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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인문학자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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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문학자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이어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당시 문학지망생인 나는 '문학사상'에 게재된 권두언에 거의 경악했다. 권두언은 매달 실렸고, 그 필자가 바로 이어령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국어책과 몇 권의 문학필독서 외에 별로 읽은 것이 없던 나에게 '이어령'의 글쓰기는 경탄 바로 그 자체였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글. 그의 글을 베끼고 또 베끼면서 허기진 문장에의 갈증을 채워갔다. '이어령'은 나의 우상이었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지식인의 풍요로운 사색에 매혹되기에 충분했다. 비록 그의 글에 신앙고백이 묻어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사회 각계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거리로 터져나왔고, 이어 체포 구금사태가 잇따랐다. 문인들도 구금되고 낙향하는 작가들도 생겨났다. '이어령'의 글에서 뭔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삼포가는 길' '농무' 등의 작품을 베껴쓰면서 '이어령'으로부터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문학계는 순수와 참여, 예술혼(魂)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 기독교 문학에 대한 논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예민한 감성을 지닌 신사풍 시인이기보다는 투박한 목소리로 시대를 포효하는 시인이기를 원했다. 

오랫동안 나에게 '이어령'은 전형적 인문학자였다. 그의 성찰은 학문적 고립을 뛰어넘게 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고집과 소외로 통합되지 못하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지상의 사유를 통섭하게 했다. 그의 고뇌는 사색의 막다른 골목을 여는 탈출구였다. 하지만 휴머니즘으로 물결치는 찬란한 '이어령'에게서 끝내 발견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이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면 '이어령'과 마음으로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집에 눈길을 쏟으며 개인적으로 '이어령'에 대한 오해를 풀어갔다. 평생 올곧게 인문학에 헌신한 학자,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학문적 결실을 쌓아올린 노령의 선비, 관료로 정계와 학계에 명성을 이룩한 성찰의 달인, 교만하려면 당당하게 교만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몸이 된다. 인문학의 결실은, 인생의 모든 결론은 "어떻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까"(시 '나의 키와 몸무게보다'에서)로 귀결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를 들어 고백하게 하신다. 

"나는 비로소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시 '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에서) 노(老) 인문학자의 숙성된 성찰이 앞으로 어떠한 시가 되어 울려퍼질 것인지 삼가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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