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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연세 의료원 원목실 김복남 전도사 간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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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연세 의료원 원목실 김복남 전도사님이 1997년 6월 19일 기업은행 기독선교회에서 간증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떠십니까?

행복하십니까?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직장에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주위에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만족하십니까? 자녀에게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만족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삶의 만족의 기준이 참으로 상대적인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신촌 세브란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기독교 병원입니다.

그래서 각 병원마다 목회자들을 두고 있는데, 저는 특별히 재활의학 쪽 환자와 직원들을 담당하고 있는 전도사 입니다.

그래서 각 병원에서 직원들과 상담하고 환자와 보호자와도 상담하고 있는데 직원들을 통해서 느끼는 것과 환자들에게서 느끼는 것이 동일합니다.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저희 직원이 아닙니다. 용역회사에서 보내주신 분들이신데 이분들이 저를 만나면

“전도사님, 병원에서 직원으로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밥을 나르는 저 영양과의 아주머니들을 보면 너무 부러워요. 저 영양과에서 일 할 수 있도록 취직 좀 시켜주십시오” 라며 영양과에 일하는 분들을 부러워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부러워하는 영양과 직원들을 만나게 되면 또 다른 얘기를 하더군요.

“집에서도 허구헌날 밥 하고, 병원에 와서도 밥 하구. 의사들이 아무리 치료 잘 하더라도 우리가 먹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텐데 우리가 하는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원한 곳에서 일하는데 우리는 이 더운 날 뜨거운 주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얘기가 “저렇게 에어컨 밑에서 일하는 사무직원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무직원으로 일하면 좋을 것을, 잘못했습니다”며 부러워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만난 사무직원들은 또 다른 얘기들을 합니다.

“전도사님, 병원에서 사무직 별볼일 없습니다. 사무직으로 일 할 것 같으면 큰 기업체나 은행 같은 데서 일 해야 빛을 보는 거예요. 병원에서 일하려면 의료진으로 일해야 되는데 우리가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의료진, 치료진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료사들은 또 다른 얘기를 하십니다.

“전도사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번다’고, 환자는 우리가 죽어라고 만지고 치료하는데 환자들이 ‘고맙다’ 는 얘기는 의사 선생님들에게 합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공부 좀더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는 건데요. 병원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의사가 최고 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구나, 역시 병원에서는 의사가 최고로 존경받고 대접받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한 의사선생님은 또 다른 얘기를 하십니다.

“전도사님, 의사 좋다는 얘기,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 ‘환자권리장전’ 인가 뭔가 만들어서, 환자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조금만 잘못하면 법정에 서야 합니다.

저도 전도사님이 부럽습니다. 전도사님이 늘 웃으면서 기도해 주고요. 환자들이 나으니까 우리에게 고맙다는 소리 안하고 전도사님이 기도해 줘서 나았다고 전도사님께 고맙다고 얘기합디다. 우리는 낫지 않으면 욕먹는데, 전도사님은 안 나아도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네 믿음이 없어서 안 나았다’ 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 얘기를 하시길래 재활병원에서는 그러면 ‘내가 가장 부러운 대상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나도 아니예요. 같이 근무하는 분은 목사니까 저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65세까지 정년인데, 저는 전도사니까 60세까지 정년이고, 월급차이도 많고요. 이렇게 따지니, 목사님이 제일 부러운 사람이 되더군요.

그래서 목사님께 물어보니까, 목사님께서는 “기관 목회, 무슨소용이 있는가” 라며 “평생을 목회해도 교인 한 명 없지 않냐” 반문하시며 일반 목회하시는 분들을 부러워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들, 각종 직업을 가지신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각기 남이 하는 일은 보람돼 보이고, 쉬워보이고,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처럼 보이고, 자기하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저울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환자들도 저에게 똑같이 얘기를 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재활병동에는 갖가지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팔이 없는 환자들은 제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 전도사님,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자기 두팔은 가지고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저렇게 일하고 있는 청소부가 부럽습니다. 내게 팔을 주어져셔 내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안아볼 수 있고 열심히 일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절단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팔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발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전에 저는 다리 없는 사람들이 고무다리를 끼우고 산다고 하길래 ‘그냥 그렇게 사는가 보다’ 고 싶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병원에서 다리없는 사람들의 의족을 끼우고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을 볼때마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어요.

절단되 부위와 의족이 맞물려서 굳은살이 생겨서 통증을 느끼지 앟고 의족을 신고 다니려면 많은 세월이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날마다 쓰고 다니는 환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의족을 맞추고 난뒤에 살이 쪄서 그 의족이 맞지 않자 비싼 의족을 다시 할 수 없어서 힘들게 의족을 신었지만 10M도 채 못가서 통증 때문에 의족을 벗어야 하는 그런 환자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한쪽 다리가 없는 경우는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만 두 다리가 없는 경우는 그 딱함을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두 다리 없는 환자들은 엉덩이로 밀어가면서 살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웬만하면 두 다리 없는 환자들에게 의족을 신겨서 걸을 수 있도록 치료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두 다리 없는 환자들이 의족을 신고 일어서서 걷는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일곱 살짜리 꼬마가 유치원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두 다리를 몽땅 잃었습니다.

이 조그만 아이에게도 의족을 신기고 걷는 연습을 시키는데 이 아이가 힘이 든다고 떼를 쓰면서 우니까 엄마가 소리를 질렀어요.

“ 이놈아! 네가 지금 폭기하면 너는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야해, 다시 일어나!”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가 힘들다고 일어나지 못할 때 이 엄마가 울면서 이렇게 이런 말을 했어요.

“ 전도사님, 내 다리를 잘라서 우리 아이에게 붙여 줄 수는 없나요. 우리 아니는 지금 한번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키가 자라면서 또 다른 의족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힘이 들까요.

이렇게 다리가 없는 사람들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보다도 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제가 아는 의사 선생님 한 분은 자기가 의사인데도 자기 당뇨를 다스리지 못해서 두 다리를 다 잘라야 하는 경우였습니다. 
 
너무 심했기 때문에 엉덩이 깊숙이 잘라서 의족마저 신을 수 없었어요. 
 
 
그 때 의사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 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다 주고 다리 하나만 구 할 수 있어서, 한쪽 다리라도 있어서 목발이도 짚고 한 번 일어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분의 전 재산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50대 후반에 지방에서 개업을 했던 병원장 이셨기에 추측컨데 아무리 못되도 재산은 수억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갖고 싶어 한 한쪽 다리를 수억에 비교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두다리는 수십억, 아니 수백억, 아니 수천억의 가치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리가 없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 다리가 좀 못생겼으면 어떻습니까? 다리를 좀 절면 어떻습니까? 관절염으로 무릎이 쑤시면 어떻습니까? 내 다리가 있어서 걸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리가 절단된 분들이 이처럼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 병원에서 이런 분들은 '나이롱 환자' 라고 불릴 만큼 양호한 환자들입니다. 다리가 절단된 환자들을 보면서 " 우리 남편이 저 정도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며 부러워 하는 또 다른 환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자들인가 하면, 다리는 붙어 있지만 결코 일어설 수도 없는 환자들, 다리를 꼬집어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환자들, 마취를하지 않고 발톱열개를 다 뽑았는데도 단 한마디도 아프다고 소리하지 않는 환자들, 

즉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들인데,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들을 척수 손상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 환자들은 다리가 절단된 환자들을 지켜 보면서 " 저 사람들은 우리보다 낫지 않습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목발을 짚고 의족을 신고 다닐 수 있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곳은 갈 수가 없습니다." 라면서 다리 절단된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러워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면 이들은 하반신이마비될 때 일엇고 걸을 수 없을 뿐만아니라 소변과 대변 마려운 느낌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에 오시면 '방광훈련' 이라는 것이 있어서 하루에 4-5번씩 주먹을 쥐고 아랫배를 주먹으로 때려서 그 자극으로 소변을 뽑아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목이 시리도록 아랫배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나, 아니면 손가락을 넣어서 대변을 긁어내는 모습이나, 아니면 발가락까지 동원해서 소변을 짜내는 모습을 여러분이 단 한번만이라도 지켜보신다면 저 처럼 밥먹을때만 감사기도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장실 가서도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을 왔다' 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 참으로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런데 더 딱한 일은 우리병원에서 이 하반신 마비된 척수 손상장애인들을 지켜 보면서 " 전도사님, 우리 형편이 저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며 그들을 부러워 하는 또 다른 많은 환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들인가 하면, 목을 다쳐서 사지가 마비된 경추손상 장애인들입니다.
 
요즘의 교통사고가 목을 다치게 해서 사지마비 장애인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지마비 장애인이 될 경우에는 스스로 옆으로 돌아 누울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 앉아서 설 수도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밥을 떠먹을 수도 없습니다. 
 
자기 몸이 가려워도 자기 손으로 긁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도 자기 손으로 성경을 넘길 수가 없어서 성경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지마비 장애인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 하반신 마비된 저 사람들 너무 부럽습니다. 저 사람들은 휠체어라도 밀고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손이라도 움직이기 때문에 앉아서는 무슨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도사님. 손가락 다섯개라도 움직일 수 있어서 내 몸이 가려울때 옆의 사람의 도움 받지 않고 긁을 수만 있다면요. 내 손으로 밥을 떠먹을 수 만 있다면요. 아니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움직여서 컴퓨터라도 누를 수 있다면 내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데요."
 
 
그러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날마다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지 마비된 분들 참으로 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지 마비된 경수 손상장애인들을 지켜보면서 " 전도사님, 우리 환자형편이 저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며 그 환자들을 부러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뇌를 다쳤거나 중풍으로 쓰러져 뇌를 수술 받았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입으로 음식을 씹어 삼킬 수가 없어서 배에다 호스를 끼고 시간을 맞춰 음식물이 들어가고 있고, 눈은 떠 있지만 수십 년 함께 산 가족이 아무리 앞에서 어른 거려도 그 가족을 알아 보지 못하고, 귀는 열려 있지만 자기 이름을 부르고 여보라고 부르고 엄마아빠라고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은채 하루,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년, 이 년이 흐르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로 칠 년이 지난 환자의 보호자와 상담을 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숨만 쉬는 환자를 둔 보호자들은 제게 이렇게 말 합니다.
 
" 사지가 마비 되었지만 저런 환자를 둔 보호자들은 우리보다 낫습니다. 저들은 의식이 온전해서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입을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있지 않습니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환자는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한달 두달이 가고, 일 년  이 년이 흐르고, 우리는 날마다 가슴을 조이면서  ' 오늘은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우리 환자들은 저 상태에서 침묵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지마비 장애인들을 너무나 부러워 하는 것 입니다.
 
제가 아는 젊은 여자 한 분은 남편이 아침에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6년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있는데 언젠가 그 분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 전도사님 저는 카톨릭 신자인데 다 같은 하나님 아닙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요."
 
가톨릭 신자인 이 여자분은 처음에는 기독교 병원이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에게는 상담을 안해주는 줄 알았나 봅니다. 제가 그 환자를, 4년 동안 들락거리며 봤거든요. 
 
그래서 제가 " 당연히 기도해 드려야죠" 하니까 그 젊은 여자분이 말을 이었습니다. 
 
" 전도사님 제가 지금 이 마당에 와서, 우리 남편이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을 되첮아서 돈벌어오는 것을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남편이 일어서서 걷는 것을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육 년을 기다렸는데요. 저, 더 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평생 파출부를 해서 남편을 먹여 살려도 좋습니다. 

제가 우리 남편 손, 발이 되어서 밥을 떼먹여 주고, 대 소변을 받아내도 좋으니까 의식만이라도 돌아와서내가 자기 아내인 것을 알아보고 다시 한번만 '여보' 라고 불러 줄 수만 있다면 저도 더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우리 남편입에서 여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기도해 주십시요."
 
그래서 저도 생각이 날때마다 그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이의 남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젊은 여자분들, 특히 남편이 돈을 적게 벌어 온다고 짜증내시는 분들,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고 집안 일을 거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여자 분들을 보면, 평생을 남편을 벌어 먹여 살려도 좋고, 평생을 남편 손발이 되어서 밥을 떠먹여 주고, 대소변 받아도 좋으니까 그 입에서 다시한번 '여보' 소리 듣기 원하는 그 여자분을 생각하면서 건강한 남편을 주신데도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여자분들,  참으로 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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