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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골이 깊으면 봉우리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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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이 깊으면 봉우리도 높습니다.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시인입니다. 17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밀턴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목사가 되길 원했던 밀턴은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지도교수였던 윌리엄 차펠과의 의견 충돌로 한 학기동안 정학 당하였습니다. 1632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그는 목회의 꿈을 접고 많은 고전을 읽고 즐기며 시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목가적 삶으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32세의 나이에 17세인 왕당파 정치지도자였던 리처드 파월의 장녀 메리 파월과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정치적 이유로 메리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밀턴은 메리와 3년 만에 화해했지만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남겨 놓고 메리는 죽고 말았습니다. 한 달 후에 아들 존도 죽었습니다. 아내를 보내고 4년 만에 20년 연하의 캐더린 우드콕이라는 여성과 재혼하지만 그녀는 재혼한지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딸 캐서린도 엄마를 따라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밀턴이 그리던 정치적 이상 국가였던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그는 11년간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장관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36세부터 시력을 잃어 가다 44세 때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실명은 ‘신의 징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공직에서 물러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밀턴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의사 친구 파젯이 24살인 자기 사촌 누이동생 엘리자베스 민셜을 소개하여 세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밀턴은 민셜과 세 딸의 심한 갈등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고통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먼저 보내는 사별의 아픔, 육체적 실명과 공화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실패, 가족 간의 갈등, 정적들의 비난 등 긴 터널 같은 수많은 고통과 실패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한 실패와 고난은 그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영적 세계에 대한 눈을 더욱 맑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력보다 더 명료한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 냈습니다. 

그가 겪은 쓰라린 인생 경험은 고통과 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승화되어 위대한 걸작품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 같은 웅장한 서사시들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 내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다.”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봉우리도 높습니다. 천연보석의 여왕 진주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 열린편지/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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