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인쇄술 발명 뒤에는 악덕 자본가가…

첨부 1


인쇄술 발명 뒤에는 악덕 자본가가…

인쇄술 발명 지조의 사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송태흔 목사(동인교회)


독일이 낳은 탁월한 인쇄 기술자요, 발명가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마인츠 지역 품위 있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금세공사 조합에 일찍 가입해 좋아하는 금속 세공기술을 열심히 익혔다. 1430년쯤 마인츠 지역에 있는 금속세공 조합측과 귀족계급 사이에 이견이 생겨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에 귀족인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에서 강제 추방돼 슈트라스부르크(현재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도피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료에 따르면 1434년 3월 14일부터 1444년 3월 12일까지 구텐베르크는 그곳에서 세공업자들과 함께 보석과 거울을 제작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계층 간 싸움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구텐베르크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주신 달란트를 충분히 발휘해 고급 인쇄술을 연구, 발명하면서 15세기 당시 최고 기술자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발명한 인쇄기술을 실용화할 수 있는 자본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부자요 재정가인 요한 푸스트를 설득해 자신이 소유한 인쇄기를 담보로 800길더라는 꽤 많은 돈을 빌렸다. 2년 뒤 요한 푸스트는 비전있어 보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800길더를 더 투자해 인쇄술 사업의 동업자가 됐다. 구텐베르크에게 많은 돈을 투자한 푸스트는 자신에게 주어질 이익 배당금을 위해 신속한 결실이 맺어지기만 바라고 있었다. 기술자 구텐베르크가 빨리 돈이 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도록 종용한 것이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돈만을 위해 질이 떨어지는 작품을 무조건 만들기보다 가능한 최고의 질 좋은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생각이 다른 두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겨났다. 급기야 푸스트는 자신이 투자한 모든 자본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고, 곧 승소했다. 사실 발명가 구텐베르크의 꿈은 중세의 전례(典禮)에 관한 필사본들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디자인까지 전혀 손상하지 않고 원본대로 재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스트가 소송에서 이기면서 그의 꿈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구텐베르크는 요한 푸스트에게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를 갚으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고 세기적인 발명품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며, 재정적인 파산에까지 이르게 됐다.

승소한 이후 악덕 자본가 요한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만들어 놓은 42행 성경의 활자, 걸작인 시편(psalter)의 활자, 구텐베르크가 소유한 인쇄설비 관리권을 모두 갖게 됐다. 그는 소송으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기술과 시설물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사위이자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서 가장 뛰어난 숙련공이었으며 1455년 재판에서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소인배 페터 쇠퍼의 도움으로 그는 인쇄사업을 계속했다. 1457년 8월 14일 인쇄업자의 이름(푸스트와 쇠퍼)이 들어 있는 유럽 최초의 시편이 완성돼 독일 마인츠에서 발행됐다.

위 시편은 하나의 조판대 위에 여러 색의 잉크를 칠하는 기법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독창적인 기술로, 정교한 소용돌이 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했으며 수백 개의 색상으로 머리글자를 디자인했다. 전문가들은 구텐베르크가 패소로 인해 인쇄설비 사용권을 푸스트에게 넘긴 1455년 11월 6일부터 시편이 출판된 1457년 8월 14일 사이에 푸스트와 쇠퍼가 정교한 인쇄기구들을 독자적으로 고안했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을 탁월한 구텐베르크의 머리에서 나온 세기적인 작품으로 보고 있다.

구텐베르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터키의 침공이 곧 닥치리라는 것을 알리는 경고장인 터키력(曆)을 1454년 12월 인쇄해 1455년부터 사용했으며, 면죄부와 학교문법책 등도 인쇄했다. 악덕 자본주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구텐베르크는 말년에는 거의 실명에 이르렀다. 선거후(選擧侯)인 아돌프 폰 나소 공(公)이 그를 불쌍히 여겨 조신(朝臣)으로 삼아 해마다 의복, 식량 및 포도주를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면세성직록(免稅聖職祿)을 줘 여생을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고통 중에 발명한 활판인쇄술은 큰 변화 없이 오늘날 21세기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각인된 펀치 모형(활자의 앞면을 주조하는 데 사용한 금속 각주)을 부착한 주형, 활자 합금, 포도주 제조 및 제지 제본할 때 쓰이는 프레스를 응용해서 인쇄기 및 유성의 인쇄잉크를 사용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 중국이나 한국의 인쇄술, 또는 여러 종류의 목판에 활자를 찍었던 유럽의 인쇄기술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만의 특이한 작품세계였다.

돈이 없어서 동업하게 된 악덕 자본가들 때문에 인쇄술의 천재 구텐베르크는 큰 뜻을 펼치지 못하고 육체적 어려움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남겨진 그의 탁월한 인쇄술은 수많은 성경 및 다양한 책들을 인쇄하게 만들었다. 15세기 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구입하고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했다. 그가 발명한 인쇄술로 발행된 성경을 평신도들이 구입해 읽으면서 15세기부터 시작된 루터와 칼뱅의 위대한 종교개혁이 수세기 앞당겨지는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의 공로자로 약삭빠른 자본가요 의리없는 푸스트와 쇠퍼를 지명하지 않는다. 비록 말년에 눈이 멀고 돈이 없어서 고통 받았지만,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지조있게 끝까지 자신을 던진 구텐베르크를 우리는 종교개혁의 숨은 공로자로 입술에 올려 놓는다.

현대 사회를 한 눈으로 살펴 보면,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과 맺은 의리, 지조 또는 약속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는 약삭빠른 사람들에 의해 사회와 국가, 교회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잘 살펴봐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사나 세계사, 유구한 우주 역사 속에도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들을 통해 세상이 움직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 지향적으로 넓은 우주를 바라보고 지조 있고 진실하게 달려가는 것이 최종적인 승리의 유일한 방책이라고 역사는 웅변해 준다. 진실 때문에 손해 보는 인생으로 보일지라도, 때가 되면 지조 있고 진실한 구텐베르크가 역사 속에서 승리한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이 그를 고귀한 자리로 복귀시킬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성숙한 사람이라면, 입으로 한 번 발한 약속을 의리와 지조 없이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세태에 적극 도전해야 한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