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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의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가?

  • 김홍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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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성경: 마5:17-20절

제목: 너희 의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가?


1. 예수 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심
 예수 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요구하신 가르침을 자기들이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이 정한 율법에만 철저하게 순종하였지 하나님 백성으로서 보다 높은 신앙의 수준에 이루어야 할 새로운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그릇되게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법의 정신과 본질을 그릇되게 사용한 모습입니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
 1)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서 남에게 증거하고 보이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2) 전통만을 고집하고 거기에만 매달렸다.
 3) 규례와 명령의 본의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전통을 고수하였다.
 4)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다.


3.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 님
 완전케 한다는 것은 컵에 물을 붓되 다 차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충족케 하여 넘치게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결국 구약의 권위와 원칙들을 폐한다든지, 그것이 없어질 것이라든지,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든지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든다면 구약에는 허다히 많은 법규와 법조문들이 있고 그 법전이 가르치는 여러 가지 행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돼지고기는 구약에 금지한 고기니까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법의 정신과 본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지를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알면 그 거룩한 원칙에 의해서 모든 것을 대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떤 것은 자기네에게 유리하니까 강조하고 어떤 것은 자기네에게 귀찮은 것이니까 적당히 쓸어 넘기고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예수 님께서는 그 법에 대해서 그것을 전부 폐하러 오신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완전케 하려고, 차지 못한 것을 채우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님 당신이 그 법을 폐하려고 짓밟고 유린하는 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고 법 아래에 나서 율법의 저주 가운데 끝까지 들어가는 생활 태도, 그러면서도 율법에 대해서 조금치라도 흠이 없는 생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예수 님 당신이 ‘나는 모든 율법을 지키러 왔다. 왜냐하면 나는 율법의 제도 아래 나서 율법의 경륜 하에서 율법의 제도를 이루려고 하는 까닭에 그것을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하의 역사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의 의로 책망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않고 멋대로 유린하고 짓밟아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충족시켰다. 그러려고 온 것이다’ 이런 뜻을 여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율법의 거룩한 정신이 요구하고 있는 목적을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과 또한 가르치는 모든 일의 결과로 증명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4. 한국 교회를 휩쓴 잘못된 율법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법이라는 것은 사실상 구약적인 법의 정신을 전부 체득해서 그것을 체현하려고 하는 거룩한 목적 하에서 모든 교훈과 법전이 이루어져 나갑니다.
 
 구약적인 어떤 제도도, 가령 오늘날 우리가 폐하고 사용치 아니하는 유월절이나 대 속죄일이나 초막절이라든지 그 여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여러 가지 제도, 보통 말하는 모세적인 제도라는 것을 기독교는 전부 무시해 버리거나 등하시하거나 짓밟고 전혀 새로운 주의와 주장과 체제를 갖추어서 교회라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왕 구약과 신약을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구약에서 가르치는 큰 교훈을 신약에서 가르치는 교훈과 같은 태도로 대하고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여 같이 지키려고 하는 데서 소위 유대주의적인 것 혹은 이상한 계율주의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종교 교훈이 기독교 안에 횡행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교훈은 주로 정통 혹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강요되어 나가는 까닭에 그러한 경향이 어느 때는 보수적인 교회의 성격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서 흘러나온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구약적인 모든 율례와 교훈을 신약과 꼭 같이 해석하고 존중해서 구약도 신약과 꼭 같이 그 뜻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준행하겠다는 태도로 자연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조금씩 드러나는 방법만 다르게 적용되었지 오늘날에는 참된 교회이냐 거짓된 교회이냐의 기준을 정한 형태도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정신과 상관없이 어떤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하여 어떤 행위만을 강조하거나 그것을 지킬 때 보수적인 교회요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간직한 그릇된 사상이며 그릇된 신앙관입니다.


5. 율법에 대한 오해가 낳은 그릇된 역사관
 이와 같은 그릇된 사상은 한국 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조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적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역사를 진행하신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적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인류의 역사를 진행시키시고 교회의 역사를 진행시키시는 까닭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는 오순절에 탄생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비로소 탄생했고 전 시대의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알지 못하던 비밀이었다고 명확하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은혜요 구약 시대의 특성은 율법인 까닭에 율법과 은혜는 대립되어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고 과거에도 때를 따라서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뜻을 더욱 깊이 알고 장성해야 이런 것을 더욱 명확하게 판단하고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교회에 좋든지 싫든지 영향을 끼친바가 아주 지대한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적인 시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별다른 경륜이요 신약 시대의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계획인 까닭에 그 둘은 많은 경우에 상치되고 대립된다는 일종의 모순된 논리가 거기서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심오한 신학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체계 있는 주의가 되어 가지고 우리 한국 교회를 휩쓸었습니다.


 신약 시대적인 모든 생활은 그 성격이 구약적인 율법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해서 은혜만 강조한 나머지 장차 올 황금시대만이 은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현 시대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라는 것은 고난과 괴로움 가운데 주님을 위하여 수고를 참으면서 그대로 지내다가 주님께서 장차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로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그때에야 비로소 땅 위에 위대한 이상 국가와 황금 국가를 건설하고 그 세상에 가서야 비로소 기를 펴고 비유의 말씀대로 각각 열 고을 권세도 차지하고 다섯 고을 권세도 차지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서 같이 왕 노릇 한다는 사상이 한국의 교회, 특별히 장로교회 100년 전통에서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100년 전통이라고 자랑할 때는 그런 것을 주로 말할 것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큰 전통이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이 과거에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아주 활개를 치고 부흥회를 장식하고 특별집회를 장식했던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다는 말씀 하나가 처음부터 얼마나 이런 그릇된 종교적인 태도나 혹은 신학적인 태도에 대해 대립해서 논죄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하실 때에는 율법과 선지자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극히 작은 것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이다’ 하는 말씀은 결국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는 것은 천지가 없어지는 그때에야 변동이 있으면 있을까 그때에는 안전하고 또 그 권위로 그대로 존속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라는 것이 예수님을 떠나서 별다른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고 소위 무신론적 기독교란 말이 돌아다닐 만큼 이 세상이 타락했으니까 나중에는 무 기독교적 기독교란 말이 나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것이 예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면 당신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충만케 하러 오셨다고 하셨으므로 기독교야말로 율법과 선지자를 가장 잘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원칙과 새로운 구상 하에서 이전 시대의 비밀이었던 것이 드러났다는 소위 세대주의자들의 이론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것이고 더군다나 이런 말씀에 의해서 볼 때는 충돌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기독교인을 자처하면 기독교인답게 율법과 선지자를 예수님이 존중한 것같이 존중해야 할뿐더러 예수 님께서 그것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그 말씀의 뜻이 그리스도의 지체 된 나에게 실효 있게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 채우지 못했던 부분, 결손 되었던 부분을 채우러 왔다’고 하시면서 채워 놓으신 예수님을 내가 따라갈뿐더러 예수님과 내가 별개의 개체로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의 거룩한 지체의 부분으로서 존재함으로 비로소 교회라는 것이 성립됐다는 것을 확실할진대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나로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체의 몸이 이뤄야 할 율법과 선지자의 거룩한 체현이라는 것이 내 안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그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옛날 이스라엘의 제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기독교적인 생각이 된 것입니다.


 또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여자 적으로 해석해서 무엇을 지켜야 하고 모든 조목을 지켜야 한다면 왜 모세의 613개 조항들을 다 안 지키느냐 말입니다. 만일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를 분명히 체현하는 일이라 할 것 같으면 왜 예수 님께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고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누구냐 하면 율법과 선지자를 무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존중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자 적으로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한국 아니라 세계 어떤 구석에서 구약에 있는 법을 가장 잘 지키고 십일조를 가장 잘 내고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려고 애쓴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너의 의가 그보다 낫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못 들어갈 줄 알아라’ 하셨지 ‘들어갈 수는 없으나 그게 훌륭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못 들어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와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이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율법과 선지자를 무시하거나 그것과 관계없는 별다른 모양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 기독교일 뿐이지 하나님의 구원의 거룩한 기관으로서는 아담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할 때는 우리가 다만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교회라고 시대를 구분해서 그것이 발전한 상황을 연구는 할 수 있을지언정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교회는 별다른 실체로 나타났다고 하는 사상은 절대로 불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교회는 구약 교회가 행하던 대로 구약의 제도를 그대로 여기서 구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너희 율법과 선지자들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식으로 지키려고 하는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과 교인들아, 너희가 그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바 신약 시대에 나타난 충만한 은혜의 내용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그래서 그 율법과 선지자가 은혜와 상충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은혜 안에 벌써 포함되어서 능력 있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체현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즉 죽어서 천국 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땅 위에 있는 거룩한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경륜, 그 경륜 가운데 네가 지금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잘 믿겠다고 하면서 오늘날에도 구약적인 경륜을 연장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심한 결핍 투성입니다. 모세의 613개 조항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키느라고 애를 씁니다. 한쪽에서는 법을 다 유린하고 무시해 가면서 어느 하나만을 죽도록 지킴으로써 법을 다 이룬 줄로 안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법의 전부가 아니고 십일조를 내는 것이 이 법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구약 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안식일 이외의 612개 조항을 다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서 예수님을 자 믿어 보려고 한다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하는 말씀이 그대로 응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아직 못 벗어난 것입니다. 율법의 의를 행하려는 사람은 모두 율법을 지키다 하나에 거쳐도 다 거치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율법을 내신 근본 목적과 정신을 알아야 함
 신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성격이 결국은 율법이요 또한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에서 찾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기 율법이 있어야 하고 선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의 생활 가운데 구약의 그 미비하고 불완전했던 율법이 구비되고 완전한 형태로서 분명히 해석되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구약 선지자가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뿐 실체를 보지 못했던 그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선지자는 실체에 접촉하고 하나님 나라의 참된 실체적인 내용에 분명히 접촉된 것을 증시하는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율법의 중요한 관장자 직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선지자라야 하는 것이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제사장이라 하는 것이고, 일반 백성에게 요구되는 그 율법을 보수하고 보존하며 수호할 의무를 가졌던 이스라엘 왕과 같이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직분인 왕의 직분을 분배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오늘날 목사들 사이에 왕왕이 ‘목사는 제사장이니까’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러면 교인은 제사장이 아니란 말입니까? 목사도 제사장이고 교인도 제사장으로 공동의 명의를 가졌으면 공동으로 이야기할 것이지 목사만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꼭 가톨릭적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톨린적인 오류, 가톨릭적인 그릇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왕과 같은 제사장이고 택하신 백성입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맡은 분담자와 말씀에 대한 책임자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우리 스스로 보수하고 율법에 대한 후견자요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감찰할 자로서의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왕으로서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제사장으로서의 중요한 의무이고, 그뿐더러 율법과 선지자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파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선지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인 까닭에 우리는 스승이 되어서, 즉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남에게 증거하고 가르치는 것이고, 제사장의 위치를 가진 까닭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거룩한 제사의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다른 사람을 대표해서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대표로 나아가서 복을 끼치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율법과 선지자를 계승해서 과거 구시대가 가지고 있던 지엽적이고 한계적인 것에서 이제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영원한 본격적인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분명히 서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나타내는 바는 그때의 시대적인 문제와 지엽적인 문제에 접촉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적인 문제와 지엽적인 문제에 접촉했던 것은 그 시대와 그 지역이 떠나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식으로도 다 잘 아시겠지만 법이라는 것은 법이 적용되는 대상과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소나 양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 모세적인 율법의 요구인데 그러면 오늘날에도 소나 양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겠는가? 율법의 명문은 소나 양을 가지고 혹은 비둘기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소나 양을 가지고서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기독교적인 것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한다면 야단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겠다고 여자 적으로 해석하려면 소나 양을 가지고 오늘날도 제사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천년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천년왕국을 땅 위에 건설하면 거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수께서 왕 노릇을 해야 왕궁과 보좌를 시설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성전이 다시 개축이 되어서 그 성전에서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통 신학으로서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휩쓸고 갔던 생각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한국에서 툭하면 하고 돌아다니는 사경회 때나 부흥회 때에 하는 묵시록 강의에는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모르고 앉아 있는 것뿐입니다. 세대주의는 그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다시 땅 위에,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짓고 성전의 제도가 부활되어 제사장이 다시 생겨야 하고, 제사장이 이제 다시 소나 양의 피를 가지고 제사 지내러 가야 하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모독적인 언사이고 모독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약에 있는 명분인 까닭에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구약에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그러면 교회도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단에 소나 양 비둘기 같은 것을 다 드려 가지고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표현하는 그 큰 능력과 실지 내용이라는 것은 소위 구약적인 하나님의 경륜 아래 있던 글자 그대로의 것을 보편화해서, 시기와 지역을 따라 적용해야 할 문제를 보편화해서 모든 시기에 지켜야한다는 그릇된 논리와 생각으로 그릇된 주장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참뜻을 바르게 발견하여 항상 율법이 무엇을 표시하려고 했는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무슨 목적 때문에 이 법이 있느냐는 것이고, 그리고 그 법의 근본정신이나 목적은 어떠한 의무를 보편적으로 항구적으로 요구하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들어 있는 십계명을 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 제도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중요한 도덕적이 요구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도덕적인 요구의 전부는 아닙니다. 십계명에 있는 것만을 도덕적 요구로 지칭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십계명에 있는 도덕적인 요구라는 것은 어떤 부분에 몇 가지만 강령으로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착잡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일이 다 열거해서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십계명에 있는 모든 내용을 다 딱 지킨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네가 계명을 아느냐? 다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렇게 답한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아라](마19:16-22) 하신 것입니다.


 요컨대 문제는 항상 우리가 율법이라든지 계명을 놓고 만일 그대로 다 지키려고 한다면 참으로 그 법이 목적하는 바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안식일의 법이 십계명에서 모세적인 율법으로 주어졌는데 왜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느냐 할 때에는 안식일이라는 말을 써서 만든 그 법은 안식일이라는 제도를 가진 백성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일지라도 그 속에는 항구한 요소, 즉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항구하게 요구하신 내용이 있으므로 첫째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 둘째는 무슨 목적으로 이것을 세웠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무시해 버리고 그 말이 그러니까 덮어놓고 지킨다고 하는 것이 지금 일반적으로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 여자 적으로 강요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안식일에는 밥도 안 사 먹어야 하고 전차도 안타야 하고 버스도 못 타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걸어가야 한다. 얼마나 걸어갑니까? 집이 멀어서 예배당에 가려면 삼십 리나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예배당을 바꿔서 부근의 예배당에 가라는 말은 하지 않고 삼십 리를 걸어와야지 아이를 안고 어떻게 걸어갑니까? 그러면 전날ㄹ 저녁부터 와서 밤샘을 해야지 하는 식으로 요구한단 말입니다. 안식의 근본정신과 목적은 무시한 채 이런 식으로 이야기들 합니다. 요즘은 그래도 이런 식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항구한 문제는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께서는 왜 이 법을 내셨는가? 이 법이 목표하는 바와 과녁을 겨누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그냥 덮어놓고 맹목적으로 맹수 한다고 할 때는 법을 내신 하나님의 본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안식일이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실 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최후의 요소와 표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안식일에도 내가 주인인 줄 알아야. 나를 위해서 안식일은 있다}(막2:23-28 참조)고 가르치셨습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잘 지켜서 의를 행한다고 자만하라고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 자신이 그렇게 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라는 그러한 규정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인자를 위해서 이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안식일의 큰 도리, 항구적인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항구적인 것은 무시해 버리고 구약적인 것, 구세대적인 제도와 그러한 여자적인 구속 하에서 그것을 이루어 보려고 할 때에는 다 같이 저주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제도를 다 이루어 보려고 할 때에는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7.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해당되는가?
 먼저 제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을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요지는 예수 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너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그들보다 더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실천(이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8. 율법의 많은 제도는 신약의 교회에 들어와서 비로소 예수 님께서 충족시키신 까닭에 충족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율법의 참된 정신과 목적과 실표가 예수님으로 인해 교회에 분명히 나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범한 절차에 따라 반복적으로 범죄하는 자들이 있다.


9. 서기관과 바리새인 의보다 더 낳은 의란?
 하나님께서 천국시민으로서 간직해야 할 도덕률에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본래 법의 목적과 정신대로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온전성을 이루어 가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마5:48).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법의 목적과 정신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르게 적용하여 신앙의 온전성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지키라고 했으니까 지킨다는 개념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본래 목적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했으니까 어려운 사람 조금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참된 입법자이신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대로 조금도 법을 주신 목적을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보면 내가 이 법을 지키다가 순교하는 일이 발생하거나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손해 보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법의 원칙대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할 때 저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니까 또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복음의 핵심은 나중에 전하고 일단 교회에 출석시키는 것이 우선이니까 일반적인 애기만 해서 교회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한하지 않고 전하는 행위까지 사랑의 행위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임의적으로 정해 종교적인 열심으로 전하는데 그것은 자기 열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기준대로 가르쳐 주신 신앙의 원칙을 사람이 임의적으로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요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신앙의 기준에 따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도록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행할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바르게 알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지적으로만 인식한 사람으로만 한정하여 임의적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은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면에서 비교하여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율법의 형식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말씀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지키는(실천하는) 자가 들어갈 곳입니다.


10. 주님을 믿는 자의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법도(정신)에 따라야 의의가 있음.


11.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의”는 정당한 말씀을 듣고 사랑으로 실천할 때 온전성을 향해 나아감.


12.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음.


13.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함으로 그 말씀에 더하지 말아야 함(잠30:5-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1)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성을 보존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성을 보존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목적대로 가      르쳐야 한다.
 3) 그러하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 하는 교회이므로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다.


14.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일이 없어야 함.
 1) 전도를 할 때 하나님 말씀을 약화시키는 일.
 천국은 말씀으로 전해지고 확대된다. 이것이 참된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잘 준비해서 완전한 복음으로 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의 전한 기준이나 생각에 흡수되어 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2)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의 경험이나 그릇된 사상을 중요시하는 일.
 3) 하나님 말씀보다 교회에 자리 잡은 그릇된 전통이나 풍습을 강조하는 일.


15. 하나님의 말씀을 실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일이 없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목적, 자기 욕망, 자기 행복,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기의 정욕적인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결핍된 부분이나 자기의 의로움을 포장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아야.


17.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려는 마음이 중요함.


18. 하나님 나라 기준에 맞게 형성된 “의”가 정립돼야.


19. 하나님 나라 백성은 높은 신앙과 도덕률을 소유하고 있어야.


20.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기준(표준)을 사람이 지킬 수 없다 해서 낮추는 일이 없어야.


21. 우리 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성이 없는지 철저히 검증(성찰)해야.


22.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결핍된 부분이 있다면 늘 철저하게 반성하며 정상적으로 서 갈 수 있어야.


23. 내 안에, 교회 안에 결핍된(그릇된) 요인이 있다면 철저한 반성이 우선돼야.


24. 철저한 반성은 나의 전체를 맡기는 데부터 시작돼야(마9:16-17/눅5:36-3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25. 하나님 앞에 나의 그릇된 신앙이 발견되면 나의 전체를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26. 하나님께서 다 맡아서 인도해 주시고 이제부터 바로 건설해 달라는 정신(신앙)이 중요함.


27. 내가 내 방식대로 살아온 흔적을 지우지(버리지) 않고 그 위에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임.


28. 나의 전체를 맡기는 일이  중요함.


29. 나의 전체를 맡기는 신앙은 하나님 말씀이 정상적으로 풍성하게 공급을 받을 때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나의 의지대로,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맡긴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의 결핍된 부분을 철저히 반성하면서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신앙으로 맡기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 말씀이 정상적으로 공급될 때 이룰 수  있다.


30.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말씀을 정상적으로 풍성하게 공급을 받고 있는가?


31.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32.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정당하게 가르치는 일에 항상 우선시해야 .


33. 교회는 종교적인 사람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을 양성하는 곳임.


34.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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