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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은 자신의 명예때문에 응답하신다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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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주님은 자신의 명예때문에 응답하신다

눅11:5-13

2016.10.16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주기도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잘못된 기도를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문학에서는 독자의 주관적 해석과 이해를 존중하기 때문에 글이나 시나 그림 등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책이지 우리의 생각대로 살 것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습관적으로 대하지 말고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본문의 비유를 일컬어 ‘한밤중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느 사람이 한밤중에 찾아 온 친구에게 대접할 빵이 없어서 이웃 친구에게 찾아가서 빵을 좀 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미 가족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귀찮았지만 빵을 빌려주지 않으면 계속 빌려달라고 졸라댈 것이기 때문에 빵을 주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강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전까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중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당시의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유를 사용할 때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상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5-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이 말씀이 한 밤중에 떡을 빌리러 온 사람에게 잠을 자던 벗이 떡을 빌려준다는 것입니까? 안 빌려준다는 것입니까? 전자의 의미입니다. 즉 잠을 자는 한 밤중에 떡을 빌리러 왔어도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떡을 빌려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말씀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침실에 누었는데 어떻게 떡을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당시 풍습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손님이 오면 마을 전체의 손님으로 생각해서 극진히 대접을 합니다. 이런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손님을 잘 대접한 것으로 봐서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런 풍습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기 집에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빌리러 왔다고 하면 잠자리 누웠을지라도 벌떡 일어나 떡을 빌려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한밤중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너희 중에 누가’라는 문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라는 문구가 누가복음에만 자그마치 6번이나 등장합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7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었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누가복음 11장 11-13절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또 누가복음 12장 25절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또 누가복음 14장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또 누가복음 14장 28절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장 4절입니다.“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너희 중에 누가”는 문구는 모두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상되는 답은 모두 한 가지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즉 친구가 빵을 빌리러 왔는데 이미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귀찮아서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이런 풍습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떡을 빌리고 못 빌리고는 떡을 빌리러 간 사람과의 태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즉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에 빌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을 빌려준 사람 자신의 이유 때문에 당연히 떡을 빌려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마치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태도 때문에 떡을 빌릴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청함’을 재해석해야 합니다. 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여기서 우리는 ‘간청함’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간청함’은 헬라어로는 ‘아나데이아’(ἀναίδεια)인데,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NIV에서는 ‘boldness’ 즉 ‘뻔뻔함’으로 번역하였고, RSV에서는 ‘importunity’ 즉 ‘끈덕짐’ 으로 번역하였고, Good News Bible에서는 ‘not shamed’ 즉 ‘부끄러움이 없는’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역판에서는 ‘강청함’으로 번역하였다가 지금은 개역개정판에서는 ‘간청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과연 ‘아나이데이아’를 어떤 뜻으로 해석해야 저자의 뜻에 맞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떡을 빌리고 못 빌리는 것은 떡을 빌리는 자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나데이아’를 떡을 빌리는 자와 관련해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떡을 빌려주는 자와 관련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아나데이아’를 빵을 빌려주는 자와 관련해서 해석한다면 다음의 5가지 중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예를 들겠습니다.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뻔뻔하기 때문에 떡을 빌려준다,’,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끈덕지기 때문에 떡을 빌려준다.’,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강청하기 때문에 떡을 빌려준다.’,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간청하기 때문에 빌려준다’,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빌려준다.’ 당연히 ‘떡을 빌려주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빌려준다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러면 왜 떡을 빌려주는 것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당시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마을 전체의 의무였기 때문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빵이 필요하면 한 밤중이라도 가서 빌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빵을 빌러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마을의 미풍양속을 해친 사람이 되고 그 소문이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지게 되어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한밤중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테크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위하여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께 이런 사실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 절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던지 이스라엘을 모두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합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하셨나이다”(출 32:11-13절).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노하심으로 진멸하신다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산에서 죽이기 위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진멸한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즉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한다는 약속도 지키시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는 뜻을 거두어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에 내리기로 하신 화를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이런 사실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23편 3절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은 우리 자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자신은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도 자식을 위하여 희생을 합니다. 최고의 것으로 먹이고 입히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는 잘 먹고 사는데 자녀를 길가에 버려두거나 구걸해서 살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 11-13절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아침 식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아침을 웬만하면 거르지 않은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전혀 식사문화가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식탁에는 반드시 생선과 삶은 계란과 빵과 야채가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뱀과 전갈은 마귀를 상징하는 것으로(눅 10:19)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둘을 대조적으로 사용하셔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치 부모가 아침 식사에 자녀에게 생선과 계란 대신에 해로운 뱀이나 전갈을 주는 아버지가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똑같은 내용을 마태복음에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좋은 것’ 대신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본문을 근거로 우리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그런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본문은 직접적으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누구십니까? 곧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자신까지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까지도 내어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심에 호소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토록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악한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피함을 당하지 않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까지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얄팍한 흥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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