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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무당의 딸로 태어난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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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의 딸로 태어난 나에게도..
 
- 이순자 집사 (55세. 서울 도봉구. 동신교회) -


무당의 딸로 태어나

  지금으로부터 삼십 여년 전, 그러니까 결혼한 지 삼년 쯤이었던가 싶다. 남편의 몸이 안좋아 병원을 갔더니 폐병이라고 하여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동네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 의논을 했다. 어머니는 그 병은 굿을 해야 낫는 병이라고 했다.

  우리 어머니는 무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대로 굿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굿 하는데 돈이 오만원이나 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오만원이면 전세를 하나 얻을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해서 나는 굿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고, 남편은 남편대로 몸이 아파서 하던 장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게 되었다.

  바로 그럴 즈음이었다. 하루는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이웃집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전도를 했던 모양이었다.
  한때 제주도에서 산 적이 있다는 아주머니는 자기도 역시 폐병을 앓고 있던 중 교회에 나가서 믿음으로 병을 고쳤다는 간증을 한 것인데, 내가 무당의 딸인 것을 알고는 내가 집에 없는 틈에 남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에 남편은 "영진이 엄마가 그 말을 들으면 펄쩍 뛴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를 나가고 싶지만 영진이 엄마 때문에 못나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아주머니는 다시 내게 접근을 해왔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다가 며칠 후에는 또 어디 놀러나 가자고 하면서 왔기에 따라 나섰더니 어느 집사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침 금요일이어서 그 집에서 예배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어떨결에 함께 앉게 되었다.
  그리고서는 기도시간에 집사님이 내게 방언으로 안수를 해 주는데 그 말이 하도 신기하여 속으로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면서 몸이 막 떨려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그 다음 주에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서 등록을 하게 되었고, 아주머니는 후에도 계속해서 은혜의 자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다닐 때였다. 한 번은 어느 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방언을 받게 되었는데, 방언을 받고 보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다 방언으로 들려오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은혜를 체험한 후 남편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남편이 교회에 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거짓말같이 폐병이 다 나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폐병이 낫고 나서 남편은 곧 군대에 가야했다. 결혼 전부터 남편은 병역을 기피했던 모양으로 병 나은 것이 발각되어 세 살 박이 아이를 두고 뒤늦게 군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군에 가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한다.

기묘한 인연

  남편이 군에 가고 난 다음, 나는 아이를 키우고 일을 나가면서 혼자 있으니 외로워서 가끔 어머니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네가 있으면 점괘가 안나온다, 너 때문에 우리집이 망한다'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채를 쥐어뜯고 기절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곧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몸을 털고 일어났는데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방언을 받으면서 믿음이 들고 내 안에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나는 산 밑에 버려진 한 처녀를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아주었는데, 스물 두살 먹은 그 처녀는 우리 동네에 사는 그의 부모가 폐병환자라 하여 산 밑에다 내다버렸던 것인데 그의 어머니는 계모였다. 쌀포대에 싸여 버려진 처녀의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숨이 금방 넘어갈 듯 연신 헐떡였다.

  나는 처녀가 너무 불쌍했다. 예수를 믿기만하면 그 처녀가 나을 것 같은 마음에서 정성껏 돌보아주었다. 우리방 문간에는 그 처녀가 뱉은 가래가 지저분하게 눌러붙어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처녀의 생명이 위급했던터라 얼마 후 처녀는 죽고 말았다. 그 불쌍한 처녀가 죽은 다음 그의 부모는 지금까지도 동네에서 고개를 못들고 다녔으나 나는 전도사란 별명이 붙었다.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우리에게 돈 백만원이 없으면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될 형편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나는 그 불쌍한 처녀의 이모한테 돈을 빌려 쓰는 기묘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당시 백만원이면 큰 돈이어서 그 많은 돈을 빌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한동네에 살고 있었던 그이가 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처녀의 이모는 아무 말없이 그자리에서 돈 백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들어 살던 창신동에 조그만 3층 집을 사게 되었다.

10일 금식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남편은 본시 불우하게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로 술병을 들고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었고, 어머니도 그가 어렸을 때 정신이상자가 되어 나돌다가 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다음부터 지금까지, 마치 거리에서 죽은 그의 부모가 잡아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을 나가 방황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에 있을 때까지도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데 집에 돌아와서 놀면서 사람이 변하더니 끝내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핍박을 하다가 창신동 3층 집을 산 그 해에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없는 가정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다. 교회생활, 봉사생활도 늘 힘닿는데까지 하였다. 그러는 동안 두 아이도 어느덧 장성하여 제 길을 가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이날까지 우리 식구가 쓰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물질도 늘 채워주셨다. 지금까지 내가 남편이나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그리고 담대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에 성령을 받은 체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18년 만에 갑자기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서 창신동집이 자기 명의로 되어있으니 내놓으라는 것이다. 실상 우리 부부는 몇 년 전 재산상의 문제로 서류상 이혼한 것으로 되어있었는데 이제 와서 남편은 이혼이 되었으니 되레 우리더러 집을 나가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 형편을 아는 동네사람들은 나가지 말고 소송을 내라고 했으나 나는 그의 인생이 불쌍해서 집을 비워주었는데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창동에도 분양 받아놓은 아파트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나는 지난 일년 동안 남편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이번에 금식을 결단을 하고 기도원에 오른 것이다. 목사님과 상담을 한 다음 10일 금식에 들어갔다. 처음 며칠은 좀 힘들었으나 금식 7일째 되던 날 철야시간에 하나님께서 시편 103편 말씀을 통하여 내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은혜를 부어주셨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문제도 응답을 주셔서 나는 많이 울었다.

  응답을 주신 그날 이후부터 금식이 끝나는 날까지는 날아갈 것같은 기분으로 금식을 잘 마쳤다. 보는 사람들마다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남편의 문제와 재산상의 손익문제 등 인생의 모든 짐들을 내 손에서 내려 놓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손수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해주시고 독수리처럼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또 이번 금식중에 관절염과 만성치질을 고쳐주신 것도 감사한다. 관절염이 심해서 평소에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금식 마지막날 철야시간에 은혜를 받고 다리가 거뜬해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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