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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링컨 부인 `눈물의 망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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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부인 '눈물의 망부가'


링컨 대통령의 부인인 메리 토드 링컨이 1882년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17년,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녀의 편지와 아들 로버트의 편지가 새로 발견됐다. 원래 사용되었던 편지봉투와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편지들은 링컨 부인의 주치의였던 윌리스 댄포스 박사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이 편지들은 그녀가 어쩌면 진통제를 남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편지에는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슬픈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사후 117년만에 발견▼

이 편지들은 일리노이 역사 도서관의 링컨 큐레이터인 킴 바워에 의해 발견돼 현재 이 도서관에서 링컨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편지를 보관하고 있던 댄포스 박사의 후손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편지들 중 절반은 기증형태로, 나머지 절반은 공개되지 않은 액수의 돈을 받고 도서관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가인 토머스 슈워츠는 “이 편지들은 그녀의 정신 이상을 판정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리기 전 그녀의 인생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보석과 같다”고 말했다.

링컨 부인의 자식들 중 가장 오랫동안 생존했던 로버트 토드 링컨은 아버지가 암살당한 지 10년 후인 1875년에 ‘어머니를 위해서, 그리고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어머니를 ‘정신이상자’로 체포하도록 하는 영장에 서명했다. 이어 열린 그녀에 대한 청문회에서는 법적인 변호가 전혀 제공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댄포스 박사마저 그녀가 정신이상자라는 놀라운 증언을 했다. 배심원은 재빨리 그녀가 정신이상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때 메리 링컨은 아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 로버트, 내 아들이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법원은 그녀를 주립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명령했다. 링컨 부인은 정신병원에 거의 4개월이나 갇혀 있은 후에야 언니인 엘리자베스 에드워즈의 집에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876년에 열린 두번째 청문회에서 그녀는 “이성을 되찾았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로버트는 그녀의 보호자 지위에서 물러났다.


▼주치의 자손이 보관▼

이번에 발견된 편지들은 링컨 부인이 남편과 세 아들의 죽음을 늘 슬퍼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아들들중 에드워드는 1850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윌리엄은 1862년 백악관에서, 다정한 아이였던 토머스(애칭 태드)는 18세 때인 1871년에 시카고에서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발견된 링컨 부인의 편지들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은 1869년에 그녀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쓴 것이다. 당시 그녀는 그곳에서 기숙학교에 다니던 태드와 함께 살고 있었다. 링컨 부인은 백악관 시절의 친한 친구였던 샐리 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간도 내게는 아무런 위안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나는 존경하던 남편을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슬픕니다. 그의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나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힘들었던 지난 4년 동안 지금보다 더 행복한 세상에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만이 나를 지탱시켜 주었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입원도▼

링컨 부인은 남편이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다는 말을 다른 편지에서도 여러번 썼다. 슈워츠는 이에 대해 “메리 링컨은 스프링필드에서 남편과 함께 법률회사를 운영했던 윌리엄 헌든과 대결을 하고 있었다. 헌든은 강연과 신문 기고문 등을 통해 링컨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앤 러틀리지뿐이었으며 링컨 부부의 결혼생활에는 사랑이 없었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링컨 부인이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혼자 살고 있던 1874년에 댄포스에게 쓴 편지에는 그녀가 앓고 있던 병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이 편지에서 심한 불면증을 호소하며 댄포스 박사에게 약을 더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잠을 자기 위해 진정제이자 최면제인 포수 클로랄을 자주 사용했다.

링컨 부인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후 시카고 트리뷴은 그녀가 아들에 의해 ‘사립 정신병자 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며 “이 조치에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대해 로버트는 댄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트리뷴의 기사에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바타비아의 패터슨 박사 요양원에 있으며 나는 오늘 오전에 어머니를 만나러 그 곳으로 갈 예정입니다”라고 썼다. 그는 어머니를 감금하는 데 자신이 무슨 역할을 한 것처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매우 한탄하고 있었다. 패터슨 박사는 당시 링컨부인이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원의 경영자였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들 중 가장 슬픈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링컨 부인이 첫번째 청문회에 나가기 전에 댄포스에서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 그녀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희망사항을 적어놓았으며 겉봉에는 ‘로버트 T 링컨 귀하. 내가 죽은 직후 개봉해주시오’라고 썼다.


▼『남편 곁에 묻어달라』 당부▼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내 방의 책상 맨 아래 서랍에 있는 하얀 비단 드레스를 내 유체에 입혀 주십시오. 내 관은 뚜껑을 덮은 채 이틀(48시간) 동안 놔두었다가 3일째 되는 날 스윙 교수의 동의를 얻어 그의 교회로 옮겨 주십시오. 장례식에서는 스윙 교수가 시편 23편을 바탕으로 설교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데이버드 스윙 목사는 시카고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목사였다.

링컨 부인은 이어 이 편지의 말미에서 자신의 유체가 ‘남편과 태드 옆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러나 1882년 7월15일 그녀가 스프링필드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대한 그녀의 희망사항 중 남편과 아이들 옆에 묻어달라는 요청 외에 나머지는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이웃들과 관리들이 에드워즈가의 거실에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는 그녀의 관을 보러 찾아왔다.

그녀의 관은 40년 전 그녀가 결혼식의 신부로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얌전히 포개져 있는 그녀의 손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1842년에 끼워 준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에 새겨진 말은 ‘사랑은 영원하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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