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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쿨해 보이려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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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욱 목사 (삼일교회) 

얼마 전 인기 영화배우 최민수씨가 노인을 폭행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사실의 전말을 잘 모르니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위 말하는 '입만 열면 어록'이라는 멋진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태어나서 처음 무릎을 꿇는다. 죽어서까지 내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주은아(아내) 미안하다, 이건 아니잖아." 사과는 멋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둔탁한 몇 마디와 괴로운 침묵이 더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위기의 순간까지도 너무 쿨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쿨해 보이려고 무척 노력한다. 쿨하다는 것은 뒤끝이 없다, 사소한 감정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즐길 것은 즐기고, 잊을 것은 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랜 기간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자매가 괴로워한다. 헤어짐 자체도 괴롭지만, 헤어지고 난 다음에 쉽게 잊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괴로워했다. 스스로 쿨하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과연 쿨하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사귐 뒤의 헤어짐에 아파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인간미가 없어서 이상해 보인다. 사람은 만나면 기뻐하고, 헤어지면 아파하는 존재이다. 칭찬받으면 기쁘고, 비난받으면 괴로운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 초연한 척하는 것이 쿨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초연한 척한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더 민감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말라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나머지 제자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쿨해 보이려는 베드로는 가만 있지 못하고 나선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요13:8) 쿨해 보이려는 사람일수록 외부의 눈을 더욱 의식한다. 심지어 선행을 해도 멋지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구제를 해도 극단의 효과를 노리는 방법으로 한다. 초연한 척하면서 주목받는 것을 즐긴다. 자신도 이렇게 하면 주목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실하지 못하다. 불쌍하면 그냥 도우면 된다. 초연한 것도 알려야 하고, 몰래 하는 선행도 알려야 한다고 느끼는 쿨함이라면 그것은 위선이다. 

쿨한 사람은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없다. 가까이 지내면 자신의 약점과 허물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다. 거리를 두고 사는 삶 없이 쿨한 삶은 불가능하다.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는 사람일수록 상처가 많다. 상처가 많으니,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는 것이다.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행위이다. 쿨해 보이려다가 더욱 깊은 고독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그리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냥 약한 존재일 뿐이다. 칭찬해 주면 기뻐하고, 아프면 우는 존재로 묘사한다. 다만 기쁠 때, 기쁨을 주는 분에게 찬송을 드리고, 아플 때, 치유할 수 있는 분께 엎드리는 것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 힘들면 힘들다고 해라. 외로우면 같이 지내자고 해라.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다 보면, 오히려 진실해 진다. 장점을 나누면 경쟁이 유발되지만, 아픔을 나누면 공감대가 형성된다. 아픔의 공감대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만든다. 결국 아픔을 이길 수 있는 회복의 기쁨도 맛보게 된다. 쿨한 것보다는 진실된 것이 좋다. 징계의 현장에서도 멋진 말을 골라내는 발버둥이 처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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