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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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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손달익 목사 (서문교회)
 

사도 요한은 혹독한 박해의 시절 지중해의 고도 밧모에서 힘겹고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하면서 장차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계시받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계시록의 마지막 줄을 쓰면서 그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쏟았다. 그가 그렇게 사모했던 주 예수님의 완전한 역사 개입은 이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에서도 터져나온다.

우리가 직면한 이 엄청난 현실이 갱신과 개선을 바라는 몇 사람의 외침만으로는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교세가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고 해도, 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도가 겨우 C-에 머물러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어도 어떤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교권 다툼은 점입가경이며 물신숭배의 세속 세력 앞에서 무기력한 타협의 모습을 보이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과 체념을 일상화하고 오늘과 내일의 모든 이웃들에 대하여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항변하면서 그저 먹고 마심을 낙으로 여겨 살아야 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희망이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3장 1절 이하의 말씀에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말씀이 임했던 당시의 정황이 소개된다. 로마의 티베리우스황제, 본디오 빌라도 총독, 헤롯과 그의 동생 빌립, 안나스와 가야바 등 당시 역사를 좌우하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명단이 있다. 그러나 힘없던 백성들은 이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위안을 얻고 희망을 둘 수 있었을까? 희망은 결코 그들, 세상의 대인들에게서 오지 않았다.

빈들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인처럼 살면서 날마다 빈 하늘을 우러러 '키리에 엘레이션'을 되뇌이며 말씀이 임하기를 갈구하던 사람 요한에게서 희망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말씀이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이 풍요롭고 번창한 물질문명이 만개한 시대를 살면서 위기를 말하고 희망 없음에 슬퍼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먹기에 부족한 식물이 생산되는 본래적 부족이 식량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나눌 줄 모르는, 말씀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탐심이 이 위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금융 위기도 그렇다. 풍족하지만 위기가 그치지 않는 이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세대가 치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 그러기에 광야의 야인에게 말씀이 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장엄하고 권세 있게 시작된 것에서 오늘을 사는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제 다시 대림절이다. 이 혹한의 계절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진심으로 구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은 티베리우스도, 빌라도도, 가야바도 아니다. 오직 그 한 분뿐이시다.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으로 임하실 오직 한 분만이 우리 희망의 근원이시다. 절망적인 박해의 시절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부르짖었던 사도 요한의 기도가 우리에게 다시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림절에 진실로 주의 강림을 간절히 사모하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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