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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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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1,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 2017년 7월16일

 

죽을 몸


오늘 우리는 제2 독서로 로마서 8:1-11절을 읽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라는 형식을 띄기는 했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일반적인 편지라기보다는 신학의 깊이가 있는 설교처럼 보입니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앞뒤로 간단하게 나오고 나머지는 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길이도 편지로 보기에는 너무 긴 16장에 이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집필 동기를 1:14-17절에서 분명하게 피력했습니다. 15절에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고, 17절에서 복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의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조명 받곤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8:11절에서 아주 과감하고 구체적으로 주장했습니다. 너무 엄청난 주장이라서 믿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문장이 특이합니다.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한 문장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영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뜻의 표현도 두 번 나옵니다.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이 문장을 요약하면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죽음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결이 안 되니까 일상에서 아예 제쳐두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걸 선택해도 좋겠지만 죽음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가능한 오래, 그리고 풍족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은 바로 그것을 확대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아주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거나 부족하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돈이 많으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완성하려는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신다는 말이 일단 이상하게 들립니다. 우리의 영을 살린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몸까지 살린다는 건 우리의 상식에서 어긋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몸은 썩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서 먼지와 흙이 되었습니다. 이런 육체를 하나님이 다시 살린다는 말은 어떤 마술 세계에서 일어날 법하지 현실 세계에서는 동떨어져 보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영육이원론으로 해결했습니다. 사람의 육은 사멸하지만 영은 영원불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로부터 이 세상에 와서 육체라는 감옥에서 지내다가 육체로부터 해방 받는 죽음을 통해서 다시 이데아로 돌아간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사람의 영과 육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영이 없어도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단순히 육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죽을 몸을 하나님이 살린다는 말은 우리의 육체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게 아니라 몸을 지니고 살았던 그 한 인격체를 살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백질로 된 사르크스(육체)를 살린다고 하지 않고 인간의 구성 요소인 소마(몸)를 살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소마는 영과 결합되어서 온전하고 구체적이고 유일회적인 바로 그 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구성요소입니다.

 

부활의 영, 창조의 영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는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입니다. 사도신경에도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세계에 분명히 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간혹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죽어 천국에 다녀왔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 말은 형용모순입니다. 죽었다는 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죽은 게 아니라 임사체험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이들은 다시 죽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생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그런 사이비 죽음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땅에 묻혔습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혔다는 그 사실을 복음서와 여러 초기 기독교 문서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을 몸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미래의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우리의 죽을 몸도 하나님이 살리신다고 할 때 그는 바로 창조 능력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無(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첫 대목도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신비의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신비롭다는 말은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컴퓨터 계산에 의해서 해명이 된다면 하나님의 전능과 세상의 신비는 더 이상 언급될 수 없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강의하는 장하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연의 모르는 부분이 더 늘어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그림처럼 설명했습니다. 여기 전체가 검은색으로 된 무한히 큰 공간이 있습니다. 가운데 작은 원이 있습니다. 원둘레는 검은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원둘레만 반짝입니다. 과학이 자연과 만나서 새로운 것을 밝히는 부분입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원이 커집니다. 원이 커질수록 원주도 늘어납니다. 즉 모른다는 사실을 더 많이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과학의 본질입니다. 과학적인 마인드로 살아갈 필요가 있지만 과학으로 자연과 세상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잘못입니다. 자연과 세상은 신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고,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이런 일은 세상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창조의 전능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입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십니다.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손에 잘 잡히지 않아서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자기가 영적으로 소외되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것처럼 흉내를 내다가 위선에 떨어집니다. 영에 민감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뭔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 행세를 합니다. 말할 때마다 아멘과 할렐루야를 달고 다니고, 자기 혼자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다르게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걸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하나님이 우리 죽을 몸을 살린다는 뜻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실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은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얼리티(reality)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프뉴마, 즉 영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확실한 리얼리티입니다. 바람도 보이지 않지만 명백한 리얼리티입니다. 과정철학자들은 과정(process)을 리얼리티라고 말합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道(도) 역시 보이지 않지만 가장 궁극적인 것입니다. 하이덱거의 존재(Sein) 개념도 역시 보이는 게 아니지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희망도 눈에 보이는 게 아니고, 사랑도 눈에 보이는 게 아니지만 분명한 리얼리티입니다.


영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바람을 보십시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일으키는 현상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이 일으키는 현상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창조의 세계도 그런 현상입니다. 인류 역사도 그런 현상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서 그런 현상을 봅니다. 그런 것을 봐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이 제 각각입니다. 똑같이 숲과 들판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생태적인 평화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 모든 것을 압축하고 포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이 나타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운명 전체가 바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 8:10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몸은 죽은 것이지만 영은 산다고 했습니다. 몸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생명을 완성하려는 욕망이 죄입니다. 그 죄의 속성으로 우리 몸은 죽습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의로 삽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얻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궁금증도 생길 겁니다.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믿어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본 적이 있나요?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확신과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우리 몸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결국 죽지만 영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풍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해본 적이 있나요?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깊이로 들어가 본 적이 있나요? 구도정진의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게 전혀 없이 피상적으로만 교회생활을 하면서 잘 모르겠다거나 어렵다고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부활 승천 이후 예수님이 여기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똑같습니다. 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일치됩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된 사람입니다. 거꾸로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도 하나 된 사람입니다. 9절과 10절을 한데 묶어서 보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된 사람이야말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죽을 몸도 살릴 것이라고 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종말에 완성될 미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런 생명을 선취의 방식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당연히 말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만으로도 저의 영혼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믿고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자신을 운명을 걸었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자기의 운명에 닥쳐오는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다 잃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의 능력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걸 얼마나 꾸준하게 붙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저에게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세례 사건에 실질적으로 집중하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길을 가고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의료 행위와 건강 섭생을 통해서 수명을 연장하거나 복지를 확장하는 것으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만이 세상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영’을 통해서 여러분을 살리실 것이니, 부활과 창조의 영에게 집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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