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순교 영성

by 정용섭 목사 posted Jul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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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5-6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7년 5월14일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순교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사도행전은 성격이 특별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4권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문헌은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편지입니다. 편지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교회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헌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멀리 로마까지 확장되는 드라마를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베드로가 중심인물로 나오고, 그 뒤로는 바울이 중심인물로 나옵니다. 그 사이에 몇몇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스데반 이야기가 특히 강렬합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12사도 외에 일곱 명의 지도자를 세웠는데, 그 중의 한 인물이 스데반입니다. 그는 사도에 버금가는 영적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행 6:8-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은 누명을 쓴 채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갔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던 장면과 비슷합니다.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자신을 변론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행 7:2절 이하에서 스데반은 긴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집트 생활과 광야, 그리고 모세 이야기를 거쳐 이스라엘의 왕조까지 거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결국 예수까지 죽였다는 사실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스데반을 향한 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면서 오늘날 대법원이라 할 산헤드린 공회의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그 뒤의 사건 전개가 오늘 설교 본문인 행 7:55-60절의 내용입니다.


일촉즉발 순간에 스데반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특별한 현상을 목도합니다. 그 현상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행 7:55,56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죽음 직전에 본 아주 특이한 장면입니다. 스데반은 자기가 본 것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을 ‘하늘이 열린 것’이라고 묘사했고, 예수님을 ‘인자’로 묘사했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신성모독으로 들렸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스데반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적인 상태에서 고함을 치고, 스데반의 말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예루살렘 밖 한적한 곳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그 상황이 어땠을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에는 죄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전통이 나와 있습니다. 고대에는 민족마다 사형 방법이 달랐습니다. 우리나라는 주로 사약이나 참수형을 시행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능지처참, 거열형이 처해졌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시절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일어난 전쟁에서 지켜야 할 명령을 어긴 관계로 돌아 맞아 죽은 인물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두 마디를 외쳤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순교당한 스데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순교 이후 시대


이 이야기를 접하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자 다를 겁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많은 순교의 역사를 지나왔습니다. 로마 시대만이 아니라 그 뒤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3백년쯤 전 일본 막부시대에 벌어졌던 가톨릭교회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가톨릭교도들은 ‘후미에’를 밟으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후미에는 예수상이나 마리아상이 부조된 철판, 또는 목판입니다. 밟고 살아난 사람도 있고, 밟지 않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실제 목숨이 갈리는 순교의 시대가 분명히 우리 앞의 역사에 자리했었습니다. 2백여 년 전쯤 우리나라에 가톨릭교회가 들어올 때도 일본 못지않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선택을 강요받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아득히 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이니 감사 찬송을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될까요? 이제 순교는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순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곧 순교의 영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순교가 없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거나 칼에 맞아죽는 것으로만 순교를 한정시키면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모든 것이 순교에 해당됩니다. 오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신앙의 본질을 망각했거나 세상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애초부터 세상과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에게 고분고분했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로마 총독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이유는 단순히 예루살렘 주민들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로마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여 로마 총독에게 넘기면서 주장한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예수는 로마 총독의 눈에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 개연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는 오랫동안 로마 정권과 대립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13년 밀랑 칙령 이후에도 교회의 예배에서 계속 고백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교회와 로마 사이에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가능하면 이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신앙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은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본질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니 세상과의 불화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불편한 사람들로 취급당해야 합니다. 거기서 순교 영성이 시작됩니다.


입장이 다른 분들도 있을 겁니다. 기독교가 굳이 세상과 불화할 게 뭐냐, 교회생활도 바르게 하고 세상에서도 칭찬받으면 더 좋은 아니냐, 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공연한 일로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처럼 ‘개독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독교가 비난받고 외면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비난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자연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진화론을 부정하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일부가 아니라 대형교회에 속한 교역자들과 신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주장합니다. 심지어 지구가 6천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젊은 지구론을 주장합니다. 자연과학자들을 비롯해서 상식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교회를 지적으로 유치한 집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집회에 가서 가장 극력하게 반대하는 이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양심적인 대체 군복무 제도를 가장 극력하게 반대하는 이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통일지향적인 집단일까요, 아니면 저해하는 집단일까요?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가장 우익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과 불화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칭찬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좀더 철저하게 정의롭고, 좀더 철저하게 생명 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고, 좀더 철저하게 소수자들의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순교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좀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증인으로서의 삶


순교자라는 뜻의 헬라어 ‘마르투스’는 순교자라는 뜻만이 아니라 증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순교자와 증인은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순교 영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은 모두 증인들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증언해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증인으로서의 삶, 즉 순교자로서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거꾸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증인과 순교자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데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의 재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정보로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순간에 증언한 것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야, 헛것을 본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다 아는 게 아니지만 아는 한도 안에서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생명이 그 실체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눅 3:21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 받는 순간에도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를 가진 자에게 제공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인자’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인자는 세상 마지막 때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즉 생명을 완성할 자입니다. 그 인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를 가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완성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것을 누가는 고대인들의 환상적인 글쓰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자동차 사고처럼 다른 사람도 모두 똑같이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만 보이는 생명과 구원의 세계입니다. 세계 최고수 기사들이 둔 바둑의 기보에 숨어있는 수를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볼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을 오해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신문 기사에 나온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reality)이며, 더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생명의 비밀을 엿본 사람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생명의 비밀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삶에서 순교자로 살기는, 즉 증인으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죽음의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스데반처럼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보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위기를 닥치면 대부분이 피하려고 할 겁니다. 엔도 슈사쿠 『침묵』에서 후미에를 밟고 목숨을 건진 사람처럼 행동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순교가 아니라 오히려 배교에 더 쉽게 휩쓸립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런 배교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실 겁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 곳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는 한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순교 영성으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엄중한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순교를 맞게 됩니다. 모두 죽습니다. 역사에 등장했던 순교자들은 자신의 인생 중간에 순교를 만난 반면에 나머지 우리 모두는 인생 마지막에 순교를 당할 것입니다. 피하거나 피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우리 모두 순교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운명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살 것인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 것인가, 자기에게 집중하면서 살 것인가?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라거나, 노방 전도라도 나가야 한다거나, 세계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순교 영성으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저는 두 가지로 좁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일상에서 죽음을 직시하는 겁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삽니다. 좀더 마음공부를 깊이 한 사람은 삶과 죽음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더 진지하고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생명을 훼손하는 세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순교는 자신을 신의 경지로 높이려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파괴하는 이들입니다. 순교 영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훼손하는 세력이 누군지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속삭이듯이 여러분을 유혹할지도 모릅니다. 중세기의 마녀사냥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 세력을 향해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릅니다. 거기에 저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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