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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다시 찾은 영생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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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고를 당한 것은 96년 4월이었다. 서울예전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SBS방송아카데미 1기생으로 멀티미디어영상을 공부하던 때였다. 대학시절에 과대표를 지낼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나는 그날도 명동에서 군입대를 앞둔 후배의 송별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다.

청년들의 모임이 대개 그러하듯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던 나는 차가 뜸한 도로를 무단횡단하려고 하였다. 그때 함께 있던 친구가 멀리서 달려오는 택시를 보고는 건너더라도 저 택시나 지나가면 건너라고 말했지만 술기운을 빌어 객기를 부리고 만 것이 죽음으로 뛰어든 격이 되고 말았다. 새벽 택시는 의례 시속 100km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기 마련인데 나는 거기에 정면으로 받치고 말았다. 머리를 앞 유리창에 받치며 떠오른 몸이 수미터를 솟았다가 떨어졌다. 당시 나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은채 호흡을 멈췄었다고 한다. 다행히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곧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사고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부모님이 달려오셨을 때 당직의사는 "심의수씨는 뇌가 계속 부어 오르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두면 곧 사망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뇌수술을 시도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고 한다. 막상 머리를 열어 보니 오른쪽 뇌가 거의 뭉개져 있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의사는 상태를 살피더니 곧 어머니께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희박하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는 의사에게 그저 최선을 다해 달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수가 죽으면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시체도 해부용으로 기증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나의 뇌수술을 맡았던 의사 선생님은 이미 보호자가 사체기증까지 생각하고 있는 터라 본인이 배운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수술을 마쳤고 어쨌든 나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식도 없는 식물이간에 불과했다.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뇌수술때 나의 오른쪽 뇌를 완전히 제거하고 대신 인공 플라스틱 바가지를 넣었다고 하니 당시 주변 사람들의 심정을 가히 예측할 수 있다.

시편1편을 외어 보겠니?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담당의사는 회진을 할 때마다 내게 "심의수씨 내 말 들리면 손가락으로 V자를 해 보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날 나는 승리의 V자를 하며 깨어났다. 그때 어머니와 가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담당의사도 "저희도 가끔 이런 환자를 볼 때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낍니다 도저히 의식을 찾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라고 말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의식은 깨어났지만 그때도 역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정도였다. 그 이상의 회복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원에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셨다. 어머니의 기도는 막연히 아들을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식물인간 같은 저 상태로 두시려거든 차라리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살려 주시려거든 온전하게 회복케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렇게 어머니가 간절히 기도하시는 동안 중환자실에 있던 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도하러 가실 당시 나는 코에 넣은 호수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 상태였는데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만에 나타난 나의 급속한 회복속도는 의사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하셨던 목사님과 교우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고 떠듬떠듬 말도 할 수 있게 되자 어머니가 내게 처음 물으신 것은 시편 1편을 외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시편 1편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익히 내가 외우고 있던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오른쪽 뇌를 다 드러낸 상태에서 내가 정신적인 장애를 갖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신 것이다. 나는 들릭락 말락 한 목소리였지만 입모양만은 분명하게 시편 1편을 외웠다.'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을 온전히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새사람을 입다-장애인과 청소년을 위한 목회를 꿈꾸며

나는 사고난 지 8개월만인 12월13일에 퇴원했다. 그리고 그 해 송구영신예배 때에는 비록 큰 형님의 등에 업혀서이지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은 신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특히 외가의 증조할아버지가 목회를 하셨을 정도로 신앙의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나도 모태신앙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사고가 날 당시도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고 청년부 활동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술, 담배를 하는 등 세상적인 삶을 동시에 살고 있었다.

나의 꿈은 컴퓨터 그래픽을 잘 해서 방송국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는 내 모든 삶을 변화시켰다. 뜻하지 않게 일어난 사고로 인해 나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성경을 통독하였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가장 은혜받은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2-24절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었다. 나의 몸이 시체해부용으로 기증되었을 때 나의 그 이전의 삶이나 꿈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지금 나는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퇴원후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과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은 결과 비록 왼쪽 팔과 왼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이지만 이젠 지팡이를 들고 혼자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모두들 오른쪽 뇌가 없는 상태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나의 새로운 삶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많은 사람의 기도에 힘입은 것이며 무엇보다도 나를 기가 막히는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머니께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듯이 이제 내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쓰시기 위해 내게 새 삶을 허락하셨음을 믿는다. 나는 지금 인천신학교에 편입을 해서 이번에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처럼 하나님을 알되 참된 삶을 살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나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선교하는 것이 내가 가진 새로운 꿈이다.나를 새롭게 하시고 새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그들에게 전하여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고 싶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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