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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심은 대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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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두리라
   
- 임순례 권사(여, 65세, 교문장로교회, 경기도 남양주시) -

 
글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교회를 다니게
 
  나는 어린 시절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면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열두 살 되던 해에 교회에서 글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신앙생활은 결혼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진 배우자를 찾았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는 남자를 소개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신앙은 없고 오로지 돈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쌀장사를 하던 남편은 70년대 주택 경기가 한창 좋을 때, 집장사를 한다고 여기저기에서 사채를 빌리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장사 밑천을 다 들여서 개봉동에 땅 500평을 사서 집 10채를 지었다. 그런데 집을 거의 다 지을 무렵, 그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이게 되었다. 그 바람에 4년 동안 집이 팔리지 않자, 빚을 감당하지 못하여 지었던 집을 고스란히 날려버리게 되었다.
  그 후 남편은 집안에만 틀어박혀 TV만 보더니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신경을 써서 그러겠지 하고 좋다는 약은 다 먹고, 침도 맞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남편은 그렇게 3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며 병을 앓다가 전 재산을 다 없애고 결국 74년도에 4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적은 돈으로 생활을 하려니 신앙 생활 하기는 더욱 어려워
 
  나는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다가 재산을 잃고 남편까지 잃고 나니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은 흐지부지 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4남매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나는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남편이 하던 쌀가게를 직접 운영했다. 그런데 쌀가게를 운영하려면 쌀을 사오고 배달하는 일을 직접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자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게를 80만 원에 정리하여 30만 원으로는 전세를 얻고 50만 원으로는 조그만 음식을 차렸다.
  의외로 음식점이 잘 되어서 조금 더 넓은 장소로 옮기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다 예전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은 음식점을 하다보면 술도 팔게 되니까 음식점을 하지 말고 경동시장에서 새벽장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래서 50만 원을 들고 무작정 경동시장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뛰어들고 보니 아는 사람도 없고 자리도 없어 막막했다. 시작을 했으니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마늘 몇 단, 옥수수 몇 자루를 들고 다니며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시장 사람들의 텃세가 심해서 그곳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골에서 물건을 한 차씩 사다가 서울 상회에 팔고 거기서 남는 이윤으로 다시 물건을 사서 파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초·중·고교를 다닐 때였는데 적은 돈으로 생활을 하려니 자주 이사를 다니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러다 하나님께 혼나지.’ 하면서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기만 했다.
  그러나 아이들만큼은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쳤다.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주어 십일조를 드리게 했고, 없는 살림이었지만 주일마다 헌금을 쥐여서 교회에 보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자리를 잡고 봉사를 하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잘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락교회를 다니는 집사님 한 분이 피곤한 삶에 찌든 나를 향해 “아주머니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잘 하셔야 됩니다.”라는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나는 그 말에 ‘아! 이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빨리 돌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가까운 개척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장사를 하면서 매일 십일조를 떼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50만 원에 3만 원짜리 월세 집에서 600만 원짜리 전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힘을 다해 심었더니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목사님께서 나를 포함해서 성도 몇 명을 지명하여 200만 원씩 건축헌금을 드리라고 하셨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사는 나에게 200만 원은 너무 큰돈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멀리하고 내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4남매와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고 믿음으로 건축헌금을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전세금 600만 원을 빼서 다시 400만 원에 5만 원 하는 월세 집으로 이사를 하고 200만 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서 건축헌금을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기특하게 여기셨나 보다. 그 무렵 한 달에 10만 원씩 부어가던 청약부금이 있었는데, 아파트가 당첨되어 2000만 원 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는 몇 년 사이에 8000만 원으로 오르게 되었다. 30배, 60배, 100배로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200만 원이 6000만 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파트를 팔아 얻은 6000만 원으로 4남매를 모두 출가시킬 수 있었다.
 
보호식 중에 10년 된 위장병을 깨끗이 치료
 
  그런데 4남매를 출가시킨 후 하던 일을 정리하고 일손을 놓자 평소 앓고 있던 위장병이 더욱 심해졌다. 4남매를 키우기 위해 혼자 고민하며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새벽시장을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보니 위장병이 생겨 10년 가까이 위장병을 앓게 되었다.
  속이 쓰려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잠을 잘 수 없어 항상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성바울병원을 다니며 진찰을 받고 약을 먹었지만 낫질 않았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일 년에 한두 번씩 금식하러 다니던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았다. 그리고 3일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나이가 많아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면서 살기 원합니다. 저에게 산 증거를 보여 주셔서 전도하면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들었던 병원비 3만 원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3일 금식이 끝났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보호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신기하게 죽을 먹었는데도 속이 쓰리지 않았고, 수면제를 먹지 않았는데 잠을 잘 자게 되었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는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보호식 중에 10년 된 위장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 증인의 삶을 살도록 나의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온전히 서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오늘도 강남금식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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