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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광이란… 고난 수반하는 ‘무거움’… 오직 십자가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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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란… 고난 수반하는 ‘무거움’… 오직 십자가 산물  

- 김정원(횃불트리니티 신대원 1년)
 

우리는 보통 크고, 화려하고, 명예로우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영광의 개념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영광’이라는 뜻의 단어 ‘카보드’는 ‘무겁다’라는 뜻의 동사 ‘카베이드’와 어근이 같다. ‘영광’이란 단어와 ‘무겁다’는 단어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 것일까?

‘영광’이 가지는 참의미를 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가진 영광의 개념과는 달리 영광이란 ‘무거운’ 것임을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광이란 ‘무거움’ 즉 고됨,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러한 무거움을 견뎌낸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듯한 느낌을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된다.

중세의 신학은 소위 ‘영광의 신학’이라 불린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는지를 세상적 기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부유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이와 반대되는 신학을 펼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르틴 루터다. 훗날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에 참여할 것을 역설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성공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교황뿐 아니라 제국의 황제로부터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그의 삶은 생사를 건 사투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내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쳐야 했다. 수많은 책을 쓰고 글을 남겼으나 루터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고 그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십자가적 삶’에 투영돼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성공 복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중세 ‘영광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재현된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중세 가톨릭이 범하는 우를 다시 범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루터가 주장한 것과 같이 복음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고난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영광은 십자가의 산물일 뿐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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