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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가 탐심을 물리치세요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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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삼가 탐심을 물리치세요

눅12:13-21

2017.1.15 


우리는 지난 주, 수많은 무리가 모여들 때에 예수께서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무리 중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해서 재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판장이 아니신데 형을 명해서 재산을 나누라고 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상속의 분배가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당사자는 랍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이 형에게 더 돌아갔기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렇게 청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예수께서는 랍비로 불리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요청에 답하시길 단호히 거절하시고 오히려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단지 상속 문제만을 해결해주는 랍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알기 원하십니다. 단지 육신의 문제만을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영원히 우리의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신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주님, 당신의 저의 구원자이시고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5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여기서 ‘탐심’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탐심을 세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좀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렇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탐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화자의 대상이 갑자기 바뀐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전까지만 해도 예수께서는 한 사람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그들은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탐심의 문제는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갖가지 탐심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특별히 탐심 중에서도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탐심 중에서 물질에 대한 탐심을 물리쳐야 할까요? 그것은 곧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이런 사실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부흥한 곳에 물질적인 번영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영적인 타락도 뒤따랐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후에 독일의 기독교는 가장 진실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기독교가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적으로 타락해서 교회당은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어디로 떠났습니까?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영국으로 건너간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질적으로 번성하게 되자 또 타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기독교가 바로 청교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간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자 타락해서 지금은 악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후 6:10). 물질의 탐심은 곧 멸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따라서 단지 물질이 많아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복은 물질을 잘 쓰는 것입니다. 물질을 잘 이용하지 못하면 물질의 포로가 되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물질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의 탐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왜 주님을 믿고 있는지, 왜 돈을 벌려고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돈이 많아져도 거기에 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는 오직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세를 목표로 삼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천하영광, 모든 물질을 다 줄 테니 내게 절 한번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이와 동일한 시험을 합니다. 우리는 이 유혹을 멋지게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한 부자 비유입니다. 16-17절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성경은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만 언급할 뿐, 부 자체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가 부자가 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가 부자이지만 물질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더 많은 재물이 들어오자 어떻게 했습니까? 걱정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밭의 풍성한 소출로 기뻐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풍성한 곡식을 보며 장차 곡식 쌓아 둘 곳을 걱정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한 것이 아니라는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물질이 많다고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걱정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걱정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걱정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마음의 걱정을 몰아내야 합니다.


부자는 물질이 많음으로 생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18절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여기서 ‘곳간'(아포데커)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창고’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24절;3:17;마3:12;6:26;13:30), 이 부자는 아마도 대농(大農)일 뿐만 아니라 상인의 역할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풍성한 것을 보고서는 곳간을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즉 욕심의 성을 더 높이 쌓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욕심도 더 커져만 갑니다. 삼성의 재산이 수백조원입니다. 그런데 좀 더 돈을 벌기 위해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뇌물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행위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많아지면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이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냐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소 먹고 살 정도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면 더 큰 욕심이 생깁니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자라가는 것이 인간의 욕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욕심을 방치하면 자신도 모르게 더 커져서 결국은 망하게 되기 때문에 날마다 수염을 깎듯이 제거작업을 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겠다고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는 쌓아둔 재산을 보고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돈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만 있으면 정말 인생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 “주여, 제가 당신 품에 안기기 전에는 이 세상에 그 어떤 평안도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돈 없이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올려놓으실 정도로 돈의 위력을 알고 계셨습니다.


서울에 수백억을 번 40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암 말기라 의사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듯이 기적을 바라보고 은사의 은사를 받은 목사님을 초청하여 안수 기도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초청을 받은 목사가 간단히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그 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만 살려주면 백억을 헌금하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목사는 속에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목전에 둔 자가 100억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서는 기도를 해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목사님! 왜 그냥 가십니까?”라며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서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너는 돈이나 움켜쥐고 죽어라! 하나님의 능력을 돈 백억 주고 살 줄 알았더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했을지 모르는데.” 왜 간암환자가 “목사님, 살려면 주시면 백억을 헌금하겠다”라고 했습니까? 돈이면 간암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 있다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돈이 있다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돈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까? 돈이 있다고 진짜 행복합니까? 지금 한국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삼성의 이건희 회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현재까지 재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좀 편할 뿐이지 돈은 그보다 더 큰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돈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돈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20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아프론)는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부자가 하나님께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까? 그가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21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하나님께는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많은 것은 복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그 받은 복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주시는 모든 것을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일에 사용하기 위해 가장 적지만 강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정말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물질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의 필요는 채우기 위해 예산을 짜고 집행하듯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를 계획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953년 예일 대학교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하지만 특정학생이 다른 일반 학생보다 왜 더 성공적인 삶을 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질문 중에는 학생의 성별, 인종, 키, 머리카락 색깔 등으로 기본적인 항목들과 함께 삶의 목표가 무엇이고 앞으로 그 목표를 어떻게 달성해 나갈 것인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세월이 22년이 흐른 1975년, 그들의 삶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설문지에 삶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썼던 학생들이 3%였는데, 그들의 재산 총액이 나머지 97%의 재산 총액보다 많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면 그만큼 성공할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 돈을 벌면 이 세상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큽니다. 그리고 물질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에 사용하게 되므로 마지막 날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거룩한 거부가 되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일에 더욱더 크게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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