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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내게 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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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광수 장로
직업 / WBA 국제심판
제목 / ‘내게 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 


공정한 판정으로 인정받고 있는 WBA 국제심판 김광수 장로.

아내와의 결혼 조건을 지키기 위해 교회학교 교사를 시작했지만 교회에서의 봉사는 이제 그의 삶에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김광수 장로 (WBA 국제심판) 지난 1997년 닥친 IMF 경제한파는 우리 가정에도 큰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 이전 해인 96년 사업장이 들어 있던 건물이 부도로 문을 닫은 데 이어 맞게 된 경제한파였기에 IMF 경제난은 헤쳐나오기 힘든 절망이었다. 특히 경제위기의 극복을 위해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었기에 귀금속을 판매하는 우리로서는 더욱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피증세까지 나타날 정도였지만 모두가 어려움을 헤쳐나오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을 원망할 순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보다 강했다.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며 하루를 시작했고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무엇보다 내가 재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구하고 부르짖는 아내의 모습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와 기도드릴 때면 삶의 무게를 잊어버릴 수 있었고, 삶의 소망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1963년 선배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하게 되었다. 65년에는 당시에는 꽤 유명한 ‘성희경배 복싱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각종 매스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각종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풍요롭지 못한 생활 때문에 물질의 유혹을 많이 받기도 했다. 종종 돈을 준다는 이유로 남의 싸움판에 대신 끼어들곤 했다. 어떠한 이유로든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러한 폭력행사는 당장 힘든 처지를 개선시켜 주었고, 어린 마음에 영웅이 된 듯한 착각까지도 갖게 했다.

국내 선수권을 11차례 이상 석권하며 내 앞에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후 프로로 전향했다. 1973년에는 동양챔피언에 오르기도 해 아시아권에서는 더 이상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던 기세가 꺾인 것은 이때였다. 군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하게 되었는데 이때 행정착오로 ‘이광수’란 사람과 배속이 바뀐 것이었다. 덕분에 그 사람은 체육부대로 가게 되었고, 나는 엉뚱하게 운전병으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체중관리와 지속적인 운동이 생명인 복싱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체중이 엄청나게 분 상태에서 제대하게 되었다. 이후 복싱 코치로 활동하며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천막교회 시절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던 아내는 나와의 결혼에 앞서 ‘결혼의 조건’을 밝혔다. 그 첫 번째가 아내가 출석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꾸준히 나오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좋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아니 더 한 조건이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친 데에는 목회를 하신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다. 목사님이신 아버지 때문에 어릴 적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신앙은 건성에 불과했고 아내를 만나면서 인생의 곁길을 헤메다가도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1978년 아내와 결혼하면서부터 아내와의 약속대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부족한 것이 많아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은 아이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은혜로 이끄셨다. 아이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과 마음에 더 큰 은혜를 받곤 했다. 덕분에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신앙이 자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박종팔과 박찬영 등 80년대 초반 복싱계를 주름잡던 선수들을 코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꼭 질 수밖에 없는 우리 선수였지만, 라커룸에서 선수를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은 시합이 연출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코치직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후 보석감정 일을 배워 88년 말부터 귀금속 판매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89년부터는 WBA(세계권투협의회) 국제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는 경제적인 부분도 IMF 한파 이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바라기는 언제나 주님의 음성에 청종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그때가 좋을 때건 좋지 않을 때건 말이다.

* 본글은 순복음교회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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