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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가난과 배고픔에서 받았던 상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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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연 집사 (여, 51세, 영생교회, 성북구 수유동)

  시골의 가난한 농사꾼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늘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느라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런 가정환경이 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내 나이 18세가 되던 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배운 것도 없는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몸으로 뛰는 일 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종로5가의 동대문시장 어느 식당에서 머리에 밥상을 이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배달하는 일이었다. 배달 일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추운 겨울철에는 길은 미끄러운데다가 손등은 트다 못해 갈라지고 상처가 생길 정도로 힘들고 고단했다. 하지만 달마다 적금통장에 돈이 모아지는 즐거움은 그런 어려움에서도 오뚝이처럼 나를 일어서게 했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무렵 포목점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을 도우며 교회를 성실히 다니는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우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정말 꿈에 그리던 내 가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과 배고픔의 서러움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그에 따라 장사는 잘되어 가게는 규모가 점점 커졌고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럴수록 난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남편은 아이들한테 무조건적인 나를 제재시켰지만 내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은 내 손을 벗어나 말도 듣지 않을뿐더러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토록 아이들에게 헌신적이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서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소화가 잘되지 않고 자주 체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에게 마지못해 주일에 얼굴 도장만 찍는 형식적인 믿음 생활에서 벗어나 교회에 열심히 나가 보라고 했다. 예전에도 자주 들어왔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그 말이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래서 아이들 문제로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21일 새벽작정기도에 들어갔다.

  첫 번째 날도, 두 번째 날도 처음에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몰라서 “하나님!” 하고 한번 부르고 한 시간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3일째 되는 날도 어김없이 “하나님!” 하고 부르는데 무엇인가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쳐 나와 나는 하염없이 흐느끼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 때부터 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꾸만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 뒤로는 하나님 앞에 조그만 문제까지도 내려놓고 기도를 하였는데, 특히 자녀들의 문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고 물질의 노예가 된 어리석었던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탐욕스럽고 나 밖에 몰랐던 죄를 눈물로 회개를 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듯이 내 마음에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이 넘쳤다. 그 뒤로는 아이들의 문제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고 더욱더 기도에 힘쓰게 되었다.
  이처럼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던 것을 깨닫고 내가 조금씩 달라지자 남편은 너무나 좋아하였고 아이들도 조금씩 달라져 갔다. 

40%의 희망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정말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왔다. 늘 더부룩하고 가끔씩 통증이 있어서 찾았던 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나는 너무나 뜻밖에 사실에 ‘이것은 오진일거야. 오진일거야.’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재검사를 받았다. 수술을 해도 40%의 희망이 있을 뿐이라는 재검사의 결과가 나왔고 다른 마땅한 방도도 없으니 수술을 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수술을 하루 앞둔 날 밤, 고통과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난날의 나의 삶을 정리하는 맘으로 뒤돌아보면서 어쩌면 이리도 허무한 삶을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는지, 왜 그토록 어리석었던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는지를 용서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한번만 나를 치료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수술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시고 40%의 희망에서 100%의 희망으로 역사하여주세요!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뜻 가운데 살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디어 날이 밝았다. 남편의 ‘잘 될거야’라는 눈빛과 아이들의 ‘엄마 꼭 나을 거야!’라는 격려의 말을 뒤로 하고 수술대에 들어갔다. 몇 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는 100%의 희망이 주어진 상태가 아니고 언제든지 재발의 위험과 전이될지 모르는 위험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수술자리가 아물 무렵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게 되어 수술대 위에서 무사히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머지 위험요소까지도 완전히 없애 주실 것을 기대하며 10일 작정금식을 위해 강남금식기도원에 올라갔다.

10일 작정 금식기도를 통해 40% 희망에서 100% 희망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도원 풍경에 다소 놀라기도 했지만 이렇게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또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간 기도원은 마치 가족 나들이 같았다. 남편은 나와 함께 이틀 동안 금식을 하고 며칠씩 식당 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 기도원과 식당을 출퇴근했다. 아이들은 때마침 방학이라 함께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며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의 은사를 선물로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10일 작정금식을 통하여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죄들을 하나하나 알게 하셨는데, 그 중에 십일조에 관한 나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 지적해주셨다. 나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자주 십일조를 무시했었는데 말씀을 듣고 나니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들을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나는 그전보다 더 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금식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밤에는 꿈을 꾸었는데, 나무 한 그루에 벌레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나무가 몹시 괴로워하
는 모습을 본 나는 저걸 어쩌나 하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나무를 향해 불어오더니 나무에 붙어 있던 벌레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 일이 있는 후 나무는 전혀 괴로워하지 않고 건강하고 싱그럽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아~ 참 좋다!”라고 감탄하는 순간 그 나무는 바로 내 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 꿈을 통해서 다시는 재발의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그 후 7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변화 시키셔서 하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둘은 교회 생활도 공부도 열심이 하고 있다. 욕심으로 가득 찼던 이 죄인을 구원해주시고 죽을병에서 치료까지 해주시며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정리·기도원 간증 담당자>

- 출처 : 강남금식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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