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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무당의 아들이 목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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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무당의 아들이 목사로 (이창수 목사 간증수기)

2대째 무당의 가정

저희 가정은 2대째 무당의 집으로 외할머니는 만신이었고 어머니는 무당이셨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는 국악기인 피리 부는 직업을 가지고 계셔서 20년 동안을 어머니와 함께 굿을 다니시면서 아버지는 피리와 장구를 치고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돈을 벌어 오셨습니다.
집안에는 부처를 골방에 차려 놓고 사람들에게 점을 쳤는데 인천 지방에서는 저희 어머니가 용한 무당이라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인천 부평 부개동에서는 우리 집의 별명이 세가지였습니다. 무당집이요, 점쟁이집이요, 피리쟁이 집이였습니다.

우리집은 늘 무당과 국악을 하는 사람들로 늘 가득차곤 했었습니다.
부개동에 부개동장로 교회가 있었는데 다른 집은 다 전도를 해도 우리 집은 항상 예외로 전도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 부터 전도를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무당의 집이기 때문에 아예 전도 대상에서도 제껴 놓았습니다.

또한 저희 형제는 1남 3녀로 위로는 누님 한 분과 여동생 둘이 있는데 누님 또한 어느 점쟁이가 3대째 무당이 될 것이라고 점을 쳤던 정말 다시 있을 수 없는 마귀의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에서 자라면서 국민학교 때는 축구부 주장을 하면서 축구 국가 대표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는 권투로 세계챔피온이 되겠다고 권투 백을 옆에 끼고 열심히 도장에 다니기도 하였지만 부모님들의 강력한 만류로 운동을 포기하고 3학년 늦게 공부를 시작하였지만은 좋은 성적이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학원에 다니면서 3수를 해서 1980년도에 육군사관학교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꿈은 다시 장군이 되겠다고 변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남자로서의 커다란 꿈만 꾸어 왔던 저였고 또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육사 생도시절에도 축구를 잘하고 신체가 좋다고 선배들과 감독, 코치에게 뽑혀서 육사 축구 선수 생도로 있으면서 다른 1학년이 따로 연습할 때 저는 상급생과 함께 다른 실업 팀과 시합을 가지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나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온갖 자만심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또한 육사의 절인 호국사에도 드나들며 불교의 수계를 받고 법명도 '도길'(道吉)로 받았습니다. 그러한 나였기에 누군가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을 가로막고 " 세상에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나만큼은 절대로 믿지 않아 " 하고 자신 있게 떠들어댔습니다. 오히려 불교를 믿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석가모니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였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는 말씀처럼 저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저의 교만을 내리치셨습니다.

1학년 말에 저의 개인 문제로 80년 12월 8일에 육사를 도중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좌절과 실망에 빠져 버린 저는 그때부터 육군 사병으로 복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시련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고 왜 조물주는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가 하고 아무도 모르는 이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절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자살을 꿈을 가지기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입에 댔지만 술이 깨고 나면 그 괴로움을 채울길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나의 인생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고통과 한숨, 눈물의 병영생활이었습니다.

무당의 가정의 회심

그러던중 82년 여름에 성령의 강한 바람이 저희 가정에 강하게 몰아닥쳤습니다. 무당이었던 어머니가 몸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온갖 병에 휩싸이고 또한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당이 남의 병을 고치려고 굿을 하는데 오히려 무당 자신이 아프고 귀가 먹어서 사람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휫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또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서울대학병원을 비롯해서 용하다는 한의원, 수많은 약국과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귀가 안 들리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무나 붙잡고 자기 몸이 아프고 귀가 안 들린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시던 한 집사님이 기도중에 우리 무당의 가정을 구원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불같은 응답을 받게 되었고 매일같이 우리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무당과 예수쟁이와는 이야기할 상대가 아니지만 어머니는 너무나 괴로와서 집사님을 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 삼일만 자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간절히 부르짖으면 날것입니다 " 라고 하셨는데 그때 마침 저는 군에서 휴가를 나와서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 믿져봐야 본전인데 한 번 믿어 봐요. 그러다 안 나으면 믿지 않으면 되잖아요 " 하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가 너무 괴로와 하는 것이 안타까워 어느 절대자에게 의지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좋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때부터 병을 낳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저는 귀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교회 나가시기 전날 다락에 올라 가셔서 그동안 섬겨왔던 부처상을 내다가 삽으로 목을 치고 무당의 옷과 도구들을 불사르고 뒷뜰에 묻어 버렸습니다. 어머니 생각에도 한가지를 청산하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한 달 뒤에 외박을 나와서 어머니께 병이 낫냐고 물어 보았더니 낫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럼 그렇지"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삼일만에 수십년 해왔던 우상 숭배의 죄가 다 씻겨질 수는 없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제부터는 하루하루를 회개하면서 주님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그 집사님은 우리 형제들을 전도하려고 하였지만 누님과 여동생들은 집사님을 굉장히 핍박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이 전도를 하고 돌아가면 누님은 재수없다고 물을 뒤에다 끼얹었습니다. 마음이 더 강팎한 여동생은 소금을 그 집사님의 등에다 던졌습니다. 그러한 수욕을 받으면서도 김영숙 집사님(지금은 권사님)은 계속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누님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으니까 집사님은 울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님께서 "어른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줘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자 누나가 "그럼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가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게 해주신다면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나러 가자" 는 집사님의 말에 따라 그해 여름에 기도원으로 어머니와 집사님과 누나 셋이서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울면서 기도하는 것을 본 누나는 속이 메스꺼움을 느끼고 빨리 그곳에서 내려오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습니다. 그러다 억지로 하루를 버티고서 그 다음날 새벽에 전도사님이 찬송을 인도하는 도중에 갑자기 성령이 누나를 사로잡아 두 손을 번쩍 들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예수 믿는 것을 부인했고 집사님을 핍박했던 이전의 잘못들이 마구 쏟아지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예수님이 환상으로 비쳐지면서 수많은 은혜를 물 붓듯이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집사님은 너무 기뻐 울면서 3박 4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리고 한없는 은혜를 받고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을 올라갈때는 하나님이 어디있는가 하며 마지못해 마귀의 얼굴을 하고 올라갔던 누님은 내려올때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마치 천사와 같은 얼굴로 기쁜 표정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내려와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증거하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간증하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무당의 딸이 하루 아침에 변하자 놀라움을 표했고 많은 사람들이 누나의 뜨거운 전도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은 언니가 갑자기 변화된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고 그 언니를 변하게 한 귀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누나와 어머니와 집사님과 다시 기도원을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누나보다 더 강퍅했던 여동생 역시 기도 시간에 갑자기 '아버지' 소리를 터지라고 부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받았던 그 성령의 뜨거운 은혜와 은사들을 물붓듯이 받고 같이 울며 금식을 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변화된 두자매는 산을 내려오자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네에서도 무당과 두딸들이 변화되어 전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고난도 함께 주신다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이 쏟아졌습니다. 성경이란 성경은 모두 불사르고 각 방에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사진은 전부 찢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밤에는 식칼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위협하기를 ' 너희가 당장 교회가서 예수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찔러 죽이겠다' 고 위협하자 성령으로 충만한 두 딸은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차마 찌르지는 못하시면서 갖은 욕을 다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집안은 싸움이 일어났고 큰 소리가 나서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형제들과 어머니는 신앙을 버리지 않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는 날마다 부흥회가 일어날 정도로 눈물로 간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무당 아들의 회심

그러던 중에 저는 제대를 4개월을 남겨놓고 83년 2월에 마지막 휴가를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시집에서 남편은 사업 때문에 결혼 후 호주에 갔고 혼자 있는 누나에게 친정으로 휴가를 주었습니다. 저의 휴가 기간과 똑같았습니다. 성령으로 뜨거운 두 자매는 저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자신이 죽어지지 않은 저는 무조건 거절했습니다. 아직도 저의 자존심이 죽지를 않았습니다.

보름 휴가기간동안에 결국 억지로 교회 한 번 끌려가고는 전혀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부대로 귀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대에서는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이 되었는데 저 역시 출동 명단에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웬일인지 빠졌습니다. 그리고 잔류병력을 관리하기 위해서 다 모아서 저희 소대에 모든 병사들을 모아 팀훈련이 끝날때까지 대기를 시켰습니다.

고참인 관계로 책도 보며 음악을 들으면서 편한 잔류생활을 하였습니다. 음악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용필 노래를 주로 들었습니다. 군에서 별명이 '이용필'이라고 할 정도로 목소리를 가성을 내면 조용필 목소리와 비슷한 목소리로 육사시절과 군사병 시절에 조용필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독교 방송이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전에는 찬송가나 설교가 라디오에서 들려 올때는 몸에 알레르기 반응처럼 역겨웠는데 그러나 웬일인지 기독교 방송이 듣고 싶어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중보기도의 역사였습니다. 저희 누나와 여동생과 어머니가 이 아들을 위해서 매일 중보기도를 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방송을 켜니 그때 마침 저녁 8:00 에 하는 '새롭게 하소서' 라는 프로를 듣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들으니 재미가 있었습니다. 찬송이나 설교도 아니고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를 듣다 보니까 재미가 있었습니다. 며칠을 계속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휴가 기간 동안에 누나와 여동생에게 들은 전도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말씀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방송이 재미있어서 재방송까지 듣게 되었고 오후 4시에 하는 '찬양의 꽃다발'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루 이틀...열흘 정도까지 들으면서 저는 무엇인가 알 것만 같은 마음이 들면서 20일 정도 팀훈련이 끝날 때까지 계속 듣고 나자 " 아 !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 는 엄청난 확신이 저의 온몸에 꽉 들어차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일생 일대의 나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자 다른 병사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병사들이 훈련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해서 훈련에 쓰였던 군장비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옆자리의 전축을 틀었습니다. 그것은 조용필 노래도, 팝송도 아니었습니다. 찬송가였습니다. 병사들은 제가 찬송가를 틀으니까 수군 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전도를 받으면 '내 주먹을 믿지' 하고 자신있게 떠들던 이병장이 팀스프리트 기간동안에 이상하게 변하 되었다고 자기네 끼리 속삭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도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사랑을 전할 것인가 ? 주님 내게 지혜를 주세요.'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날밤 부터 보초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모든 병사들에게 커피를 끓여 주었습니다. 1시간에 2명씩 저녁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외각 보초를 서고, 불침번이 4명, 합해서 하루에 20명의 보초들에게 커피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커피를 주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한 구절도 몰랐지만 오직 무당이었던 우리 어머니와 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야기, 팀훈련 기간 동안에 내가 변화받은 이야기를 증거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놀랍게 증거 한지 이틀만에 소대원 30명중 20명에게 결신하게 하셨고, 저를 완전히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병사들과 식사하러 가면서, 식사하면서, 식기 닦고 오면서, 성령께서는 저에게 전도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무당의 아들이 졸지에 누나와 여동생에 이어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지혜를 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고, 밤마다 우리 소대는 취침기도가 실시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밤에는 우리 소대 뿐만 아니라 항상 기다리고 있는 심방자인 다른 소대 보초자에게도 커피를 가져다 주면서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다른 소대 병사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중대가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터 우리 소대는 차와 음악(찬송가)이 있는 '할렐루야 다방'이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신병들이 오면 반드시 저와 신앙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쉽게 주님을 영접하여서 왜 당시에 고참이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인가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저희 마음 속에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몸바치기로 결심하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화로운 꿈을 꾸었던 저에게 주님은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셨고 저 역시 눈물을 펑펑 쏟고서 겸손히 순종하였습니다.
저는 제대하는 마지막 날까지 커피를 병사들에게 끓여 주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인생의 공백이라는 군생활이 저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어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83년 6월에 제대하기 전에 군목님을 통하여 특별세례를 받게 되었고 7월 말에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대하기 1주전에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전국청년 대 금식성회'에 참석해서 성령의 은혜를 더욱 더 충만히 받고 마침내 제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직 아들이 제대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 귀신을 우리 집안에서 쫓아내야 되겠다고 벼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대한 아들은 아내보다, 딸들보다 곱배기로 예수에 미친것을 아시고는 아버지는 너무 너무 기가막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을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아버지도 빨리 예수 믿기를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업을 다시 준비하면서 동네에 있는 부개동 교회(담임목사 최웅진)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와 백일 한 끼를 금식하면서 조금씩 준비하였습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생활 1년도 안된 나에게 중등부 교사와 찬양대 직분을 맡겨 주셨고 청년회에서도 신앙부장으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학업도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입학하게 하였습니다. 청년회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서 신학을 하기 전에 먼저 철학을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되는 것을 포기했는 줄 아시고 1원 한푼 주지 않던 분이 등록금을 주시고 핍박도 줄어 들었습니다.
더구나 누나는 남편을 따라서 호주에 이민을 가서 간지 1개월도 안되서 호주 시드니 방송국에 나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모든 교민이 듣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고 하면서 눈물로 주님께 감사를 돌렸다고 합니다.

여동생 역시 누님이 호주로 불러서 간지 1년만에 영국사람과 만나서 영국가정에 시집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당의 딸들을 예수 믿고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중앙대 캠퍼스에서 전도

이제 예수를 믿고 본격적인 전도자로서의 훈련과 실재적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85년에 중앙대 철학과를 입학하고 나서 보니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뜨거운 형제, 자매들이 약 150명이 모여서 오로지 캠퍼스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전도하는 것이였습니다. 중앙대학교 기독학생연합회(S.C.M) 학생 회원들이 이었습니다.
원래 중앙대가 미션스쿨이었으나 채플이 없어지면서 순수한 기독학생으로 남아서 그 전통을 이어오면서 최재선 박사(중앙대 사회과학대학원장, 선한교회 담임목사), 홍관옥 사모( 신학박사, 여성 선교 교육원 원장), 이제훈 목사(중앙대 교목)의 헌신적인 지도 아래 정말 뜨겁게 캠퍼스의 복음화를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있었습니다.

1학년 입학하자 마자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내게 신학대학을 먼저 가지 않고 이곳을 오게 하셨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독학생회에 가입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종으로서의 훈련을 철저하게 받게 하셨습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수업을 받기 전에 아침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때는 점심기도회 저녁에는 1주일 내내 경건의 훈련 모임이 이어졌습니다. 월요일은 Bible College, 화요일은 학년별 모임, 목요일은 찬양대 연습, 금요일은 기독학생회 정기적인 예배 모임 등으로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이 인천인지라 매일 아침 8시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학 4년을 아침을 거의 금식하면서 기도회를 참석하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신앙생활 얼마 하지 않은 나에게 하나님이 이러한 엄청난 믿음의 훈련의 장을 마련하시고 훈련받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여서 더욱더 열심히 참석하게 되었고 기독학생들과 거침없이 캠퍼스 곳곳에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강의실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수많은 불신 학생들에게 다가가 전도하였으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간증을 적극 활용해서 전도할 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무당이셨고,우리 할머니도 무당이셨고, 우리 누나는 점쟁이가 3대째 무당이 된다고 점을 쳤던 가정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축구 국가 대표, 권투세계 챔피온, 장군의 꿈을 가졌던 사람이였다고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무당이 예수를 믿고........
'
그러자 학생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도되었습니다. 하도 기독학생들이 열심히 전도하니까 나중에는 학생들이 벤치에 앉는 것을 두려워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같은 1학년이지만 연장자인 까닭에 동기들을 리드하게 되었고 약 60명의 동기들과 다른 기독학생 선배들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캠퍼스에서 뿐 아니라 기차에서, 버스에서 거리에서 기독학생들이 가는 곳곳마다 찬양과 전도는 쉬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경찰들이 데모하는 줄 알고 30여명의 경찰에게 둘러싸여서도 용산역 근처에서 찬양하며 전도한 적도 있습니다.

매년 5월에는 '인생 문제 대수련회'라는 전통적인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2박 3일의 수련회 일정을 마련하고 캠퍼스의 뭇 영혼들을 초청하여 구원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집회에서만 매년 2-300명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생되는 놀라운 행사였습니다. 이를 기독학생들이 준비하기 위하여 학기 초 부터 연쇄금식 기도와 릴레이 기도, 끊임없는 전도 ... 등으로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신음하였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는 낙도 전도여행을 실시해서 학기 중에 훈련받고 전도했던 것을 일주일 낙도 전도 여행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감사하여서 죽도록 충성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하였더니 대학 3학년 때는 기독 학생 연합회 42대 회장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한 번도 반장이나 회장이 된 일이 없던 저에게 이러한 자격을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 말씀, 전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캠퍼스 4년동안에 성경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 제자훈련, 찬양훈련 등을 철저하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됬었으며 그 훈련받은 것을 내가 섬기는 교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85년도에는 기독교 방송을 듣고 변화 받은 것에 감사하여 간증 수기를 보냈더니 방송국에서 요청이 와서 내가 듣고 변화 받은 ' 새롭게 하소서' 에 나와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고은아 집사, 민창기 권사의 사회로 간증을 하게 되었고 86년 1월에는 앵콜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음을 마음 깊이 깨닫고 감사로 영광 돌리고 있습니다.

교회봉사

제가 처음 다녔던 교회는 83년 3월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7월에 제대하면서 부터 출석했던 인천 부평에 있는 부개동 교회( 합동측, 한남노회, 담임목사 최웅진 ) 였습니다. 4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교회로 재적 1300명에 출석교인 1100명 되는 노회에서는 규모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84년도에 청년회 신앙부장으로 성가대원(테너)으로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였는데 중앙대 입학하는 85년도에 교회 생활 1년 반 뿐이 안된 저에게 청년회 회장, 주성가대 총무, 중등부 교사의 너무나 큰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예수 믿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저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한 것뿐이었는데 .....

그저 그때는 새벽기도 자리는 어김없이 나와서 부르짖었고, 교회의 맨 앞자리는 항상 ' 내가 지킨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주 찬양대인 가브리엘 찬양대는 60명의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져서 대예배에 봉사하게 되었는데 사랑과 화합, 단합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원들이 열심히 잘 따른 결과 그 이후로 89년까지 5년 동안을 총무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청년회장을 맡아서는 오직 주제를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로 정하고 선교, 봉사, 구제를 목표로 청년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교사로서 중등부 3년, 고등부 3년을 봉사하였는데 받은 은혜가 감사하여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중대 기독학생회를 통하여 배운 찬양으로 청소년들을 키타를 치면서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찬양이 별로 없어 썰렁했던 학생회가 뜨겁고 기쁜 찬양을 하게 되자 매우 분위기가 좋아졌고 학생들도 매우 좋아하면서 열심히 찬양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열매들은 고등부를 3년 교사로 봉사하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중등부 3년 교사를 마치고 고등부에 가보니 찬양이 전혀 없이 썰렁한 분위기 그 자체였습니다. 출석 인원도 87년도에 80명정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키타를 들고 찬양을 인도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기쁜 마음으로 함께 힘차게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전도팀을 조직해서 노방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부평역에 나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격주제로 실시하고 참석하는 인원도 15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참석하는 인원이 늘기 시작했고 전도 드라마팀, 율동팀, Road Dancing , 수화 찬양팀을 조직해서 그들을 훈련( 중대 기독학생들이 지도)을 시키고 전도대열에 참여했습니다. 주로 우리의 전도 무대는 부평역이었는데 역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넓은 광장에서 악기를 동원해서 예쁜 유니폼을 입고 힘차게 찬양하며 율동과 드라마, 전도 댄싱, 수화찬양등의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너무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전체적인 지휘와 찬양인도를 하면서 마지막에는 마이크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간증 ' 우리 어머니는 무당...' 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초청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예수 믿게 다고 고백하는 사람, 박수를 치는 사람...

전도대열에 참석하는 학생의 수도 점점 많아져서 20명, 30명, 60명 까지 전도 인원이 늘어났고 격주로 실시하던 전도가 매주 실시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퍼져서 여러 교회에서 우리 학생회와 함께 전도를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과 문학의 밤등의 잔치에 드라마팀, 댄싱팀, 수화찬양팀등을 초청하는 제의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전도 요청에 따라 여의도 광장으로, 안양으로 다니면서 여러 교회와 함께 연합으로 전도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고등부의 학생회는 놀랍게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87년에 80명이던 인원이 88년에 120명으로, 89년도에는 출석 인원이 200명을 돌파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당시 고등부 지도하셨던 전도사님께서 사업을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설교만 하시고 나머지는 고등부 총무선생이였던 부족한 저에게 일임하셔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총신대학원 재학

중앙대를 졸업하고 89년에 마침내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입학하였습니다. 이제 비로서 주님의 종으로 신학적인 훈련에 임하였습니다. 선지 학교에서 귀한 신학훈련을 받는 중에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전도사님들이면 평신도보다 더 기도도 뜨겁고 찬양도 기쁨으로 부를 줄 알았는데 예배시에 드리는 모습은 저의 기대를 못미쳤습니다. 예배 전에 찬양을 부르는 것도 한 두곡 정도 예배를 준비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가 기독학생회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우리 고등부 학생들과 찬양을 드리는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격적으로 온맘과 영혼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은 단지 예배를 준비하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양중에 거하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체험하고 홀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수님이 오시전에 키타를 들고 교단에 서서 함께 전도사님들과 찬양을 불렀더니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반이 예배를 인도할 때는 미리 준비한 찬양 유인물을 나눠주고 앞에 나가서 약 15분동안 경배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 너무 좋다는 반응들이었고 다른 반이 예배를 인도할 때도 저에게 찬양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원우회에서 정식 찬양인도자로 임명하였고 저는 매일 예배전에 15분동안 찬양인도를 맡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뿐 아니라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는 경배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힘썼습니다. 그리고 1년에 두번 개학하기 전에 있는 수련회 찬양을 인도하면서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뜨겁게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91년 1학기까지 약 2년 반 동안을 매일 드리는 채풀과 수련회중에 찬양을 인도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또 1학년 2학기때는 생각하기를 ' 왜 신대원에 여러 모임이 많고 성경연구하는 그룹도 많은데 전도하고자 하는 모임을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드디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전도단을 조직하였습니다. 1학년이 전도단 단장을 맡는 자체가 좀 선배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졌지만 선배들은 기꺼이 함께 협력하였습니다.
너무나 뜨겁게 주의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고 신대원 학생들이 전도대열에 참석 하였으며 마침내는 신대원 원우회에서 적극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신대원 3년 동안 방학을 제외한 매주 금요일 오후시간에 전도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에게는 신학훈련과 더불어 계속해서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셨습니다.
3년동안 전도단을 이끌다가 또 뜨거운 후배들이 있어서 그들이 전도단 봉고차까지 구입해서 계속해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교회개척

그후에 원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전도와 찬양의 사역을 3년동안 사역하다가 마침내 95년 11월 18월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믿음의 교회를 개척하여서 열심히 주의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아기와 사모하고 단독택지 지하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리고 나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1년이 지나면서 50명의 성도로 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첨단 멀티미디어를 동원한 무료 영어교육을 개척초기부터 실시하며, 화정동의 각아파트 단지를 돌아가면서 60세이상 노인들에게 한방무료진료를 실시하고, 크로마하프를 사모가 지도하여 16명의 성도들이 뜨겁게 하프를 연주하고 찬양하며, 97년도 부터는 무료 수지침 강습과 한지 그림공예 강습을 주부들에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보다 이웃에 큰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한달에 한 번씩 주일 저녁예배는 우리끼리 드리는 예배에서 소외당한 이웃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온 교우들이 어린이로 부터 장년에 이르기 까지 양로원, 고아원, 장애자 보호소, 군부대,,, 등을 찾아다니면서 움직이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께 받은 큰 사랑을 나누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성도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말씀을 가지고 두손에는 과일과 옷가지를 들고 매달에 한 번 위로예배를 통해서 큰 신앙의 감격과 기쁨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당아들을 구해주시고 목사되게 하시고 교회까지 세우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억만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하는 작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인원이 많아지고 각 기관들이 조직이 되면 더 많은 성도들이 기관별로 흩어져서 뜨거운 사랑을 내 이웃에게 펼칠 것을 그리면 지금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오직 내 목숨은 이미 거저 사는 목숨으로 알고 생명받쳐 내 이웃에 주님의 복음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분골쇄신 하리라 조용히 기도해봅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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