 반열에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어떻게 종결을 맺고 있습니까? 35-36절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본문은 구름 속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나자마자 오직 예수만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변화산 사건을 이렇게 끝을 맺고 있을까요? 변화산 사건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주인공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어떤 기적을 경험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크게 보이는 기적은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가 유혹할지라도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을 좇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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