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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70인 전도대의 대화로 주의 음성을 듣다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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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70인 전도대의 대화로 주의 음성을 듣다

눅10장 17-20절

 2016.8.28 


오늘 본문에는 70인 전도대가 전도현장에서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읽겠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70인 전도대가 어떻게 영적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적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전쟁보다 더 치열합니다. 전쟁은 영적이든 육적이든 이겨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힘과 용기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긴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적은 수의 배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전략을 갖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주요무기는 ‘조총’이었는데 정확성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활보다 몇 배의 정확성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가 백 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보를 1미터로 잡아 계산한다면 약 백 미터 정도 밖에는 날아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에는 ‘총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대포인데 오백 보 정도가 날아갔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 ‘천자총통’은 구백 보 정도까지 날아갔습니다. 한 보를 1미터로 계산한다면 약 1킬로 정도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했습니까? 접근전을 금지하고 적군과 멀리 떨어져서 싸우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해군은 그렇게 많지 않은 배를 가지고서도 희생자를 많이 남기지 않고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포함해서 7년 동안 왜군을 잘 막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최고의 전략은 무엇일까요?


본문 1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70인 전도대가 귀신을 항복시킨 것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주님께서 주신 최상의 무기입니다. 영적전쟁에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전략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을지라도 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최신 무기는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그 어떤 적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적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이라는 무기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의 이름을 사용하려고 하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의 이름을 사용하면 영적전쟁에서 백전백패합니다. 따라서 영적전쟁에서 이기려면 전략을 바꿔야 합니다. 영적전쟁의 성패는 예수의 이름에 달려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패배합니다. 그러나 영적전쟁에서 예수의 이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평소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평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훈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기쁨입니다.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을 통하여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로 언제 기쁨을 맛본다고 생각합니까? 뭔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입니다. 즉 뭔가를 소유할 때에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70인 전도대는 전도를 통해서 기쁨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70인 전도대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 기쁨을 맛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도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의 영혼이 건강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와 내세에 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기쁨을 맛보는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뭔가 원하는 것을 소유함으로 기쁨을 맛보지만 우리는 전도를 통하여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전도를 하면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전도하는 것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말씀에 순종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뭔가를 얻음으로 기쁨을 맛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기쁨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17절을 읽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70인 전도대는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을 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마가복음 16장 17-20절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17-18절은 믿는 자들에게 어떤 표적이 따르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표적이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느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복음을 전파할 때에 믿는 자에게 따른다고 약속하신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약속한 표적이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집사였지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던 것은 그가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 전도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70인 전도대가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을 쫓아낸 결과를 보고하자 예수께서 크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18절입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느니라.”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70인 전도대가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70인 전도대가 귀신들이 항복했다고 했는데,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귀신과 사탄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과 사탄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한 분이시라고 주장하듯이,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귀신을 쫓는다는 것은 곧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고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느니라.”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사탄이 공중에서 완전히 폐위되어 곤두박질쳤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람직한 해석으로 볼 수 없습니다. 혹자는 70인 전도대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내쫒고 병든 자를 고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자 마귀가 분을 내어 번개 같은 속도로 세상에 뛰어 내려온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요한계시록 1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그러나 저는 이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항복했다는 말은 귀신이 힘을 잃고 손을 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히려 사탄이 분이 나서 세상에 내려와서 성도들을 공격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가지 해석과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귀신이 쫓겨남으로 사탄이 그의 통치영역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면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에 사탄은 그의 통치 영역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면 반드시 복음을 전해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보았노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70인 전도대가 귀신을 쫓아낼 때에 사탄이 하늘로 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주목하여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할 때에 단지 팔짱을 끼시고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목하여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귀와 영적전쟁을 할 때에 눈을 떼시지 않고 지켜보시고 마귀에게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전도자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항상 가까이서 보호하십니다.

 

두 번째로, 모든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결코 해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70인 전도대를 전도현장에 보내셨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전도현장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즉 이미 귀신을 항복시키는 능력을 행하고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쫓아내고 돌아온 70인 전도대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70인 전도대원들이 귀신을 쫓아내긴 했지만 그들에게 이런 능력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줄도 몰랐고 빵의 문제를 해결주시기 위해 오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신 고난 받는 메시아인 줄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도를 부탁하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전도를 부탁하신 분은 이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70인 전도대원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주셨기에 이 세상에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마귀와 싸워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붙잡고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굳게 확신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지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종전에 살펴본 대로 70인 전도대는 나가 전도할 때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가자 너무 기뻤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을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맛을 봐야 맛을 알 수 있듯이 사역의 기쁨은 사역을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우리는 한 달에 두 번씩 해외에 나가 전도집회를 인도하고 제자훈련을 합니다. 특별히 필리핀에서는 한 번 전도집회를 할 때에 수백 명이 참석하고 그 중에서 100여 명 이상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원주민 목회자들은 제자훈련을 통하여 제자 삼는 목회를 하기로 결단합니다. 바로 이런 묘미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이 있지만 많은 경비를 들여가며 자주 국내외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70인 전도대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70인 전도대원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수고했다”라고 칭찬하고 끝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사역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크게 기뻐할 것이 있음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70인 전도대원들은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들이 사역으로 인해 얻은 기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얻는 기쁨과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비주얼 시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찰나적이고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비주얼 시대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이 좋으면 속도 좋다고 속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멋있지 않으면 속이 아무리 훌륭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책도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잘 팔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쌍용이 판매부진으로 중국 사항이 자동차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흑자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티볼리의 디자인 때문입니다. 티볼리는 과거 쌍용차가 가지고 있는 투박한 분위기를 확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쌍용차가 주었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운전하다가 종종 티볼리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물론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본질을 추구해야지 현상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능력을 행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지 자신이 행한 능력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본질을 잊고 현상을 따라가면 실족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능력으로 전도하면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자신 안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해도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분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현상을 좇지 말고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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