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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저때문에 너무 아프셨죠?

  • 안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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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주님, 저때문에 너무 아프셨죠?

사 53:5절

2017.4.9

2017년 고난주일 메시지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께서 로마군에 붙잡혀 빌라도의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기까지 지상에서 겪으신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일명 ‘수난주간’이라고도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나 영국 성공회에서는 부활절 전 40일부터 각 주간마다 특색 있는 행사를 갖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사순절 절기를 지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 주간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특별 새벽기도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신교회를 사임하고 상수동으로 와서 더처치를 시작한 후로는 고난주간과 관련하여 사십일이나 한 주간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지 있습니다. 단지 고난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증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고난주간에는 그것조차도 하지 않고 누가복음 강해설교를 계속하면서 설교 말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살짝 덧붙이려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처럼 교회의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해 소극적일까요? 물론 저는 교회의 절기와 기독교 전통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장로의 유전을 지켰듯이 좋은 전통은 지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교회의 절기와 전통을 지키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절기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런 절기들은 더 이상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은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유월절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기를 지키는데 목숨을 걸지 말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것에는 카톨릭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500년, 마틴 루터는 로마 캐톨릭의 잘못된 구원론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안에 구교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강단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예배당을 웅장하게 짓거나, 평소 주일 설교를 할 때에 가운을 입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들어와서 우선적으로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런데 건물이나 내부 장식 등에 시선을 빼앗기다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건물이나 내부 디자인을 먼저 보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제주목회자세미나를 마치고 참석자 중 한 사람의 소개로 ‘제주방주교회’를 탐방했습니다. 국내 5대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디자인이 특출해서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데, 교인 수는 40명이나 매주 천여 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설계사가 설계를 했는데, 사방이 모두 물이 있고 정 가운데 예배당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물 가운데 있는 배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교회를 보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교회를 지을 생각을 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카톨릭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기보다 예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고 예전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전통이 아직도 개신교회 안에 잔재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지키려고 적극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은 그것과는 다소 다르지만 말입니다.


셋째로, 특정기간이 지나면 그 후의 부작용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거의 사순절에 금식을 강조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사순절이면 의례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면이 있습니다. 식욕을 절제하고 내면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끝나면 그동안에 억제했던 음식을 더 먹음으로 건강을 상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금식을 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오욕을 절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식욕을 절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순절 동안 절식을 하다가 끝나자마자 이전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면 이는 절제훈련이 무의미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는 9월 한 달을 ‘코란’이 이 땅에 내려진 신성한 달로 여기고,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에는 식사, 흡연, 음주, 성행위 따위를 중단합니다. 이것을 라마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간에는 모든 식당이 낮에 문을 닫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 갔을 때가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도시락으로 해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이 라마단 기간에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진후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식사를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습니다. 원래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는 것은 그 돈을 모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난주 정 집사님과 함께 ‘D3제주선교센터’의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오는 바람에 페인팅을 할 수 없어서, 설비업자가 오기 전까지 센터건물 뒤의 도랑을 청소하고, 센터 앞에 자라고 있는 풀을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감동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풀이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나와서 약 5센티미터 정도나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생명’의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감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풀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너, 콘크리트를 뚫고 나오느라 고생이 많았지. 너 정말 아팠겠구나” 풀이 스스로 자라는 것도 힘들 텐데 저렇게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아팠을지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실 때에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생각이 오늘 고난주간 메시지를 전하게 된 동기입니다.


D3제자훈련사역의 특성상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만, 저는 주일 한편의 설교를 하기 위해 어떤 경우는 주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는 70-80%는 완성을 합니다. 그리고 토요일부터는 계속 다듬어서 원고 없이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금주 설교도 지난 주 월요일에 이미 어느 정도 아웃라인을 잡아놓았습니다. 그런데 ‘D3제주선교센터’의 담벼락에 자라고 있던 잡풀을 제거하던 중 저의 눈에 마주친 ‘강하고 불쌍한 새싹’이 설교를 바꾸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싹이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나올 때에 감내했던 고통을 떠올리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 당하신 고통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십니다. 예수께서 사람이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처럼 여자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어도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셨다면 그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여자의 몸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시지만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시기에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느끼기도 하셨고, 졸기도 하셨고, 불의를 보시면 화를 내기도 하셨고, 슬픈 현장에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채찍질을 당하실 때에 당하신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영화를 통하여 예수께서 채찍질을 당하실 때에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군병들의 얼굴에 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채찍질을 당하실 때에 살점이 떨어졌을까요? 로마 군병들이 휘두른 채찍의 맨 끝에 쇠붙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맨 채찍에 맞아도 기절할 정도로 아픈데 쇠붙이가 붙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지난번에 이 원장님이 제주도에서 제 차의 문에 손을 넣은 상태에서 제가 모르고 문을 닫아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곁에서 원장님이 아프다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아프면 저렇게 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원장님은 그 때의 사고로 손마디에 통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채찍질을 통하여 당하신 고통은 그 어떤 사람이 당한 고통과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 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이토록 큰 고통을 당하셔만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는 로마제국 당시 가장 극악한 자들을 처형하는 형틀이기 때문에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려면 양쪽 손가락과 발가락에 못이 박혀야 합니다. 그런데 마취하지 않고 손과 발가락 사이에 못을 박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매달려 있을 때에 온 몸이 박힌 못에 거의 의존해 달려 있어야하기 때문에 못 박힌 주변이 압력을 받아 찢어지므로 온 몸에 전달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왜 아무 죄 없으신 예수께서 이토록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채찍질과 십자가로 당하신 고통보다 더 크게 당하신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미리 아신 것을 인하여 당하신 고통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계신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채찍질을 당하시거나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입니다. 예수께서 장차 채찍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미리 아시고 고통을 크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고통을 이기기 힘들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마음의 고통이 육신의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육신의 고통은 순간만 당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죽을 때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이토록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스스로 인간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1절만 찬양합시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당하신 고통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께 죽도록 충성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당하신 고통을 깊이 묵상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달아 남은 생애 주님께 더욱 더 죽도록 충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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