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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목회자 사모 간증수기 공모(장려상) 원고

첨부 1


- 베푸는교회 목사사모 : 조영아

1. 노인복지에 대한 동기와 열정

새벽예배를 마치고 세평 남짓 되는 사택 부엌에서 노인들 에게 드릴 반찬 만드는
소리로 아침을 연다. 탁탁...삭둑삭둑...탕탕...지글지글... 보글보글...지지직~

“주님! 제가 하는 이 반찬 들을 맛있게 만들도록 도와 주시사 사랑과 정성을 들여 만든 이
도시락을 모든 노인들이 맛있게 드시고 소화도 잘 되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기도하는 맘으로... 찬양을 흥얼거리며 미소를 머금고 기쁨으로 이 일을 감당 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병들었거나 거동이 불편한 지체 부자유 독거노인들의 많이 부족 하지만 친구가 되어드리고
머리도 깎아 드리면서 청소와 빨래 ,그리고 반찬 다섯 가지와 국 한 가지씩 담긴 도시락을 들고
자원봉사자 몇 명과 함께 재가 복지라도 하게 된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이 일을 통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몸으로
무언의 복음을 전하게 됨을 감사드린다.
열악한 환경 속에 거주하면서도 자존심도 있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 못지않게 아름다운 분들이다.
만나는 횟수를 거듭 할수록 정이 들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미안 해 하고 자존심 상해하시던 분들이 마음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주시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산나물이나 채소를 얻은 것이라도 뭔가 주시고 싶어 하는 모습 보면서 찡한 감동을 느낀다.
그들 중에는 알콜중독자,치매노인,앉은뱅이,맹인들도 있어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시는 분들 대부분이어서 맘이 참으로 아프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문 밖 까지 전송 나와서
손 흔드는 모습에서 가족애를 느낀다.

7,80대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와 6.25를 겪었고 보릿고개를 넘겼으며 산아제한 없이 많은 자식들을 낳아
공부시키느라 허리띠 졸라매 가며 당신들은 못 먹으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며 고된 시어머니
시집살이 까지 한 분들이지만 정작 당신들은 버림받아 자녀들의 보살핌 없이 말 그대로
현대판 고려장의 실체를 보는 듯 하여 가슴이 아린다.
무엇보다 개척교회에서 감당하기엔 그 수효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 나를 안타깝게 하고 씁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어서 함께 수용하여 아름다운 노인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싶어 15년 전부터 계획해오고 있었는데
그 결실이 올해야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무지 행복한 우리 목사님과 나는 미리 준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 찬양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냥 목회만 하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는 분들도 있지만 노인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었다.
농촌목회만 사명으로 알고 목회한지 24년차인 나는 그동안 개척교회만 주로 맡아서 목회를 했다.
물론 도시 목회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농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앞서서 도시로 나갈 수가 없었다.
키워놓으면 도시로 도시 로 다 나가 버리는 모판교회의 농촌 실정에 맞춰보느라 반주자 양성을 위해
피아노도 가르쳐보고 미술지도도 해 보았다. 그러나 중학교만 들어가면 공부해야 한다며 교회에 못 나가게 하는
엄마들 때문에 서운한 적도 많았고 맘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인사 불교문화에 익숙해 있는
이곳에서 뭘 해야 제일 적합할지 생각 하다가 내가 전공한 어린이 목회(선교원)도 만6년 간 했었다.
물론 ,영리목적이 아닌, 예배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자존심 있는 어린이 선교를 실비만 받고 운영했었다.

처음에는 부작용도 많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여러 가지 특별한 커리큘럼으로 맞서며 복음을 전했었다.
젊은 엄마들은 보내고 싶어 하고 노인들은 절대 반대한 집도 있었지만 시골에서 보기 드문 목요일마다
현장학습을 통해 만지고 느끼는 교육과 함께 피아노와 리더십교육을 통해 차츰 인정받아 많은 아이?1000湧?몰려들었고
그 결실로 인해 우리교회 교인이 된 사람도 더러 있으며 주일학교와 연결하여 계속 출석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또 도시로 이사 간 아이들 중에 부모로부터 매년 스승의 날이면 감사하다는 전화와 편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늘 가슴에는 뭔가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건물에 비한다면 기초공사인 유아교육이지만
부실공사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한하면서도 아이들은 주일학교를 통해 복음을 접할 기회가 많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룻밤에도 영원한 안녕(아듀)을 하게 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영영 가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손이 다 미치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내가 있는 위치에서

제일 적합한 일을 효율적이면서도 복음 중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고 그 일을 진행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리라...
노인복지 일에 관심과 비전을 갖게 된 동기는 거제도에서 개척할 때의 일이다.
어떤 목회자는 한 교회에 오래 계셔도 장례식을 한번도 안 치르고 임지를 옮기기도 하는데
그와 반대로 어떤 목회자는 평균 매달 한 건씩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참 많이 다르구나
생각했었다. 얼마나 장례식 설교도 은혜 스럽게 하시든지.....
우리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개척하여 전도한 사람이 죽어 장사될 때 모든 식구가 찬성하여 기독교 장례를
원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친분이 가깝고 분위기가 엄숙하기 때문에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므로
생각보다 훨씬 전도하기 쉬운 법이다. 실 예로 선천적 심장판막증으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젊은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죽어서 고향에 내려와 장례를 치르는데 친구들이 술을 먹고 와서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찬송)를 부른다고 시비 걸던 청년하나가 장례식 예배에서 은혜 받고 회심하여
지금 목사님이 된 분도 있다.

목회하면서 제일 힘들고 맘이 무거운 게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중에 자살을 하는 경우와 믿긴 믿었어도
가족들의 반대로 유교식 장례를 하게 되었을 경우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잘못이 목회자에게 있는 것 같아 책임감과 함께 자책하게 된다. 좀 더 자주 찾아가서 구원을 시켜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했노라고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생명 영혼 사랑이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도 있다. 어느 집사님이 땅을 사주어서 개척교회를 돼지막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동네에 병명을 알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복음을 받아들여 아픈 몸을 이끌고
5분이면 올수 있는 거리를 20분씩 걸려 오르막에 있는 교회당으로 와서 믿음생활을 시작했었는데
순수하고 심성이 착한 사람이어서 신앙심도 또한 신실했다.
그렇게 병난 지 6년 만에 거동 못한지 만 2년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자녀들이 여럿 있었지만 아들 하나 만 믿었으나 고인이 생전에 기독교장례를 원했기 때문에 기독교장례를
치르기로 가족회의에서 결정이 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좋았었다. 그러나 죽은 시신에 옷을
입히는 염을 아무도 안 하려고 했다.
그녀는 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병을 앓고 있었고 오래 누어있었으니 욕창이 심해서 누구든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30대 초반이었으니 들어본 적도 한번도 해 본 일이 없는 일을 두고 기도했었다. “하나님 제게 담대함을
허락하셔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은 내게 즉시 담대함을 허락하셨고 나도 모르게 내가 하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하얀 장갑을 끼고 소독약을
세숫대야에 담아 남편(그 당시 전도사님)과함께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딸들이 도우러 왔었지만 우느라고 정신없었다. 그녀의 육신의 걸친 옷을 가위로 잘라내고 알코올로 조심스럽게
닦아 내려가는데 잠시 이상한 기분이 스쳤을 뿐 더럽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이 병이 아니었으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미 하늘나라에서 안식하고 있을 그녀의 영혼이 너무 귀하고 고마웠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절차를(장례식) 위해서 전도사님도 나도 최선을 다했다.
등과 엉덩이에는 욕창 때문에 심하게 움푹 패었고 그것을 보고 딸들은 소리치며 울었지만 난 울지 않았다.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안식할 것을 생각하니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염을 다하고 난 후 입관을 하고
소독약을 뿌리고 방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젊은 사람이 ?1000遊?하데이~~~” 내 속에 계신 성령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은혜라- 그랬다. 아버지 하나님이 하겠금 하셨다.
그 일을 시작으로 2년 사이에 하나님은 내게 특수훈련을 시키셨다.
산 생선도 못 만지는 내게, 그것도
30대 초반에 다섯 구의 시체를 만지게 하셨다. 또 젊은 새댁이 심장판막증이 있었는데 절대로 아기를 낳으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6살이나 연하의 남자와 동거하다가 임신을 하고 고향에 내려왔는데 엄마가
지우라고 아무리 말해도 꼭 낳겠다고 했고 7개월부터는 숨이 차서 엎드려서 꼬박 밤을 새우면서도 아기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먹고 싶다는 것은 다 사줬다.
9개월까지는 버텼지만 배가 불러오자 더 이상은 안 되어 병원을 찾았고 급하게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았으나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기는 나왔는데 합병증으로 산모가 급성 폐렴이 왔고 고열과 함께 가스가 차 올라와 혼수상태였다.
남편(전도사님)이 보호자와 산모를 급히 싣고 진주 경상대학교부속병원으로 가던 중 그렇게 낳고 싶어 하던
아기도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산소기를 꼽은 채로 집으로 싣고 왔는데..
무엇으로 위로를 해야 할지... 정말이지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시신을 닦으면서는
너무 불쌍해서 많이 울었다. 엄마 젖 한번 빨지도 못하고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른 체 새근새근 잠든 아기와
고아인 그녀의 남편이 너무 안 되서 눈이 붓도록 울었었다. “하나님 왜 좀더 살게 두시지 그러셨어요?” 하면서...
너무나 가난했던 그녀는 죽어서도 상여도 못 만들고 교회청년들이 들것을 만들어서 공동묘지에 장사지냈다.
그 아기는 아기 아빠와 외할머니 집에서 친권을 포기하고 아기 없는 사람에게 보내달라고 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식 없는 믿음이 좋은 부부에게 보내져서 지금 미국에서 잘 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아버님은 목사님 네 살 때 돌아가시고 산후 풍과 천식을 지병을 앓고 계시던 시어머니는 69세의 향년을
마치고 그만 돌아가셨다. 살아생전에 며느리 노릇 하느라고 했으나 형편이 늘 어려웠으니 제대로 모시진 못했다.
막내아들인 목사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랑 살고 싶어 하셨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내내 모시진 못했다.
멀리 계셔서 임종을 지켜보지 못해 사죄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몸을 내가 닦아드렸다. 그리고 막내아들(목사님)과
둘이서 옷을 입혀 드렸었다. 지금 까지 살아계시면 정말 해 달라 시는 대로 다 해드렸을 텐데...

그리고 또 다른 분들까지 다섯 구를 염을 하면서 짧은 기간에 아직 어린 내게 왜 이런 일(특수훈련)을 시키실까??
하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예사롭지 않은 사명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엄마랑 언니들도 이젠 그런 험한 일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안하면 안 되겠 끔 하신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분명 내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령 받고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아들은 중학생 때 이미 자기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여
특수목회를 하고 싶어 했다. 세상에는 우연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연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감동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음을 안다.
아들이 그런 생각 가지는 것도 내게 특수훈련을 시킨 일도 그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걸 난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장래일 을 두고 가족회의를 하는데 가족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모두 놀랐다. 그렇다 이미 우리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시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훈련시키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다시 한번 더 확실한 사명을 갖게 된 동기가 있었다.

핍박 속에서 믿던 내 어린시절의 고향교회에 엄마 같은 권사님이계셨다. 언제나 문 열어놓고 밥도 주시고
아버지한테 쫓겨나서 울면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던 권사님이 계셨는데 70중반에 위암에 걸리게 되었다.
누구나 암에 걸리면 그 사실을 수용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본다.
권사님도 처음엔 믿지 않고 부인하다가 다음엔 분노하고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하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하면서 원망하는 단계가 너무 오래가고 있어서 간호하는 며느리들이 시험에 들 지경이란 말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새벽종치는 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시간어기지 않고 치시고 개척당시에 기도도 많이 하시고
자기재산을 내어놓다시피 하여 어려운 교회 살림을 다 맡아 하시고 집을 오픈 시켜서 1000친교 하는 장소로 제공하시고
핍박 속에서 힘들게 신앙생활 하던 우리 모두에게 엄마 같은 존재여서 늘 감사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고통이 너무 심해 목뒤에 신경을 끊었고 아무것도 못 드시지만 링거를 통해 약을 투약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금요일 선교원을 마치고 밤 기차로 상경하여 한양대학교부속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권사님을 찾아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앓아누운 사람 같지 않게 살도 안 빠지고 얼굴색도 밝았다. “ 권사님 ! 늦게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하며 안아서 볼에 얼굴을 비벼 드렸더니 밀어내시면서 내게 “더러운 병이다 가까이오지마라” 하셨다.
난 더 꼬옥 안아드렸다. 그러면서 “권사님 저는 그동안 말로 표현 안했지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권사님의 기도와 보살핌 덕분입니다. 어머니 같은 권사님 감사하단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올수 없는 상황이지만 달려왔습니다. 사랑합니다. 권사님! 암은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일수록 많이 걸린답니다.
목사님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권사님 뭐가 두렵습니까? 이제 아버지가 부르시면 천국 갈 것인데요.
하나님이 상을 예비하시고 기다리시니 맘 편히 가지세요.” 하였더니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내게 찬송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래서 감동 오는 대로 내가 선곡을 하고 권사님과 함께 다섯 곡을 함께 메들리로 불렀다. 많이 편해 진 모습을 보면서
더 머물러있지 못하고 토요일 오후 기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도착하여 조금 있으니 임종하셨다고 전화가 왔다.
아무것도 못 드시고 오랫동안 노오란 물만 자꾸 울컥울컥 토해 내면서도 얼른 데려 가지 않으신 것은 권사님을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셔서 참 많이 기다려 주고 계신 것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자녀의 영이 최고로 기쁜 상태일 때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것을....그랬다. 오래도록 병원신세를 지면서도
아는 사람이나 교인들이 병문안 오는 것조차 자존심 상해하시며 자신에게 온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지만 부족한
나를 통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하신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내게 소리 없는 외침으로 말씀하시는 듯했다.

이 일로 노인복지의 중요성과 함께 어떤 신학교보다 어떤 선교 단체 못지않은 노인복지를 통해 많은 노인들을
구원하도록 이 일에 더 큰 사명감과 비전을 갖게 하시는 주님의 맘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행복한 노년......
죽음이 두렵지 않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살아가도록 복음적인 공동체로서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가는 노인들의
친구이고 싶어졌다. 이열정은 날이 갈수록 내 가슴에서 더욱 뜨겁게 타 오른다.
7,80대 노인들이 젊을 때 너무 못 드시고 고생해서 골다공증이나 관절염으로 모진고통을 받고 있으나 속속들이
알아주는 자녀 없이 그렇게... 그렇게...기대하지 않고 적당히 포기하며 살아가시는 분들을 우리가 그것을 몰라준다면
나쁜 자식들일 것이다.
지금은 주름이 깊게 패이고 햇볕에 그을려 고통스런 검은 얼굴의 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젊었을 때는 얼마나 잘
생기시고 예뻤는지 짐작 이간다. 언젠가 내가 스무 두 살 이었을 때 어느 할머니가 날보고 “아가 참 피부가 곱데이~
아이고 지금은 이리 볼품없어도 나도 옛날엔 피부 좋다고 그랬느니라” 하시기에 빤히 쳐다봤더니 깊게 패인 주름이며 검버섯이 얼룩얼룩하고 고통스런 인상을 보고는 “에이~~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처럼은 아니었겠다....”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밖으로는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40대 들면서 그 할머니 생각이 자꾸 나는 건 왜일까? 실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곧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지금 곧.....♥

재가 복지 실무를 하면서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다. 어떤 할머니는 딸만 넷을 낳았는데 다 출가하여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자주 찾아오곤 했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들자 서로 미루고 영세민으로 만들기 위한
빌미로 재산을 다 팔아 나눠 가지고 간 후 어머니가 병들어 앉은뱅이가 된 후엔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않는단다.
세상에...딸이 넷이면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돌아가며 반찬도 해다 주고 청소도 해준다면 그 지경은 안 되었을 것이다.
발 디딜 곳조차 없는 환경에서 죽지 못해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집은 홀어머니가 침해가 왔는데 자녀가 일곱인데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집도 있다.
아들이 보고 싶어서 아들 사는 지명을 자꾸 들먹이며 옷을 차려입고 자꾸 아들한테 간다고 하는걸 보면 그 맘에도
정신은 놓았지만 얼마나 아들을 그리워하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밥도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밥통에 밥은
선 밥이라 먹을 수가 없고 녹슨 그릇들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고 신을 신고 방에 들락거려서 이불과 겨울1000옷 여름옷이
범벅이 되어 있고 장롱속의 옷가지들은 방바닥에서 뒹굴고 찬장의 그릇들은 장롱 속으로 가 있고 참으로 너무나
처참하기 까지 한 현장을 보면서 맘으로 많이 울었었다.

그 뿐만 아니다 할아버지 혼자 사시면서 지병으로 끙끙 앓고 계시면서도 우리 더러 빨래도 못하게 하시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시는 멋쟁이(?)할아버지...그리고 장님으로 방에서 똥 오줌 싸는 분도 계시고 관절이
굳어서 앉아서 밀고 다니면서 신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하는 분도 계시다. 정신지체로서 온 가족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집도 있다.
긴병에 효자 없다 했는가? 그들 모두 자녀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이웃들까지도 무관심으로 면역이
되어있다. 친정엄마를 보면 노인들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만 매운 것을 드셔도 기침이 나오고 국물 있는 것을 드시면
자꾸 콧물이 나오는 분들도 있단다.
당신 스스로 주책스럽게 생각해서 같이 식사를 할 때면 미안해하는 노인들을 보면 우리 모두 당연히 그렇거니..해야
함에도 더럽다고 같이 밥 못 먹겠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62억 인구 중에 자기 분야 외에 성격이나
감정조절이나 어떤 부분에서는 미숙아로 어릴 때 그대로 멈춘 사람이 대분분이라고 전문가는 말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 성장과정과 환경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말하자면 극소수만 빼고는 어느 한부분에서는 모두가 철이 안난 어린애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결핍이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기위해 위장된 관심 끌기로 모두들 피곤하게 만들고 노인이
되어 치매가 오면 그런 쪽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냉철하면서도 아주 의젓한데 분노가 일어나면
자제능력이 없어서 극한 상황까지 가서 자살을 기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꾸 기회가 줄어드는 노인들을 위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재가복지는 한계가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된 죽음을 맞도록 모든 노인들이 행복한 노년이 되도록 속히
복지원을 허락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주님! 제게 폭포수와 같은 사랑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이 사명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저와 우리 목사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폭포수 같은 사랑을 가지고 의지
할 데 없는 불쌍한 노인들에게 퍼서 나를 수 있도록 아름다운 복지동산을 속히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
하고 기도했던 것이 올해 와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일을 통해 너무나 세밀히 함께 하시는 놀라운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만났다. 10년 전에 하나님이 의왕에
언니를 통해 주신 작은 땅이 있었다. 그것도 어느 목사님을 통해 법원에서 여섯 번이나 유찰된 땅을 싼값에 살수가
있었다. 10년 만에 비전이 같은 안수 집사님을 만나 땅도 보지도 않고 사주겠다고 하여 작년 10월에 땅을 보러 다녔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한곳에 갔는데 기도한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남편(목사님)과 나는 깜짝 놀랐다.
기도할 때 첫째, 물이 풍부한곳 둘째. 길이 있는 곳 셋째. 전기가 들어와 있는 곳 넷째. 남향이면서도 전망이 좋은
아늑한 곳 다섯째. 이왕이면 선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있어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었음 하고 애교로 마지막
다섯 번을 구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그대로 다 있었다. 특히 30년 된 소나무 숲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여 이 땅은 우리 땅입니다 ” 하며 땅을 밟으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가격이 맞지
않아 흥정만하고 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경기가 나빠졌고 급히 팔려고 내어놓은 땅은 쉽게 팔리지 않고
있는 줄만 알았다. 6개월이 지난 후에 들은 후문으로는 몇 사람이 사러왔는데 이상하게도 주인이 팔고 싶은
맘이 없더란다. 땅주인은 모 은행의 지점장이었는데 증권에 손을 대서 빚을 많이 졌고 그 빚 때문에 급히 팔려고
했었다 는데 갑자기 맘이 변한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 하신 것이기에 그 맘을 주관하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감사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보다도 더 감사한 것은 우리 앞서 3년 전에 부산에서 사업하시다가 보증을 잘못 서줘서
귀농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들 때문에 우리는 전기도 공짜로 길도 그저 얻은 셈이었다.
자조 지종을 들어보니 3년 전에 와서 컨테이너 박스에서 기거하면서 고생을 말도 못 하게 했단다.
전기를 밑에 있는 동네에서 끌어오기 위해 전봇대 하나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것도 길이 없어서 인력으로
전봇대를 일일이 박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림 훼손죄로 벌금도 수차례 물었고 행정적인 문제에 부딪치면서
길을 닦아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지 1000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앞서 그분들을 보내서 우리 길을 예비하신 것
이라고 생각되니까 감사+감격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비교가 좀 오버하는지는 모르나 예수님 앞서 세례요한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해 주신 것처럼 우릴 위해 그분들이 희생하며 우리 길을 예비하신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 어쩌면 그렇게 세밀히 예비하셨을까?

그리고 두 부부 성품이 얼마나 좋은지 좋은 이웃을 주심에 또한 감사드린다. 그 분들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치
못했으나 아들딸이 연세대학 또는 이화여대를 나와 이미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인과 결혼하여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전도대상이 되었다. 우리 목사님은 그분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모든 것을
물어가면서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목회일 외엔 일도 안 해봤고 착하기만해서 다른 일에는 무지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고생을 바가지로 한 대 선배이고 여러 분야에 박식하신 분들이라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 3월초에 계약하고 20일 만에 이전을 마쳤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계약 때부터 법무사나 변호사를 붙여주시고 형질변경이나 설계, 토목에 관한 행정일도
믿음이 좋은 장로님들이 맡아서 하시도록 하나님이 세밀히 함께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오시는 분들마다 이런 곳에 이렇게 좋은 땅이 있다니 놀랍다고 말한다.

수로 공사를 하는데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다. 모세의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포크레인으로 탁 때리는 순간
바위가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왔다. 지하수를 팔려면 돈이 적어도 5백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데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것도 수질검사결과 일급수라니...바위를 들어내고 깊이 판 후에 자갈을 넣어서 빗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시설을 그분이 다 해주셨다. 20미리 파이프에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물을 아껴야한다고 조절을 하여 필요한 만큼만 물이 나오도록 해 놨다. 이제 식구가 불어나도 물 걱정
뚝이다. 놀라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 감사밖에 드릴 것이 없다.
또 한군데 옹달샘이 바위 밑에서 흘러
나오는 물도 너무 차갑고 물맛이 좋아서 그 물을 먹은 후론 보리차를 끓이지 않는다.
그리고 염소를 키우기 위해 농수전기를 이미 우리 땅 연못에 설치를 해둬서 공사가 바로 시작 되도 전기
걱정이 없게 되었다. 이미 그 분들이 돈을 많이 투자하여 우리는 뭐든 거저 얻게 된 셈이다. 그 연못에는 오리
가족들이 와서 살고 있다. 또 농촌진흥청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관리가 잘 안 되서 공원으로
이사를 시키면서 청둥오리2마리, 싸움닭 한 쌍, 기러기 한 쌍, 칠면조 두 쌍을 선물 받았다.
복지원에는 필요할 거라면서 담당자로부터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가져왔다. 어떻게 아시고
여러 사람을 동원시켜 관심 갖게 하시는지 놀랍고 놀랍다.

그리고 10년 된 단풍나무(홍 단풍)도 군청에서 선물 받아서 심어놓았고 길을 내기위해 파내야하는 복지원 땅의
소나무를 가져가는 대신 면소제지에 건립된 노인복지관에서 또 단풍나무와 매실나무 모과나무를 열 그루를
보내왔다. 어쩌면 꼭 필요한 만큼 보기 좋게 어우러지도록 이렇게도 세밀히 아시고 다 예비하셨을까?

땅을 놀리기가 아까워서 밭을 일구어 21가지 채소를 심어 유기농으로 가꾸고 잇는데 농사가 너무 잘되어
또 많은 사람들이 놀랜다. 약도 비료도 안하고 있던 거름으로만 하는데 매일매일 달라져있는 밭을 보면서 또
감사드린다. 우리 집사님들은 놀라워하면서 언제 농사짓는 것을 배웠냐고 묻곤 한다.
이미 오래전에 이렇게 쓰시려고 우리 아버지로부터 훈련받았기에 가능한일이리라....


2. 핍박 속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핍박받으며 신앙 생활할 때 주일 아침이면 교회 못 가게 하시려고 어린 내게 밭을 매라고 명령하셨다.
그땐 일하는 사람이 몇씩 있을 때여서 내가 안 해도 되었건만 그렇게 시키시는 아버지 의도를 잘 알았기에
난 불평하지 않고 순종했다. 새벽기도 마치고 곧바로 밭으로 가서 밭일을 했었다. 빨리해야 교회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가속을 붙여 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밥을 굶어도 일이 고되어도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교회만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중3때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세례를 함께 받았던
나는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믿었었다. 쫓겨나기도 하고 얻어맞기도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교회 못나가게 하기위해 교회든 학교든 하나만 택하라고 중학교 입학할 때 내게 각서를
요구하신 분이시다. 양식도 몰랐던 어린 내가 각서를 써야 할 때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1000
훔쳐내며 어찌할 수 없이 빨리 써 오라 시는 아버지께 학교 가겠노라고 각서를 써 가지고갈 때 그 무력함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맛보았다.

하지만 교회 안 나가면 내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이 마음을 괴롭게 만들어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비가 오던지 바람이 불던지 기도하러 가고 싶을 땐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축복산 기도원에 갈아입을 옷만
챙기면 혼자서라도 칠 흙 같은 밤에도 갔다. 어떤 때는 휘파람새가 날아와서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쫓겨나서
차가운 교회 바닥에 엎드려 울다가 지쳐 잠이 들면 하나님이 따뜻하게 데운 구름이불로 나를 꼬옥 안아주심을
체험하기도 했었다. 저리 미친 데는 약도 없다하시며 애통해 하시던 아버지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늘나라로
가셨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대로 완고하기가 이를 데 없고
함안 조씨 가문의 모든 유교적인 것을 다 맡아 제실까지 우리 땅에 지어서 매년 큰제사를 주관하시며 지내 왔던
분이다. 아무도 우리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리라고 생각을 못했었다. 우리 집안에 조카들도 손자도 사위도
아들도 목사여서 수 없이 전도를 했고 이왕이면 부끄러운 구원 받지 아니하고 건강할 때 하나님 일 좀 하다가
하늘 나라가게 해 달라고 많은 자녀들이 기도를 해왔고 업어서 부흥회 예배에 앞좌석에 모셔놓기도 했지만
도무지 믿으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 하지 않고 계셨다.
결국에는 병이 들어서 고통 중에 계실 때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딸들이 하루 한 끼 금식하면서 40일 동안 작정기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진작 에 그렇게 할 걸 그랬지 싶었다. 작정기도 38일째 되던 추석전날 제사를 예배로 바꾸라는
전화를 받고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늦게 믿었지만 급한 대로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셨다.

처음부터 환상을 계속 보여주시며 믿음을 키워주셨다. 기도하면 안 아프고 기도를 안 하면 고통이 심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들을 키우시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껴왔고 너무나 교회 나오고 싶었던 엄마는 믿음이
하루하루 급성장했고 지금도 여든 여섯인 이시지만 건강하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신다. 많은 자녀들 때문에
기도시간이 길다고 하신다. 지금은 형제들 중에 목회자2명 권사2명 ,장로 안수집사 등등 교회에서 성가대지휘로
여러 가지 중직을 맡아 열심히 충성하고 있다. 아직도 믿지 않는 형제가 있지만 언젠가는 구원받으리라
확신한다. 이 일을 위해 좀더 무릎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3. 나를 포기하고 온전히 아버지께 다 맡길 때 까지

처음부터 목회 생활에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어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목회 안하려고 도망갈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철부지일을 고백하자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사형선고 받았던 남편이 보너스인생으로 탈바꿈 한지 얼마 안 되어서 신학교 1학년 때 만나
반대하는 결혼으로 둘 다 벌어놓은 돈 없이 책만 가지고 결혼을 하고보니 그 어려움이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방세를 아끼기 위해 교회종탑 꼭대기에 한 평짜리 조그마한 방이 있었는데 모로 누워야 겨우 잘 수 있는 공간에서
어머니를 모셔야 할 지경이었으니..그 모양새는 물론 그 힘든 상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교육전도사로
있던 교회에는 종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쇠로 되어 있었고 각도는 45도 아니 60도는 되어서 첫 아이를 임심하여
배가 남산만한데 정강이는 시퍼렇게 멍이 떠날 날이 없었다. 20대 후반에 홀로되신 어머니는 아들밖에 모르시는
분이셨다.

며느리한테는 사랑을 전혀 베푸시지 않으셨기에 그 갈등으로 인해 그 생활을 더 탈출하고 싶었다.
지금 같으면 다 이해 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철부지였던 나는 그때의 어머니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커서 세상으로 나간 그를 하나님은 폐결핵 말기로 죽음직전에 철저한
회개를 통해 성령의 불로 나음을 입게 하시고 특별한 소명을(꿈에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흰 고무신을
내밀면서 “너는 이제 이신을 신고 복음을 전하라”하셨다고 한다. )받아 목회길 에 들어선 남편에게 날마다 목회
그만 하고 돈벌어서 섬기는 일을 하자고 졸랐다.

남편도 나도 철이 덜난 때라 그러자고 합의를 본 날 저녁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했다. 갑자기 코로 입으로
각혈을 시작했고 밤새도록 그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에 떨며 회개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특별한 소명을 받아 목회길 에 들어선 남편을 제 욕심으로 그만두게 하려 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이젠 다시는 다른 마음 먹지 ?1000歌黴윱求? 용서해 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 세요” 눈물로 남편도
나도 회개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은 남편은 쑥물을 마시고는 각혈이 멈추었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철저히 회개한 후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너무 힘이 들어서 (사실은 내가 깨어지지 않아서
훈련이 길어지는 것도 모르고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지혜롭지 못했고 성령하나님의 인도 따라 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결혼 전에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결혼하느라 잠시 쉬었다가 남편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미술원을 개원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를 조달했고 그러면서도 맘에 기쁨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지 2년 만에 다른 교회로
임지를 옮겨서도 또 도망치려 했다. 피아노나 가르치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또 변심했었다.
그 일을 하나님이 모르실리 만무했다. 그날 밤에 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몰아닥쳤다. 손님이 많이 오신다고 해서
커피 포터에 물을 8부를 넣고 끓이는데 정전이 되면서 젖 먹던 둘째가 전기선을 잡아 당겼고 펄펄 끓고 있던
물이 어디서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앉아서 당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택시를 잡아서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이미 병원에 도착 했을 때는 3도 화상이 되어
있었다. 백일 밖에 안 된 둘째는 너무 많이 데여서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탈수가 심해서 링거를 꽂을 수가 없어서
간호사와 아이 간의 사투가 벌어지고 내겐 너무 긴 시간이 흐른 후 아이가 목이 다 쉰 다음에야 겨우 이마에
꽂았었다. 그동안 아이 우는소리를 도저히 들을 수가 없어서 귀를 틀어막고 화장실에 엎드려서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주님 이젠 정말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아이만 살려주십시오. 아버지여~흐흑~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여~~~항복 합니다~~”
나도 아이도 왼쪽에 3도 화상을 입어서 한 침대 누워서 틈나는 대로 회개하였다.
참 미련스럽기도 하지. 내 방법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고 무릎으로 살지 못했다. 옛날에 받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지 못했었다. 그 댓 가는 혹독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사명)를 던졌을 때
무서운 뱀이 되어 모세를 물려고 덤볐던 것처럼 ..여름이면 짧은 소매를 입지 못하는 것으로만 불순종의 댓가를
치르도록 많이 봐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얼굴이나 보이는 곳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다면 어쩔 뻔 했는가?
남편도 나도 이렇듯 시행착오를 수차례 겪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남편은 막내로 태어나서 어리광 기질이
남아있어 내게 엄마 같은 모습을 원했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서 어른스런 모습을 기대하다보니 서로 식성도
너무 다르고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하나 되는 데는 만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강사님이 사모들 손 들으라고 하셨고 일어서게 한 다음 야단을 치기 시작하셨다. 당신들이 잘나선 사모로
세운 줄 아느냐? 남자들은 잘한다고 하면 칭찬받기위해서 죽을둥살둥 열심히 하는데 못하는 것만 꼬집어서
말한다고 하시면서 일류 비서될 자신 없으면 사표 내라 하시면서 호통을 치시는데 사모가 서너 명은 되어
보였지만 그 날은 미련한 날 위해 특별이 연 집회란 생각이 들자 눈물이 강같이 흘렀다.

그랬다. 나는 지혜롭지 못했다. 잘하는 것은 말하면 교만해서 우쭐거릴까봐 말 못하고 실수하거나 잘못하는
것은 잊어버리면 말 못 할까봐 즉시 말해버리는 못난이였다. 나는 변하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문제만 찾아보려
했으니 얼마나 이기적 이었던가? 그날 나는 철저히 깨어지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늘 성령 하나님께 묻고 인도 하시는 대로 순종했다. 만 2년 동안 남편을 미워하고 사명 감당
안하고 불순종했던 나를 용서해 달라고 철저히 눈물로 회개했다.
만2년이 되자 눈물을 거두어 가시고 애교는 낙제였던 내가 내 생명 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날마다 나도 모르게 “여보 사랑해~”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래면서도 하루에 10번씩 사랑한다고 고백해 오고 있다.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은 안하면
더 이상 할 만큼 익숙해 졌다. 내가 변하니 남편도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애를 많이도 먹였던 날 꼭 닮은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 되게 하는 것 같다. 그 일 후엔 아무리 힘들어도 순종 감사만 내입에서 나왔다. 교회당도 없이
돼지막사에서 예배드리며 비가 오면 자리를 옮겨가며 바람불면 비닐로 막아서 예배를 드렸지만 오직
감사할 뿐이었1000다.
개척을 한다고 힘든 게 아니라 내가 깨어지지 않아서 힘든 거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다 맡길 때 비로소 아버지가 일하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4. 아이들을 키우면서 만난 여호와 이레 하나님

하나님은 내게 아들 둘을 선물로 주셨다
그 아이들이 벌써 다 커서 큰 아이는 24살(대학교2년 마치고 군복무중) 둘째는 22살(음악전공 중)이 되었다.
농촌목회, 그것도 개척교회 만을 맡아서 목회 해온 덕에 검소한 생활은 몸에 베여 있다. 거제도에서 개척할
때는 시장은 거의 못 가고 바다에 가서 해초나 조개를 잡아 반찬을 해서 먹었고 봄이면 산에 가서 산나물을
뜯어서 반찬을 먹었다.
바다에 가서 조개를 잡아오는 것을 보고는 동네 사람들이 놀라곤 했다. 왜냐면 거제도에서 태어났으니
관심이 있어서 워낙에 잘 잡고 많이 해 왔으니까.. 2년간 사례비 없이 목회 할 때도 밭에 채소를 심어서
온 교인들이 다 먹기도 했었다.

어릴 때부터 자연히 검소한 생활이 몸에 베인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참 놀라운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많이
만났다. 농촌목회를 모두들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녀 교육문제 이리라.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 유년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풍요로운 세상(바다와 들 과산)에서 보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만든 아름다운 세상이 온통 놀이터였고 장난감 이었다.
장난감 하나도 제대로 사 준 적이 없다. 학원도 보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아이는 자기의
서원대로 사회복지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다. 2년 수료하고 군복무중인데 군에서 군종으로
성경공부 가르치는 사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아이가 군입대할 당시 51킬로그램밖에 안가는 날씬 이었다. 보낼 당시 매스컴에서 군 의문사가
계속 특집으로 나올 때 여서 일반 부모들은 모두들 불안해서 안 보낼 수 만 있으면 안 보내려고 할 때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남자라면 군에는 갔다 와야 하고 생명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으니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었다.
논산 훈련소에 보내놓고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목사님과 나는 방에서 자는 것이
송구하여 100일 간 교회에 이불 보따리 갖다 놓고 기도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름도 모르는 훈련대장님한테
편지를 쓰고 싶은 감동이 와서 아이 소개와 함께 몸무게는 얼마 안 나가지만 정신력은 강한 아이 이고
요즘 보도 되고 있는 군 의문사는 아주 사소한 일 부터 시작되는 것 같으니 훈련 받는 동안 아무 사고 없기를
기도하겠노라 는 편지를 보냈었다.
하나님은 대장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훈련소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서 추석이었는데 그 아이만 따로 불러서
집으로 전화를 하게도 하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비단 그 편지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의 고백에 의하면 “엄마아빠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데 도움 되는
사람만 만나 모두들 시기할 정도입니다. 어려운 훈련은 피하게 해주시고 대장님 지프를 타고 다니며 복음
전하게 하시니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라고 말한다.

훈련을 마치고 보직을 받기위해 교육에 들어가는데 12주 동안 교육받고 의무대 치과 병으로 (군인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보직)5,000대 1로 뽑혀서 군 복무중인데 군대에 가면서 200명의 기도할 대상자 명단을
가지고 갔는데 뜻대로 기도도 많이 할 수 있고 교회에서 장교 자녀들을 지도하는 학생회 교사로 충성하고
있으며 군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일주일에 한번 씩 군인들에게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있다.
대학교에서 IVF (기독동아리) 리더로 일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제 제대를 하면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에 보탬이 될 것이고 노인 복지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를 돌봐줄 수 있을 테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군에 가기 전에도 대학교 식당에서 그릇 닦으며 도서관에서 책 찾아주고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시켜놓고 선교원 하느라 바빠서 자주 못가 보는데 새벽에 일어나 동생 도시락까지
세 개씩 싸고 한번도 밥을 거르지 않을 만큼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고 싶어서 갔더니
구안와사가 와서 안면이 마비되어 입이 다 돌아가 버린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장이 나빠 설사가 오래가면서
탈수현상에 영양실조로 그렇게 됐단다.
가슴이 무너지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그러면서도 부모님 걱정할까 말도 안하던 일찍 철든 아이여서
더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아빠(목사님)가 침을 놓을 수 있어서 만 한 달 만에 회복을 시켜주셨지만 ?1000靡셜?
보면 약간 남아있다. 어릴 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던 착하고 믿음이 있는 의젓한 아이였기에 지금도
웃을 땐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가슴이 찡해 온다. 그 일로 “명치끝이 저리다”는 말을 실감해봤다.
이제 8월에 제대하면 학비를 벌어서 내년에 복학해서 졸업하면 신학대학원에서 더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작은 아이는 돌 지나고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었다. 한번 들은 곡은 안 잊어버리고 그대로 따라서 흥얼거렸다.
그래서 음악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달라고 어릴 때부터 기도해왔었다. 그러나 농촌 개척교회만
맡아 했으니 학원도 못 보냈었다.
내가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옆 동네 교회반주 하시는 선생님이 돈도 안받고 레슨을 해줘서 잠시 한 것 외엔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이 너무 하고 싶다 고 말을 했다.
“그럼 네가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 뜻이면 응답하실 거야 ”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함께 기도를 했는데
하루 만에 응답해 주셨다. 선생님이 자진해서 진주에서 교통비만 받고 출장 레슨을 해 주겠다고 했다.
아는 목사님의 딸 이었는데 얼마나 감사하던지..그렇게 늦게 피아노와 화성, 청음, 시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분이 못 할 형편이 되자 또 다른 선생님을 보내주셨고 결국에는 원하는 대학교 음대에 재학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도록 많은 돈을 들여서 음대에 들어간다. 예고 다니는 아이들도 힘든데 학원도 안 다녔지만
어릴 때 기도한 것을 기억하고 계셨다가 때가 되매 급하게 선생님들을 준비해 주시고 결국에는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 드린다.
이제 군악대에 들어가서 더 많이 배워오겠다고 열심히 준비 중에 있다. 이렇듯 예비 하셨다가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때가 되면 다 이루시는 멋쟁이 아버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감사드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옷을 책임지고 보내 주시는 옷가게 집사님 덕분에 깨끗하고 멋진 옷을 입혀
멋쟁이로 키울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란을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현이 집사님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군에 간 아이에게서 편지가 오는 것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부모님께”라고 써서 편지를 보낸다.
해 달라는 것, 해 줘야하는 것을 아무것도 제대로 해 준적 없는 무능한 부모이지만 이렇듯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 가 되어주셔서 착하고 믿음 있게 자라게 해 주신 아버지께 두 손 높이 들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사실 농어촌 선교에 대해 말하자면 할말은 많다. 요즘같이 온라인 시대에 총회차원에서 얼마든지 골고루
농촌교회를 도울 수가 있다고 본다. 어느 교회는 적은 액수를 100교회 돕는다고 자랑하는데 농촌교회가
그렇듯이 모판 교회여서 키워 놓으면 도시로 다 나가버려 노인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농촌목회를 기피하는
것이 자녀 교육문제라면 얼마든지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교사들처럼 의무적으로 농촌목회를 몇 년씩을 하게
할 수도 있고 중학교부터는 도시목회를 권장하고 독려해서 자녀들이 공부가 다 끝난 다음에는 다시 농촌목회를
하게 한다면 적어도 우물 안 개구리는 없지 않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있다. 사실 농촌목회 실무를 하다보면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싶지만 사례비의 반이나 되는 세미나 비를 내야하는 광고를 보면 화가 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러니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고 도전받고 충전해서 새 힘 얻고 싶어도 맘뿐일 때가 있다. 혹 간에는 부지런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농촌 목회자들이 도시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많은 보조를 받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총회차원에서 온라인망으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고 본다. 서부경남 이 지역에는 개척교회가 몇
군데 있는데 사모님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도 있다. 좀체 부흥되지 않는 교회를 맡아서 몇 년 목회하다 보면
부임할 때의 그 불타는 사명감이 실추되고 교세에 따라 목회자가 평가받는 목회자 세계에서 위축될 테니...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니 난 이해할 수 있다. 농촌교회 사모들도 처녀 때 엔 꿈 많은 헌신적인 고급 인력
이었었다. 헌옷가게에나 기웃거리면서 자꾸 촌스럽게 전락해 가는 자신들을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 하게 되니
우울증을 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방안이 없는 것이 아닌데 누군가가 분명 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부경남 지역 같은 곳엔 한 면에 교회가 서너 개에 불과하다 .거제도 같은 곳엔 한 면에 교회가 열두세 개 씩
있는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해외 선교도 중요 하지만 국내 선교, 특히 해인사가 있는 서부경남은
개척할 곳이 너무 많음에도 도시의 한 건물에 여러 교단이 개척을 하면서도 농촌목회를 겁내 하는 것이
자1000녀교육 문제와 문화혜택 못 받는 것 뿐 만이 아닐 것이다. 농촌에 들어가면 다시는 도시로 못 나올 것
같은 불안감 내지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어린시절은 자연 속에서 성장하면 감성도
풍부해지고 정서도 안정을 가져올 줄 알면서도 경쟁 사회에서 농촌에서 공부하면 우리 아이들만 뒤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농촌목회를 더 기피하지 않나 싶다. 내가 아는 어느 목사님도 서울에서 개척을 했는데
성도들은 모이지 않고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으면서도 농촌에는 절대로 안 온다고 한다.

이 모든 문제들을 총회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기획해서 교세에 따라 형편 맞추어서 가까운 몇 교회씩을
돕게 해서 자립할 때 까지 목회자 최저 사례비를 비롯해서 목회자 영성회복과 목회자의 자존감 회복과 발전을
위한 교육프로그램과 주일학교 교사 교육까지 맡아서 해준다면 농촌목회 그렇게 힘겹지만은 않을 것이다.
너무 과한 발언인지 모르겠다.
시기상조인 것 같으나 이미 내년부터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한다니 농촌교회도 가능성은 있는 듯싶다.
오히려 도시 교회들이 긴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목회자들이 가고 싶은 농촌으로 만들고 한국교회 발전과 농촌 구석구석에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제도이니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싶어 농촌교회 목회만 24년 해
왔기에 평소에 절실히 느낀 점을 농촌 개척교회 사모로서 감히 말씀드린다.
(무게가 실린 이글은 삭제하셔도 됩니다)

5.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 싶다.

성경에 두 달란트 받은 자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장사하여 배를 남겨서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을 받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에 두 사람 다 배를 남기지 못하고
남기긴 남겼어도 조금만 남겼다 해도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했을까? 하고 의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나도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인이
흡족해 할 만큼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다면 책망을 받을 것이 아닌가?
다음에 주인이 오셔서 회계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을 받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재능이 있지만 재능을 많이 부여 받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 만은 아닌 듯싶다.
선천적인 달란트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생긴 달란트도 있을 것이다.

농촌 개척 교회가 그렇듯이 북치고 장구 쳐야 할 때가 많다. 지난해 12월16일에 개척한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주일학교 교사, 주일학교 반주, 어른 예배 반주, 구역장 등등 여러 가지를 맡아하고 있다.
반주자 양성을 위해 여러 해를 애 써 봤지만 키워놓으면 다 나가버리고 지금까지 반주를 맡아 해야 할
실정이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했기 때문에 미술지도도 해봤지만 쉽지만 않다. 우리 높은 뜻 제일교회는 집사님들이 깨어
있는 분들이어서 주일학교 전도도 매월 2째 주 토요일이면 학교로 먹을 것 들고 전도하러간다.
그리고 주일 예배 마치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도하러 나간다. 집사님들이 시간이 안 되면 목사님하고
둘이서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요즘 같은 농번기에는 음료수를 약간 얼려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땀 흘리며 목 말라하는 농민들에게 따서
갖다 주면 그렇게 좋아한다. 그러면서 “힘드시지요? 도와드리지는 못하고 음료수라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
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차에는 항상 전도용 사탕과 과자가 있다. 이미 이곳에서 여러 해를 복음전하면서 우리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볼 때마다 인사를 하기 때문에 인사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고 선교원을 하면서 직접 운전을 6년간 해왔기
때문에 처음엔 운전기사로 오인하던 사람들도 이젠 높은 뜻 제일교회 목사인 것을 다 안다.
안면 때문에 문전박대는 하지 않고 반갑게 손을 잡지만 불교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분들이라 복음전하기가
그리 쉽지만 않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전하다보면 택한 백성 찾아내는 일이 힘겹지만은 않다.
어느 날 전도를 하러 집사님하고 짝이 되어 전도하고 싶은 집을 찾아 가는데 갑자기 덩치가 큰 도사견이 달려
나와 무서워서 어느 집으로 도망을 쳤는데 들어간 김에 전도용 휴지로 전도를 하기위해 “계십니까? ”
하였더니 뇌졸중 환자가 나오면서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50대 중반인 그는 젊을 때
이장도 하고 양복점도 하던 인물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파 누운 지 1년이 넘자 찾아오는 사람 없고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누가 나보고 교회가자는 사람도 없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사견을 보내서 그 집으로 밀어 넣으신 것이었다.

이 얘기를 1000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금 교회 출석도 잘 하고 믿음도 많이 성장하였다. 이렇듯 복음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자주 만난다.
미리 겁먹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가 없는 것이고 담대히 성령 하나님 인도 따라 순종하면 열매를 따게
하시는 주님을 전도하면서 많이 만난다.
그리고 목소님과 나는 침을 놓을 줄 안다. 나는 수지침 밖에 못 하지만 목사님은 경희대학교 교수님들로부터
몸 침도 배워서 아픈 사람 전도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예배 후에는 아픈 성도들에게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침을 놓아주고 있다.

거제도에서 개척 할 때는 급체하거나 놀라거나 열이 나서 찾는 사람에겐 내가 침을 놓아줬고 남편은
중증 환자들을 맡았었다. 병원에서도 안 된다는 사람도 여럿을 고친 경험이 있다. 물론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일이다.

6. 후천적인 달란트

나는 어릴 때부터 남의머리 만지는 것이 참 좋았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동생들을 불러서 사탕을 줘가며
머리를 만져주었다. 아카시아 잎대로 파마도 해주고 때론 머리도 깎아주었다. 그런데 잘못하여 귀를 자른 적도
있고 잘못 깎아서 나의 실험 대상이었던 고객(?)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안하겠다는 동생들을 꼬드겨서 이젠 예쁘게 깎아줄 수 있다고 사정사정해서 깎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3살 위인 언니가 중학교 3학년 때 나보고 머리를 깎아 달라고 했다.
이게 웬일이냐 싶어 ‘언니야 어떻게 깎아 주꼬? 하고 물었더니 귀밑에 3센티로 깎으면 된다고 했다.
뒤 곁에 보자기를 씌우고 바느질가위로 미용사 흉내를 내며 겁도 없이 귀밑에 3센티부터 자르기 시작했는데
자꾸 위로 올라가게 깎아가고 있었다.
요즘 같이 두발자유가 있다면 실수도 커버할 수가 있는데 그땐 단발머리만이 허용 될 때라 속으로는 큰일 났다
싶으면서도 뒤에는 머리 뿌리가 다 드러나게 깎아놓고 수습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붙일 수는 없는 일 사태를 파악한 언니가 뛰어가더니 거울을 보고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착하기만 한 언니는 “몰라몰라 가시내야 우짜끼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민망하고 당황 했지만
언니야 머리는 금방 기니까 괜 않다 그자? 이러면서 능청을 떨었다. 그 일로 언니를 2일이나 결석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지금 서울에서 권사이면서 신학교 졸업반인 언니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동생들 머리도 잘못 깎아서 아버지한테 혼나면서도 그 일이 왜 그렇게 재미있고 하고 싶던지....

그 이후에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머리를 깎아 주기도 하고 주변에 누구든 날보고 머리를 깎아 달라고만 하면
깎아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나 뭘 보고 나에게 맡기겠는가? 머리 깎을 돈으로 다른데 쓰고 싶은
친구들 덕분에 차츰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보니 학생 신분인 남편은 약간 곱슬머리에
머리숱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머리 깎을 때 마다 숱치는 가위로 많이 쳐내야하는 까다로운 머릿결인데도
돈도 없고 하니 핑계 삼아 “이제부터는 당신머리는 내가 책임집니다.” 그 날부터 남편의 전속이발사가 되었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어서 머리를 깎았다.
바느질 가위로 머리를 깎는데 잘한다고는 했지만 깎고 보니 일명 호섭이 머리(?)로 잘랐다.
남편은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아무소리도 못하고 학교로 갔는데 친구들이 하나같이 어디서 머리를 잘랐냐고
난리가 났더란다.
아내가 깎았다고는 못하고 이발소에서 깎았다고 했더니 어느 이발소냐고 가서 다 엎어야 한다고 ,
“아 인물 다 배리 났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도 착한 남편은 계속 나에게 머리를 맡겨주었고 태어난 아들 둘과
함께 기꺼이 실험대상이 되어줘서 지금은 성도들도 원하는 분은 누구든 깎아주고 재가복지를 통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게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동안 개척한 교회마다 동네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기꺼이 머리를 깎아드리고 길흉사에 함께 했다.
그 일로 유대가 좋았고 이사 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했었다.
이곳에 이사 왔을 때 먼젓번 교회 성도들이 “이발비가 이렇게 많이 올랐는지 사모님이 가시고 알게 됐다 ”며
전화가 오기도 했다. 아무리 안 씻어서 냄새나는 사람이라도 맡겨만 주면 기꺼이 해 주고 싶다.
지금도 그 일이 너무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이다.
아직도 전문 미용사에 비하면 많이 미숙하지만 내일도 남편의 머리를 깎기 위해 바리깡(머리 깎는 기구)을
지금 충전 중에 있고 어느 할1000머니 집사님 예약도 받아놓은 상태이다.
나는 피아노 치기 좋아하고 그림그리기와 뜨개질도 좋아하고 옷 만들기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바빠서
제대로 못하고 있다.

받은 달란트 잘 사용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 싶지만 불쑥불쑥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직도 덜 깨진 나를 발견하며 죽여 달라고 호소한다.
복지원 땅에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서 가꾸느라 깜순이가 다 되었지만 마음은 항상 기쁘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이 채소들로 성도들도 나눠먹고 노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서 갖다 줄 것을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농사가 너무 잘되고 맛이 너무도 좋아서 나누는 기쁨 또한 크다.
이제 교회 건축할 부지도 사야하고 교회당도 지어야하고 복지원 일도 소홀할 수가 없다.
그동안 부족한 우리에게 개척 하게 하시고 교회당 도 두개나 짓게 하시고 다시 또 개척하여 건축할 기회를
주시니 감사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교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안다. 기도로 무릎으로 지어야하고
모든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 되어서 믿음으로 져야한다. 이미 1차 건축헌금을 하였고 이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비전이 같고 믿음이 큰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니 비록 지금은 돈은 없지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염려하지 않는다. 전에도 그랬지만 성전 짓는
축복을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기에 감사한 맘으로 건축 할 때 몸으로 헌신하면 된다. 나도 교회당을 두개
짓고 나니 반 일꾼이 됐다.
모래도 치고 미장일도 해 보았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리라.
언젠가 성도들이 많아서 생일을 못 챙겨드려서 미안한 일이 많았음 좋겠다 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아주 가끔은 생일을 빼먹기도 하는걸 보면 많이 부흥된 셈인가?
성도들의 생일이 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미리 준비해 둔 생일카드와 선물로 사랑의 메시지와 함께 축하를 해주고 있다. 어떤 땐 돈이 없어
준비를 못했을 때는 애장품이나 가족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대신 할 때가 있지만 뭔가를 주면서 축하하는
일은 매우 기쁜 일이다. 핸드폰이 있는 성도에게는 성구나 깜찍한 문자 메세지로 자주 관심을 표한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기도 제목이 너무 많아 방에서 잘 수가 없어서 교회에 이불보따리 갖다
두고 잠이 오면 자고 깨어지면 기도 하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가고 싶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교회는 태반이 새 신지들이다. 따라서 몸이 불편한 성도가 많아서 기도회 때 마다 특별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 목사님은 늘 말한다. 우리교회 성도 하나하고 다른 교회 성도 열 명하고는 안 바꾼다고....
성도들이 그 만큼 열심히들 하고 있고 그 만큼 사랑 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예배를 마치면 누구든 간식을
준비해 와서 초대교회같이 내 것 네 것 없이 떡을 떼며 교제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높은 뜻 제일교회이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하나 된 형제자매애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한다.
특히 찬양을 뜨겁게 하는 우리교회는 목사님은 성도들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고 성도들은 목사님을 입만
벌리면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보기 드문 아름다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 또한
대단한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듬어야하고 감싸 안아야 할 폭포수 같은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뜨겁게
사랑하며 살 것이다.

24년 동안 나와 함께 하셨던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이 좁은 지면에 어찌 다 소개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에 두 손 높이 들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7. 주님!!

우리 높은 뜻 제일교회 (하나님의 뜻을 최고로 높이는 교회)를 세우시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아직도 덜 깨진 나를 죽여주시고 뜨거운 사랑의 은사를 허락하시 사 맡겨주신 사명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과거에도 함께하신 하나님 현재에도 앞으로도 세밀히 함께 하시어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 다 감당할
때까지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고 축복을 예비 하시고 순종하기만 하면 주시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 맘에 꼭
들게 살게 하시 사 예비 된 축복 앞 당겨서 받아 누리는 지혜로운 여종 되게 하여 주소서.

끝으로 부족한 글 이지만 이 글을 읽고 농어촌 개척교회 사모님들이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들을 꼬옥 안아 주시고 위로 하시 사 하늘로부터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하여 주셔서 위축되거나 좌절 하는
일이 없도록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아버지~~하고 부르면 오냐~~ 내 딸아 ~하시는 주님 !!
주님 많이많이 사랑해요~~~♥
모든 사모들을 사랑 하시지만 특별1000히 농어촌 교회를 섬기는 사모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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