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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5 11:45

생명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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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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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깊이

요 10: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7년 5월7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몇 명일까요? 호기심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봤더니 학자들에 따라서 기준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현재 살아있는 사람 숫자의 15배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 인구가 75억 명이라고 하니, 지구에서 살다가 사라진 이들은 1천억 명이 넘는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 인간을 5만 년 전의 호모사피엔스로 보느냐, 아니면 2백만 전의 호모에렉투스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숫자는 달라질 것입니다. 어쨌든지 지금도 아주 많은 사람이 지구에 살고 있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서 살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어 없어진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앞으로 5만년 후의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이런 질문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살아있다는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한 질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질문을 중심에 붙들고 있습니다. 생명이 요한복음의 영적인 화두입니다. 요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를 생명과 빛이라고 말합니다. 요 14:6절은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죽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게 우리의 인생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의 몸은 죽어 없어져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거라는 대답을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걸 실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손에 잘 안 잡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제를 놓고 논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일단 요한복음 기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요 10:1-18절은 예수를 ‘양의 문’, 또는 ‘선한 목자’로 표현합니다. 목자 개념은 구약성경에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따라서 우리가 교독한 시 23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양 혼자서는 양과 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풀이 없어서 배고프거나 물이 없어서 목마르다 해도 목자가 결국 풀 있는 곳과 물 있는 곳으로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양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양이고 하나님이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의 신앙고백을 요한복음 기자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목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양들에게 위험이 닥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위험은 포식자들의 등장입니다. 목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포식자들을 막아줍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서 그 어떤 관계보다 더 긴밀합니다. 아주 특별한 위험은 양을 훔치는 도둑들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요 10: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본문이 가리키는 도둑은 거짓 선지자, 거짓 정치인, 거짓 사업가, 거짓 선생들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런 이들은 위선자로 불렸습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도둑이라고 본 것입니다. 10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본문은 도둑과 목자를 아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도둑은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이며, 목자는 생명을 풍성하게 주는 자입니다. 실제로는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교 고위층을 더 옳은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거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기적을 보이셨으니 다른 이들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평가를 받으셨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교적 괜찮은 유랑 랍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근거를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즉 삶이 더 풍성해졌을까요?


예수님의 삶은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깝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그는 로마 형법인 십자가 선고를 받아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죽음을 아무도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모두 꺼림칙하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려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예수의 삶에 실제로 발생한 고난과 죽음을 풍성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을 말합니다. 어느 쪽이 기독교 신앙의 진짜 현실인지를 말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든지, 또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그러려니 하고 교회생활에만 마음을 둡니다. 여러분들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풍요를 실제로 경험하셨나요?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생명의 깊이


이런 질문을 받거나 생각해본 적은 있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많지 않을 겁니다. 손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이 진지하게 접근하려면 생명의 깊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깊이는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신비입니다. 여기에 대한 영적인 눈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서 답답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의 깊이를 알지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기독교 교리에만 문자적으로 매달린 채 시간을 보냅니다.


도대체 생명이면 생명이지 생명의 깊이가 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1천억 명 이상의 사람들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유인원과 인간의 경계선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또 10만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 우리 미래의 인간들이 어떤 모양으로 살아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긴 시간 앞에서 지금 우리가 매달리고 있는 것들은 하찮습니다. 연봉 5억을 받으며 사는 사람과 연봉 3천만 원을 받으며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잘난 것처럼 떵떵거리는 사람이나 아주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길고 아득한 세월이 바로 생명의 깊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와 종말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 1:1절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때 생명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태초와 종말이야말로 생명의 깊이입니다.


생명의 깊이는 태초와 종말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실존에도 놓여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중력입니다. 매일 아침에 저는 일어나면서 두발로 똑바로 설 수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똑바로 서면 그 순간부터 저는 중력을 두 발로, 아니 온 몸으로 느낍니다. 지구는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으로 인해서 우리가 걸어가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의 중력이 달 정도로 약하면 테니스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중력 상태인 우주 공간에서는 지금의 삶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태초에 시작된 물리 현상인 중력을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깊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함께 참여하게 될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소박한 사물에 불과합니다. 빵은 고체이고 포도주는 액체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들어진 물리 현상입니다. 성찬탁 위에 놓인 빵의 원래 출처가 어딘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저 멀리 호주나 캐나다나 미국의 넓은 땅이 빵의 재료인 밀가루의 고향입니다. 태양빛과 탄소와 물의 동화작용을 일으키면서 밀이 자랐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빵에는 태양빛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생명 현상의 아득한 깊이가 느껴질 겁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가장 깊고 가장 아득한 차원에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의 창조 사건에 참여한 로고스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 창조의 가장 절대적인 능력과 깊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생명 경험이 곧 부활입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예수 부활 경험이 절대 생명 경험이고, 절대 생명 경험이 곧 부활 경험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문제는 부활로 표상되고 있는 그 절대 생명 경험의 실질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


그 대답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대답입니다. 죄와 죽음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건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당시에 죄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선한 규범들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모범생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을 당연시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으나 그걸 절대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에게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서 자신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까지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교리적인 것이지 실제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삶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유혹과 욕망에 갇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생명은 메말라갑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세상이 설정해놓은 기준에 들기 위해서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자신을 맡긴 채 삽니다. 그런 평가에 따라서 좌고우면하다가 영혼의 평화를 놓칩니다. 거꾸로 세상의 기준을 초과 달성하는 경우에 교만에 빠져서 영혼의 평화를 놓칩니다. 이게 세상살이만이 아니라 교회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생활이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책감에 빠지거나 교만합니다. 죄가 작동한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더 이상 율법에 묶이지 않게 됨으로써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제 그들은 삶을 전혀 새롭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깊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실제적으로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예수를 선한 목자이고, 자신들은 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그게 잘 안 되니,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여러분에게 다시 상기시켜드립니다. 생명의 깊이에 대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생명의 깊이는 생명이 우리의 세상 경험과 그 범주에 한정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깊이를 들여다보려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생명의 깊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요한복음 기자가 1장1절에서 태초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는 인류가 지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빅뱅으로부터 지금 우리 인류에 이르기까지의 긴 역사를 우리는 추적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도 그 긴 역사에서는 하나의 순간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생명은 깊고 아득합니다. 세상이 설계한 몇몇 세상살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 경험은 불가능하고, 생명의 깊이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아니 유일한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선한 목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가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아주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야만 합니다. 가까이 간다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그의 운명에 일어난 십자가 죽음, 그의 부활에 실제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삶을 새롭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깊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설교를 듣는 분들이 ‘그게 잘 안 되더라.’ 하고 말하면 설교자로서 저는 힘이 빠집니다. 억지로 믿으라고 강조해도 소용은 없겠지요. 그래도 그것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저는 그걸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 좀더 가까이, 아주 실질적으로 가까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가보십시오. 생명의 깊이가 보일 것이며, 여러분의 삶이 놀랍도록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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