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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용이 제자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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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관용이 제자도입니다.

눅19:49-50 2016.7.31 


누가복음 9장 49-50절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2016.7.31
본문은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일로 제자들이 금지한 것과 관련하여 요한이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께서 그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쫓아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관련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듯이 우리도 귀신을 쫓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것은 칭찬을 받아야 할이지 제지를 당할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 의해 금지를 당한 것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일을 잘해도 우리가 얼마든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야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해도 얼마든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100%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그의 인생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번 태장을 맞고, 돌에 맞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해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여러 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그가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아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것이 마귀의 속임수일까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실제로 고통을 당하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고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도 얼마든지 큰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 말씀대로 귀신을 쫓았어도 제자들에게 제지를 당했듯이, 우리도 주의 뜻대로 살아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여러분 중에는 혹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도 고통이 있다면 굳이 말씀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고통’의 측면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순종을 상급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말씀에 순종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상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상급이 현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을 당해도 말씀에 불순종하기때문에 당하지 말고 순종하기 때문에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귀신을 쫓았는데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절)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는 것을 금지한 이유를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신을 쫓는 것을 금했다고 한 말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취할 태도와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자신들을 특권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어도 단지 자기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갑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렇게 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세워서 자기를 낮추는 자가 겸손한 자라고 가르치신 다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께서 겸손하라고 말씀하셔도 마치 특권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을 본받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최고의 본은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분이 얼마나 겸손하셨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로 이런 삶을 본받는 것이 제자도인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진정한 제자도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닮아가려는 열정보다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성공해서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므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특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은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그들과 예수님의 생각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때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자신들의 결정과 주님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은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사방을 평정하고 화려한 궁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음을 보고 마음에 걸려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대상 17:2). 그런데 그 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대상 17:4). 성경은 다윗을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할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한 생각을 해도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지 주님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좇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말씀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알고 칭찬하고 격려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로 하여금 귀신을 좇아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의 생각을 주님의 뜻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의 생각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은 당시 예수님의 12제자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종종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생각과 상황과 전통과 경험을 좇아 살아오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해서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날마다 큐티를 하면 됩니다. 우리말에 “이슬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고, “낙숫물이 바위의 구멍을 뚫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씩 ‘날마다’ 하는 것의 힘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큐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할 때에 우리의 생각보다 주의 말씀을 앞세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먼저 귀신을 쫓는 것을 금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주님께 여쭙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는 것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 말고 귀신을 쫓는 것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주님께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제자들이 뜻밖의 상황을 만났을 때에 주님께 묻지를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도 귀신을 쫓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조차도 주님께 도움과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습니다”고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은 것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혹자는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다소 문제점을 내포합니다. 만일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를 반대하는 자는 우리를 거역하는 자이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당장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그토록 예수 믿는 자를 박해했던 바울이 구원을 받은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배경에서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만 자기들을 따르지 않은 일로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같은 주님을 믿고 있지만 단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배척했을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 혹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을 반대자로 취급하지 말고 오히려 돕는 자로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금 기독교계는 극도로 분열되어가고 있습니다. 교계가 점점 분열되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포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원수로 생각지 말고 주의 일에 협력하는 자로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타종교인도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한 형제자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끼리는 편 가르기를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고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은사와 사명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분쟁하지 말고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요 17:11; 엡 4:3).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동일한 주님을 믿지만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합력하여 자들입니다. 따라서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도우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마귀에게 이용을 당해 편을 가르거나 원수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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