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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존재가 되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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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복된 존재가 되는 길

(요한복음 20장 1-18절)


< 복된 존재가 되는 길 >

 본문에는 예수님을 사모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새벽에 부활했습니다(1절).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 새벽까지는 만 이틀이 안 되지만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주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 무덤에 갈 수 없기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음으로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능력 있는 중간 영매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중간 영매를 찾는 순간부터 믿음생활은 비뚤어지면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능력 있다고 과시하는 사람과 신령한 척 하는 사람에게 미혹됩니다. 은혜 체험이 없는 제일 이유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참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늘 가 있고 그가 있는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예수님의 몸 된 전으로 이 땅에 교회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면 ‘집회’를 사랑하지 말고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사랑하는 제일 표식 중의 하나는 교회를 사모하며 찾아 나오는 주일성수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며 주일성수에 힘쓰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도 없이 그냥 귀가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11절). 그 장면도 그녀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끝까지 그 현장을 지켰고 죽으신 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제자, 사도, 능력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보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과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주일성수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필요도 힘써 찾아서 채우려고 하십시오. 시련이 있어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이 후퇴하지 않게 하고 교회생활에서 불평과 원망이 없게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끝까지 감당하십시오.

2.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리아가 일찍이 아직 어두워 사람이 없을 때 혼자 무덤을 찾으면서 두려움은 없었을까요? 조금 늦은 시간에 찾아도 되지만 얼마나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고 싶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랑 앞에서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또한 그녀가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서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 편에 하나는 예수님의 발 편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2절).

 조금 전 제자들이 있었을 때만 해도 없었던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천사들이라지만 갑자기 무덤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에그머니나!”라고 하면서 웬만한 담력 있는 남자도 놀라서 간이 떨어졌겠지만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천사와 대화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이단의 서식처입니다. 이단은 전쟁 공포, 귀신 공포, 종말 공포, 질병 공포를 과장해 거짓 뉴스로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담대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아야 전쟁, 귀신, 종말, 질병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말하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3절).” 얼마나 담대하고 침착한 모습입니까?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일 4:18).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면 두려움과 절망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담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최종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빈 무덤 대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단점 대신 장점을 보고, 절망과 패배감 대신 희망과 패기를 가지십시오.

 담대하게 살라는 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슬픔의 눈물은 절제해도 사랑의 눈물은 많이 흘리십시오. 어렸을 때 울면 바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울지 않아야 승리자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많이 흘려야 승리자입니다. 은혜가 넘칠 때는 대개 눈물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많이 울되 고난과 실패 앞에서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마십시오.

3. 사심 없이 헌신하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3명의 마리아였습니다. 성모 마리아, 나사로의 여동생인 베다니의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따라다니며 조용히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몇 명의 여인과 함께 예수님을 섬기려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마 27:55-56).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는 생각보다 오직 헌신할 생각만 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져 울고 있다고 말하면서 뒤로 돌이켜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시자 그녀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고 간청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연약한 여인으로서 무거운 남자 시체를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헌신적이었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했던 그녀가 그토록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더욱 사심 없이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힘들어도 그녀처럼 “제가 맡아 해결해보겠습니다.”라고 하십시오. 누가를 후원한 데오빌로나 사도 바울을 후원한 루디아처럼 사심 없는 동역후원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씨앗이 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최선의 길이 될 것입니다.

 A 선교사님은 선교사 되기 전부터 선교사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도우면서 늘 가족들에게 선교를 강조하고 동참시켰습니다. 그처럼 전 가족이 힘써 선교하니까 그 가정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생들도 축복을 받았고 사모 가족도 큰 복을 받았습니다. 다만 부유하게 사는 윗동서 한 명만은 호인인데 선교에는 잘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동서가 부동산을 매각해 거액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헌신을 외면하자 선교에 적극적인 동서의 친 여동생이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오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주셨으면 10분의 1은 선교헌금으로 바쳐야지! 좋은 일에 바칠 줄 모르면 더 없어지게 돼!” 그래도 선교에 흔쾌히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어떤 사업에 손댈 때는 책을 쓸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지만 신기하게도 손대는 것마다 사기를 당하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나누지 않는 것 이상의 돈이 없어지는 얘기를 듣고 A 선교사 사모가 언니에게 나눔의 원리를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언니가 A 선교사의 선교지를 위해 크게 물질적인 헌신을 했습니다. 동생 내외가 선교지에서 힘들게 선교하는데 자신들이 계속 즐기기만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연속적인 재정사고가 그쳤습니다. 사고가 무서워 헌신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즐겁게 헌신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에 힘쓰십시오. 드리면 신기하게 더 받지만 드리지 않으면 신기하게 더 빼앗깁니다.

4. 부활을 증거하십시오

 마리아가 “내가 시체를 가져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며 “마리아야!”라고 자애롭게 말씀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녀는 금방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깨닫고 너무 반가워서 “랍오니(선생님)!”라고 소리치며 예수님 품에 안기려고 했습니다(16절). 성경에 안기려고 했다는 말은 없지만 바로 다음의 예수님 말씀으로 그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신비한 감각적인 터치를 금하고 대신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예수님의 부활을 형제들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늘 예수님 품에 있고 싶지만 예수님은 더 차원 높은 증거자의 삶을 원하십니다. 세상에 나가 힘 있는 증거자의 삶을 살지 않고 기도원이나 골방에서 기도만 하는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 목적이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란 찬송가의 3절에 이렇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결국 마리아는 신비주의적인 삶을 포기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영혼 전도는 삶의 가장 우선순위이자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에게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영혼 전도가 중요한 줄 알지만 먼저 은혜가 있어야 전도하지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청년! 원망과 불평과 핑계는 영혼과 공동체를 죽이는 독약이네. 먼저 은혜가 있어야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핑계하는 삶에는 은혜도 없어! 전도는 의무가 아닌 명령이고 사명이네. 먼저 전하면 은혜가 생기네.”

 은혜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하지 말고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늘 ‘받을 생각’보다 ‘일할 생각’을 먼저 하십시오. 그 중에서 성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복음 전파입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자녀를 잘 키우는 것도 그 목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를 바로 천국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재능과 지위와 전 존재가 복음 전파에 쓰임 받게 하십시오.

< 부활의 믿음으로 사십시오 >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고난과 절망과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성도의 수고와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말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성도답게 당당하게 사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감사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사는 길도 신기하게 열립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때 성경도 적었고 목사도 적었고 글을 아는 사람도 적어서 교인 중에 글을 아는 신실한 사람을 ‘조사(助事)’로 임명해 목사 대신 성경을 읽고 간단한 설교도 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교회에서 예배 때 조사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그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읽어야 하는데 호롱불 밑에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조사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을 자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가 그 말씀을 읽다가 너무 은혜가 되어서 잠깐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을 자르셔도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성도들도 너무 은혜가 되어서 다 두 손을 들고 눈물로 화답했습니다. “아멘! 하나님이 저의 목을 자르셔도 저는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옛 믿음의 선배들은 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활신앙으로 무장해 절망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기뻐할 수 없을 때도 기뻐하며 죽기까지 헌신하십시오. 옛 순교자들은 죽을 때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죽는 시간이 예수님과의 미팅 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부고장은 천국시민증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찬란하고 영원한 삶을 위한 통과의례입니다. 더 나아가 죽어야 이 땅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물질과 능력과 지위를 힘써 선교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것을 기쁘게 사용할 때 하늘나라에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스탈린의 딸이 <뉴스위크>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스탈린은 죽을 때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젖어 죽었습니다. 반면에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을 때 찬송을 부르며 죽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시련은 ‘정지신호’가 아니라 ‘전진신호’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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