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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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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환 (동화작가) 

서울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집 살 돈이 필요해 그림장사를 시작했다. 추운 거리에서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팔았다. 시선 둘 곳이 없어 거리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송아지 크기만한 양말 보따리를 메고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양말장사를 했다. 온종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사과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화동, 동숭동, 명륜동, 삼선교, 보문동을 밤 11시까지 돌아다니며 사과를 팔았다. 사과 장사를 그만둔 뒤, 공장에서 일했다. 

온종일 기계와 씨름했다. 작업복 주머니에 시집을 넣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다. 기름때 전 내 모습이 싫었다. 거울도 보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여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나는 공장에 다녔고, 그녀는 이화여대에 다녔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만나는 날, 손에 전 기름때를 닦아야만 했다. 손가락과 손바닥의 기름때는 지워졌는데, 손톱 밑 기름때는 지워지지 않았다. 손톱 밑을 칫솔로 문질렀다. 기름때를 벗기려고 살갗을 벗겨냈다. 손톱 끝에 피가 맺혔다. 열 손가락이 고무장갑이 되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이화여대 앞이었다. 여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학교 진입로를 걸으며 나는 난장이가 되어버렸다. 학교 앞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만났다. 공장에서 일한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예쁜 그녀는 상냥히 웃어주었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나는 책 이야기만 했다. 칸트와 샤르트르와 랭보를 이야기하며 잘난 체했다.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작은 나를 감추고 싶었다. 다시 만나자고 하면 만나 줄 그녀였다. 다시 만나자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와 나는 수직과 수평이 달랐으니까. 마음 어둑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빨개진 손가락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나왔다. 그날의 절망과 열등감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가 되었다. 

얼마 전,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이화여대에서 온 전화였다. 채플시간에 강연을 부탁 받았다. 불현듯 아픔이 지나갔다. 오래 전에 좋아했던 여자친구가 생각났다. 손톱 밑 아린 상처가 생각났다. 여러 날 고심하며 강연 준비를 했다. 이화여대에 갔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산수유꽃과 진달래꽃이 나보다 먼저 아름다운 교정에 와 있었다. 총장님과 교목교수님들이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편안한 마음으로 강연을 했다. 1, 2부 채플시간을 합해 몇 천 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강연을 하다 말고 나는 자꾸만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잘나서 초대받은 자리 아니었다. 절망하지 않고, 불빛을 달려온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어쩌지 못했던 내 청춘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어둠은 빛이다. 빛은 어둠이다. 빛과 어둠은 서로가 모순이지만, 서로가 진실이다. 인생은 빛과 어둠으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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