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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게 뭐지?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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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게 뭐지?

누가복음12:49-53

2017.2.26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이 ‘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이미 세례를 받으셨는데 또 받으실 세례가 있다고 하신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께서 화평을 주러 오신 줄 알고 있는데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첫 째로, 예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이 불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 여기서 ‘불’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불’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과거에 전자로 해석을 했습니다. 즉 성령의 불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문맥상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어번역본(NIV)을 보면 49절과 51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49절은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로 번역하고 있고, 51절은 “Do you think I came to bring peace on earth? No, I tell you, but division.”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장을 살펴볼 때에 예수께서 ‘불’을 ‘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분쟁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으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분쟁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속으로만 믿고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제자들이 예수를 증거하므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지만 예수께서 누구신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자 예수께서 거짓 메시아인줄 알고 수제자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부인하고 떠났습니다.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로 분쟁을 일으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평화를 빌미로 잠잠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즉 자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비신자에게 배척되는 한이 있어도 목숨 걸고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신앙의 전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말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면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는 곳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더둘로라는 변사가 바울을 가리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만 계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분쟁이 일어날지라도 우리가 속한 곳에서 담대히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받으시겠다는 ‘세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5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께서는 자신이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세례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이미 ‘성령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세례도 물세례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세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마가복음 10장 35-39절을 읽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우리는 예수께서 이 대화를 언제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다르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체포되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미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알고 계시면서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고통이 지나가면 이것저것을 하겠다는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그때 가서 많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없는 중에서도 대가를 지불하면서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미래’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화평을 주지 않고 분쟁을 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51-5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께서 평상시에 하신 말씀과 대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그런 삶을 사셨고 죄인들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결과를 말한 것이 아니라 과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듯이 혼자서 예수를 믿게 되면 가정에서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가정은 불교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자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반대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큰 형님이 사업을 하셨는데 한 가정에 종교가 둘이면 큰 형님의 사업에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래서 7년 만에 온 가족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종교가 하나가 되자 분쟁이 떠나고 화평이 찾아왔습니다.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제가 예배를 먼저 인도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복음화되기 전까지는 복음 때문에 가정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면 왜 가장 가까운 가족 간에 분쟁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가까운 가족을 이간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간의 왕입니다. 좋은 사이지만 마귀가 역사하면 순식간에 원수관계로 바뀝니다. 마귀는 온가족이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서로 다투게 만듭니다. 특별히 마귀는 가까운 사이에는 서로가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서로 다투게 하여 이간합니다. 왜 마귀가 이브를 통하여 아담을 공격하는데 성공했는지 아십니까? 아담이 이브를 너무 사랑하기에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듣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공격하는 것을 알고 혹 가족들이 박해를 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가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는 적어도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습니다. 55-56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영적으로 방해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래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협조에 낙심하지 않았고 영향을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잘못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지만 가족에게 본이 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들이 잘 몰라서 핍박을 하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핍박을 받은 만큼 상급을 받습니다. 온 가족이 복음화 되기까지는 힘들지만 복음화가 되면 평화가 넘칠 것을 바라보고 끝까지 가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첫째로 분쟁을 두려워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던 것처럼 우리가 장차 어떤 일을 당한다는 것을 알지라도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을 전하면 가족 간에 분쟁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화평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고 가족 복음화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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