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죠지뮬러

첨부 1


죠지뮬러
 
 
오늘의 성도들은 조지 뮐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5만번의 기도응답’‘영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수많은 예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도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뮐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초교파 공동체 운동인 ‘형제단’을 설립해 교회 개혁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뮐러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주무대는 영국 브리스톨의 고아원이었다. 뮐러가 고아원을 시작한 데는 고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의 결심이 있었다. 뮐러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인본주의 철학과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없다’는 자만이 팽배했다. 뮐러는 이런 불신앙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은 과거와 오逑構?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브리스톨의 작은 마을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뮐러에게 기도 이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의 기도는 확신에 차 있었고 힘이 있었다. 그가 기도했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곳,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서 응답이 왔고 애슐리의 고아들은 한끼도 굶지 않았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의 승리를 직접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뮐러의 신앙에 큰 감명을 받은 사람 중에 허드슨 테일러가 있었다. 말년에 유럽 전역과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등지로 복음을 전하러 다닌 뮐러의 모습을 보면서 허드슨 테일러도 오직 기도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중국 선교의 위대한 발걸음을 뗐다.

조지 뮐러는 1805년 프로이센에서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술꾼인 아버지 때문에 가정환경이 평탄치 않았다. 혼란스럽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낸 뮐러는 교도소까지 들락거렸다. 경찰들도 그를 감당하지 못해 몇 번이나 그냥 풀어주고 심지어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줄 정도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뮐러는 ‘나는 도대체 기독교인이면서도 왜 이렇게 못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가’하는 생각에 남몰래 괴로워했다고 훗날 털어놨다. 그의 회심은 갑작스럽고 순간적인 것이었다.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나쁜 버릇이란 하루 아침에 고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번 당신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죄와 싸우라”

한번 시작한 거짓말과 절도,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뮐러는 그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 그 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다. 구제불능의 비행청소년이었던 조지 뮐러는 19세 되던 1824년 할레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한다.

할레대학교는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다. 조지 뮐러는 그곳에서 경건주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훗날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를 배운다. 뮐러는 할레대 모임에 참석했던 순간을 “마치 내가 한 마리의 새가 돼 푸른 하늘을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뮐러는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데번 항에서 잠시 목회를 한다. 그후 그가 브리스톨로 사역지를 옮긴 것은 1834년 콜레라가 도시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때였다.

브리스톨은 먹지 못하는 육체의 허기와 알지 못하는 정신의 허기에 허덕이고 있었다. 뮐러는 그곳에서 기성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교파와 계급을 초월한 성찬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의 베데스다 교회는 유아세례와 성직자 제도,국가에서 받는 급료를 폐지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고백과 헌신에 기초한 신앙 공동체였다.

브리스톨에 교회를 개척한 뮐러는 고아들이 수용돼 있던 구빈원의 실상을 목격하고 고아원을 설립하게 된다. 구빈원의 아이들은 먹지 못해 해골처럼 말라 있었고 병으로 퉁퉁 부어있었다. 당시 뮐러는 이미 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학교는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만 고아원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감당할거냐”는 비난과 충고가 쏟아졌다.

이미 대학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뮐러였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시편 81편 10절 말씀에 그는 다시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하나님,제가 고아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소원임을 믿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종으로만 일할 뿐입니다”

뮐러의 태도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고아원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바자회를 열고 모금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뮐러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한번에 마련한 물질에 기대어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만나와 메추라기에만 의존해 40년간 광야의 식탁을 차렸던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원하는 사람들의 성금과 성물로 고아원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그의 기도였다.

고아원이 세워진 뒤 어려움은 계속 찾아왔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저녁식탁을 차리면서 내일 아침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날들이 되풀이됐다. 뮐러는 끊임없는 기도로 고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간구했다.

그가 기도했던 물품과 음식은 언제나 어김없이 공급됐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고아원을 찾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