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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일어서야 하는 교회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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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교회들이 다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은혜로운 설교문이 있어서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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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어서야 하는 교회 (요 2:13~22)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금의 아내와 결별하고 32세 연하의 리듬체조 선수와 결혼을 할 것이라는 해외토픽이 터져 나오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는 뉴스를 신문을 통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뉴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공인이 누가 보더라도 나이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통령 퇴임을 1개월 앞 둔 그의 나이가 56세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는 연하와 결혼을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매스컴에서는 연하남과의 결혼이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녀 성별의 차이로 인하여 오히려 권고해야하는 일처럼 방송하는 것도 시대적인 흐름이가는 하지만 56세의 남자가 딸과 같은 32세 차이의 연하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직은 용납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에 그렇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푸틴 대통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거칠게 이야기하면 나이 값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56세라는 나이는 이처럼 인생의 가장 완숙한 나이로 누구나 인정합니다.

완숙하다는 정의는 그만한 행동거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나이에 걸 맞는 성숙함도 있어야 하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56세 정도의 연령은 존경을 받아야 하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56세의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완숙한 나이의 생일을 맞이하였다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52년 4월 27일 개척예배를 드린 지 꼭 56년이 되는 날을 맞이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2008년도 창립주일은 날짜까지 정확하게 56년이라는 숫자가 맞아 떨어지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56주년 교회창립주일 56주년을 맞이하여 ‘일어서야 하는 교회’라는 제목설교를 통해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시간 모두 함께 교회 탄생을 기뻐하며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교회의 사명을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여러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첫 번째 성전청결의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한 곳으로 제한한 신명기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 장소의 단일화(centralization of worship)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신 12:11-1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하나님의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수하는 절대적인 율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신앙은 예수님 당시에도 지켜졌습니다.
유월이 되자 이스라엘의 전역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백성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죠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약 20마일 정도에서 유대인들이 제사를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인원이 약 220 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까 실로 엄청난 인원이 유월절을 비롯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예배자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헤롯 성전에 당도를 하자 예수님의 시선으로는 실로 기가 막힌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전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이 보인 것입니다.  

㉠ 소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14절)
㉡ 돈 바꾸는 자들이었습니다.(15절)
㉢ 성전에서 그 행위를 용인해 주고 자릿세를 받는 성전 관리자들입니다.(18절)  

하나하나를 추적해 보십시다.

첫째로 장사하는 자들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 소와 비둘기파는 자들이 왜 생겼습니까?
이들이 시작은 절대로 나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흠이 없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는데 지방에서 제물을 가지고 올라 온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지방에서 가지고 올라온 제물들이 병이 생기거나 흠이 생기면 제물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지방에서 직접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경우에 상하는 불이익도 감수할 수 있고 해서 자연스럽게 성전에 제물을 파는 자들이 생겼고 그래서 소와 비둘기파는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둘째로 환전상들입니다.

당시에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통용되는 화폐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Caesar)가 그려진 드라크마였습니다.
반면 거룩한 하나님께 드려질 화폐와 성전에 들어가는데 소요되는 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적으로 드리는 화폐였던 세겔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자들은 드라크마를 세겔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냥 바꾸어 주면 돈 바꾸어 주는 사람의 수지타산이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프리미엄을 얹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바로 성전 안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있는 타락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주로 레위인과 제사장 그룹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돈 바꾸는 일이 성전 안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에게 돈을 바꾸는 자들이 댓가로 일부의 돈을 자신에게 상납하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자릿세를 받아 냈습니다. 
그 돈이 환전 차액의 약 50%정도였습니다.
수지맞는 장사를 지도자들이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이익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항거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상이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의 집이기를 포기한 성전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그 동안의 인자함과 사랑 많으심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을 흔드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때린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들의 돈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을 다 내어 쫒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장사하는 자들을 향하여 불과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절)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의 월요일에 두 번째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사역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엄위하신 선언 앞에 이미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능력을 상실한 당시의 유대인들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예수님에게 네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로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요구하는 그들을 향하여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생명력이 있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56세라는 완숙한 생일을 맞이한 지체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하여 이상의 본문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56년 주년의 생일을 맞이하여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1.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떠난다는 교훈을 가슴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200만 명 이상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20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강도의 굴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이 사도행전보다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먼저 나온 책이고 그 후에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실은 정반대입니다.

사도행전이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지금의 성경적인 예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의 이하를 보면 당시의 예루살렘의 성전이 얼마나 문제를 크게 가지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그런데 그 에티오피아의 여왕이었던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성경에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 나라의 재무부 장관 정도 되는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세도가가 예루살렘까지 올라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시가 예배하러 올라온 예루살렘 성에서 아무런 도전을 받지 못하고 다시 에티오피아로 가는 길목인 가사 광야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성경에 있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읽고 있었는데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빌립과 내시는 드라마틱하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행 8:29-31절은 이렇게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빌립이 마침 그 내시에게 읽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속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고 그 결과 성령의 은혜를 입은 내시가 빌립에 의하여 세례까지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기사를 통하여 아주 중요한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에티오피아의 간다게 내시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내려갔습니까?
그리고 결국 성전이외의 곳에서 빌립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그 곳에서 기쁜 나머지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까?
성전에 예배하러 온 내시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그에게 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줄 것이 없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리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행위가 버젓이 일어나는 물질만능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려던 내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올바른 제사는 드려지지 않고 제물을 바꾸는 편의주의와 합리화로 판을 치고 있을 때 간다게의 내시는 말씀을 몰라 답답한 마음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창립 56주년을 맞이한 아침에 한국교회를 돌아봅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교회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한데 도리어 한국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 비본질적인 것에 정신을 팔리는 동안 이 땅에는 말도 안 되는 신천지의 판이 되었습니다.

우리 지역만 해도 신천지 추수꾼들이 합숙을 하며 교회를 공략하는 방법을 도모 한다는 첩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신천지가 한국교회를 유린하는 것에 대하여 벌벌 떨어야 하는 무능력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정말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언론에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우리를 향하여 손을 벌리며 손짓을 해야 하는데 도리어 한국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살려달라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힘을 합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엘리압과의 싸움에 지쳐서 기진맥진함으로 영적으로 스스로 무능력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잘 되는 나’의 신드롬에 빠져 긍정적인 사고가 마치 복음의 본질인 것으로 착각하여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어간에 ‘십자가의 복음’은 이미 고리타분한 천연기념물이 되어 아무리 강단에서 선포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무감각의 강도를 높여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들을 때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목사님 한 분이 강의를 하신 것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0,000명 교회가 하나 있는 것보다 100명이 출석하는 건강한 교회 교회 100개가 있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대교회주의는 한국교회의 위기의 주범이라는 말입니다.
대교회주의는 한국교회를 약하게 하는 장본인이라는 설파입니다.
저는 이 의견에 대하여 100% 공감하지는 않지만 일부분을 인정합니다.

어떤 부분인지 아십니까?
교회의 모습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생활하기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편리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몇 년 전에 분당 수지에 이름이 있는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개척 이전부터 NAME VALUE 가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2002년도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개척 6년 만에 7000명 정도의 성도가 모이는 대형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분당에서 개척한 교회들 중에서 상당수의 교회들은 문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가 마치 대형마트와 동네 슈퍼마켓의 생리처럼 보이는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한국교회를 보아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도 역시 양극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도 이제는 편리함을 보며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신 본질이신 헌신과 희생과 섬김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신앙마저도 취미로, 하나의 교양으로, 레저 활동 그 하나 이상의 의미가 없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능력한 교회, 무능력한 성도가 된 이유는 교회가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선언은 이렇게 들려야 합니다.
“한국교회여! 본질로 돌아오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중게 가톨릭 교회시대의 가장 암흑기로 평가를 받는 교황 이노센트 4세와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바티칸 시로 각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노센트 4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마저 풍부하게 되지 않았소."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 성하 맞습니다. 이제 가톨릭교회는 은과 금까지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께서 말씀하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은 가톨릭교회는 없습니다."

아퀴나스의 일침을 우리 한국교회는 아니 우리 교회는 눈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 
일어나 걸으라는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
이미 교회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56세가 되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는 완숙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교회는 영향력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에 모범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교회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본질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가 56년 창립기념 주일에 결단해야 하는 몫입니다.

우리 교회는 본질을 회복하여 은과 금은 없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잃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런 본질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창립 56주년 이후 어떤 모습을 견지해야 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창립 56주년을 통하여 도전받아야 할 두 번째의 은혜입니다.
  

2. 영적인 부활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19절-20절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영적으로 눈이 멀어 유대인들이 비아냥거리며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헤롯 성전이 지을 때 46년이 걸렸는데 어찌 네가 3일 동안 일으키겠다고 하는 것이냐고 경멸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을 요한기자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우리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성전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며 새롭게 일어서는 회복의 능력은 영적인 부활임을 알려주는 귀한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롭게 주님의 능력을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무너짐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절망에서 소망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시선으로 말하면 다시 비본질을 벗어버리고 본질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삼류적인 소설과도 같은 긍정의 힘에서 십자가의 원색의 복음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에 집중하며 따라가던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부활인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포도주를 물로 바꾸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책망했습니다. 

이 말을 받아 어떤 신학자는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래서 그 깨어진 항아리 조각들로 서로를 찌르고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가롯 유다가 부럽다. 가롯 유다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이 모두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절재절명의 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전투요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승리를 통해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이것을 한국교회에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마치 오늘 본문에서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는 말씀대로 교회를 다시 일으키시는 것을 기대하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본질인 십자가와 말씀을 사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150여개 교회는 본질로 돌아와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50,000여 한국교회는 다시 하나님의 본질로 돌아와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지 않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라는 찬양을 이전에 참 많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 기름부음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일어 설 수 있는 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고후 10:3-4절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말씀을 의지하며 다 같이 일어서서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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