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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목회 고난의 장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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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명관조 목사

1. 나의 소년 시절과 학창 시절

흔히 인생을 논할 때 나그네, 행인, 초로 인생, 장막과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세익스피어 인생을 가리켜 무대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배우와 같다고 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장자는 인생은 마치 한 망아지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실로 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짧은 생을 되는대로 무가치하게 보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짧은 생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사람을 불행에서 복된 길로 인도하며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시어 영원한 삶을 허락하셨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이 죄인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딤후 4:7)라고 간증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나 자신도 목회자로서 특히 주님의 종으로서 승리하게 되었다고 간증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결산을 하면서 81년간을 지나오면서 특별히 47년간의 목회에서의 겪은 일을 적어 보려고 합니다.

내가 47년간의 목회의 장벽을 넘고서 은퇴하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고 하겠습니다.

나는 1914년 음력으로 8월 25일에 평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명창선(明昌善)이시며 어머님은 김이복(金利福)이십니다. 4남매 중 막내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나의 아버님은 믿지 아니하였으나 나의 어머님은 기독교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분으로 신앙이 투철하였으니 나의 외할아버님은 장로님이시였습니다. 나의 아버님은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여서 나의 어머님께서는 혼자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불신의 가정에 출가를 하시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자녀 된 우리를 위하여 행상을 하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가정에 생계가 어렵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이제 국민학교 4학년이 될 나이에 평양 광성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으며 광성국민하교 졸업은 16세 때 하였습니다. 그때 광성국민학교는 6학년 때 성적이 좋은 열 다섯 명을 뽑아서 상급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시켰습니다. 상급학교는 광성보통학교였으니 감리교 선교부에서 광성국민학교와 광성보통학교를 평양에 설립한 것입니다.

일본 제정 시대의 교육 학제는 지금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 6년에서 1년을 줄여서 5년간 교육을 시키는 학제였으니 그때에 상급학교를 고등 보통학교라고 했습니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성적 석차가 16차였습니다. 그러니 상급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몹시 섭섭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기에 갔더니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15명중 한 학생이 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다음 16차가 된 명 군이 상급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지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게 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상급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급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됨으로써 신학을 공부하게도 되고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만약 국민학교의 교육만 받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면 신학 공부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광성보통학교에 입학하도록 인도하여 고등교육을 받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어머님께서 가정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시골 장터에 갈 때는 새벽 4시에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날에 오시지 못하고 엿새만에 집으로 돌아왔는 바 월요일에 장터로 가면 토요일에 돌아왔으며 주일에는 꼭 교회에 나가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 성수는 꼭 지키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큰 형님, 둘째 형님, 누님도 다 결혼하여 분가한 후에는 어머님과 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둘째 형님과 누님의 결혼은 온전히 어머님께서 행상하시여서 번 돈으로 무사히 진행되었고 분가까지 시켰으니 어머님의 노력과 수고는 대단하였습니다.

나는 혼자서 밥을 지어먹으면서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국민학교 때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나 위한 수고를 잊은 채 극장에 자주 갔습니다. 내가 극장에 자주 드나들며 좋지 못한 친구들과 사귀었다면 공부도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고 점점 잘못 된 길로 나갈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어서 교회 학교에 잘 다니는 친구와 사귀도록 인도하셔서 주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아가 예배드렸습니다.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님의 숨은 눈물의 기도와 노력이요 그리고 교회에 잘 다니는 친구들과 사귀게 된 탓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좋은 친구들과 사귀는 것은 앞날의 성공, 실패를 결정하는 지름길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로 이사가든지 자기의 자녀들로 좋은 친구를 사귀도록 지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부모 된 이들은 자녀들이 진실하고 착한 친구들과 사귀도록 관심을 둘 것이며 지도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좋은 친구와 교회에 잘 다니는 친구와 사귀지 못하였다면 나는 지금쯤 죄인의 괴수가 될 뻔하였습니다. 나는 좋은 친구들과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여서 무사히 광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는 상급학교에 입학하였지만 5년간의 등록금이 문제였습니다. 나는 어머님께 등록금을 5년간 대 주도록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어머님께서 행상 하는 수고가 벅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 혼자 고민하던 차에 어머님께서 눈치를 채시고 나에게 "관조야, 너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학교 등록금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라고 하시겠지요. 나의 어머님은 나에게 "관조야, 염려 말아라. 내가 어떠한 어려움이 있고 고통스럽더라도 너 하나 공부 못시키겠느냐."고 하시겠지요. 그때서야 나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나는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열심히 공부하여서 어머님의 은혜와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나의 등록금 때문에 더 많은 애를 쓰실 것을 생각하니 나의 마음이 편치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마음으로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어머님께서 행상 하시는 일을 도와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어머님께서 장터에 가서 파실 물건을 준비하시는 것을 새벽 한 시까지 도와 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같이 나는 어머님의 수고를 덜어 드렸습니다.

내가 상급학교 일 학년에 입학한 연도는 1929년이었습니다. 그 해 11월 3일에 광주에서 반일(反日)투쟁의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으로 번져 갔는데 우리 광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며 교실에서 뛰쳐나와 시가행진을 하니 경찰들이 한 학생, 한 학생 붙잡아 갔습니다. 그 때 나 또한 일 학년 학생이었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급생들과 "대한 독립 만세"라고 소리 높이 외치며 평양 시가지를 행진하다가 그만 형사에게 붙잡혀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광주 사건의 발단은 다름이 아니라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과 고등 여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편이었습니다. 1929년 11월 3일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갑자기 우리 여학생을 향하여 멸시와 조롱하는 말로 농담을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본 우리 남학생이 참다못해 일본 학생을 구타하니 평소 쌓여 있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기차 안은 수라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일어난 광주 학생 사건을 기리어 해방 후에 우리 나라 정부에서는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했습니다.

학생의 날이나 3.1절이 다가오면 각 학교 교사들은 여러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 선열(先烈)들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몸바쳐 싸웠다는 것을 이야기해 줄 것이며 특히 8월 29일은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합방 당하던 날임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압제와 멸시를 받아 왔는지를 알려줌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 민족이 외국인들에게 노예가 되어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결심을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여러 교역자님께서는 나라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돈독케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상급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다니는 평양 남산 감리교회의 남선교회의 회장님께서 내게 "명군, 우리 남선교회의 봉사부에서 운영하는 야간 여자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기 바라오"라고 부탁하겠지요. 그 때 나는 회장님께 가르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학교 못 가는 여학생들을 가르침도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32년이었습니다. 당시는 여자가 공부해서 무엇 하느냐고 어느 부모든지 딸은 학교에 보내지 않던 때입니다. 그래서 평양 남산 교회 남선교회 봉사부에서는 학교 못 가는 여자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결의한 끝에 남선교회 봉사부 산하에 야간 여자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산 교회의 고등부 학생이었던 나를 학원 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교사의 입장이 되어 한 반을 가르쳤으며 상급학교 졸업 때까지 가르쳤습니다. 그 때 학생들은 이백 명이나 되었으나 학생들은 여학생들뿐이 였습니다. 어떻든 낮에는 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밤에는 야간 학원에서 가서 가르쳤습니다. 이같이 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크게 보람있는 일이라 여기며 계속하였습니다.

나는 광성 고등 보통학교 오 년간의 공부를 끝맺고 졸업하게 되었는데 많은 동급생들이 졸업 후에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서 신학교 졸업 후에는 복음을 증거 하는 목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할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감리교 교파에 속한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감리교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의 결심을 바꾸었으니 다름이 아니라 어머님께서 오 년간 나를 공부시키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 또 계속 신학교까지 등록금을 대어 주십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년간 농촌에 있는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에 신학 공부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나는 1934년 3월에 광성 고등 보통학교의 오 년간의 공부를 끝맺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가장 가난한 내가 오 년간의 고등교육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2. 국민학교 교사 생활

나는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助王里)에 있는 삼혜국민학교(三惠國民學校)의 교사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삼혜학교를 설립하신 분은(토마스 선교사 기념 교회)홍익명 장로님이십니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려고 합니다.

토마스(Robert Tomas)선교사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무역을 하러 천진(天津)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만(General Sherman)호에 승선하였는데 그 배가 평양 가까이 왔을 때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저 서양 오랑캐의 배에 불을 질러 버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한국 관군은 감사의 명령대로 셔어만 호에 불을 질렀으며 그곳에 있던 선장과 선원들도 죽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때는 1866년 9월 3일 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에게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순간 관군의 칼날이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27년 5월 8일 한강 다리에서 멀지 아니한 섬에서는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서 토마스 선교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설립하여 "토마스 선교사 기념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삼혜학교에서 2년간 봉직하면서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에서 유년부 어린이들도 가르쳤으며 저녁 예배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토마스 선교사 기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한 삼혜학교에서 2년간 교사직을 갖게 되어 나로서는 가장 뜻 깊은 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2년간의 교사직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학교에 진학할 마음을 조금도 잊지 아니했으며 1936년 3월에 삼혜국민학교의 교사직을 내놓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국민학교에서 2년간 아무 사고 없이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신학교 입학의 기쁨

나는 손꼽아 기다리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에 2년간의 교사 생활을 할 때도 신학 공부할 마음이 변치 아니한 것은 나 자신의 결단이라기 보다도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 죄인을 주님의 그릇으로 유용히 쓰시려고 붙들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때의 신학교 학제가 예과, 본과로 나누어 있었으며 남녀공학이었습니다. 내가 입학할 때의 학생은 남학생이 9명, 여학생이 9명, 도합 18명이 입학하였습니다. 그때 신학교 교장님은 빌링스(Bliss W. Billings) 교장님이었습니다.

그는 1908년에 선교사로 한국에 왔으나 우리 나라 이름으로 변영서(邊永瑞)라고 불렸습니다. 변 교장님은 미·일 전쟁때 다른 모든 선교사들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 일본 총독부의 정책에 의해서 추방되는 슬픈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변 교장님은 필리핀에 있는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쳐 왔는데 필리핀이 한 때 일본 군인들에게 점령되는 바람에 변 교장님은 일본 군인들의 감시 하에 포로수용소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되면서 변영서 교장은 우리 나라로 다시 와서 기독교 세계봉사회 한국 관리자로 임명되어 구호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그가 필리핀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일본 군인들이 먹을 것을 형편없이 주어서 쥐를 잡아먹었지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변영서 학장님 후임으로 변홍규 목사님께서 신학교 학장님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나는 일 학년과 이 학년 즉 이년간은 홍제 감리교회로 파송되어 교회 학교 학생들을 신앙으로 지도하였습니다.

삼 학년 첫 학기 때였습니다. 김창준(金昌俊)목사님께서 나에게 경기도 연천교회(連川敎會)에서 목회 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김 목사님의 권하는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김 목사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결국 나는 신학교 3학년 때부터는 공부하면서 연천교회(현재는 김진선 목사님 담임하심)의 담임자로 목회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연천교회에 부임한 해는 1938년 4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어려운 문제가 부닥쳤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교회의 임원들과 교인들은 내게 혼자서 목회 할 수 없으니 속히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목회 하는 것은 나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나는 생각한 끝에 신학교 입학 후 2학년 때부터 일생을 같이 하자고 약속한 동급생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름은 양학순이라고 하며 원산 류씨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는데 1988년 1월 11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목회자의 성패는 목회자 혼자 은혜롭게 한다는 데 있지 않고 목회자는 누구든지 내조의 역할 여하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47년간의 목회를 끝내고 1985년에 은퇴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사고 없이 은퇴하였지만 집사람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신학교 재학시 일어났던 사건을 잠시 적어 보려고 합니다. 1940년 2학기 9월에 신학교 교정에 반일 투쟁의 내용이 인쇄 된 삐라가 뿌려졌습니다. 신학교의 삐라 사건으로 변홍규 학장님께서 구속이 되었으며 일본 형사들이 기숙사 각 방을 빠짐없이 수색하였습니다. 1940년 10월 3일에 신학교 폐교령이 내려져서 열심히 공부하던 신학생들은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5개월이 지난 후에 즉 1941년 3월 9일에 동대문 교회에서 졸업 예배를 드렸고 졸업식을 진행하였습니다. 1936년도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된 학생들과 1937년도에 입학한 학생들 두 학년 학생들만 동대문 교회에서 졸업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대문 교회에서 졸업 예배를 드린 것이 바로 졸업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같이 신학교 교정에 뿌려진 항일 투쟁의 삐라로 신학교가 폐교되고 졸업식도 제대로 진행 못하고 끝냈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이같이 어려운 중에서 나 자신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만약 그때 하급 학년이 되어서 졸업을 하지 못했다면 다른 신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려웠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의 우리 민족을 향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는 신학교내 삐라 살포 사건으로 신학교를 폐교까지 시킨 사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교가 폐교 당한 후 신학교 명칭을 감리교 연구소라고 하였으며 초대 연구소 교장님은 김인영 목사님이었습니다.

내가 신학교 재학 시절에 학생의 신분으로 연천교회에서 목회 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형사가 내가 있는 주택에 와서 내게 "명 전도사님 경찰서까지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겠지요. 나는 형사와 같이 경찰서에 갔습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명 전도사님 예수님이 높으십니까? 천황 폐하가 높으십니까?" 그가 내게 이같이 물음은 나를 잡아 유치장에 넣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나로 하여금 목회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흉계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는 제일 높으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시라"고 하였고 "천황 폐하는 우리가 현재 일본의 통치하에 있으니 높으신 어른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천황 폐하보다도 예수께서 더 높으신 구주가 되신다고 말하였으며 기독교인으로서 누구나 신앙생활 할 때 신앙의 대상되시는 구주 예수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이같이 대답한 것을 듣더니 그 형사는 나에게 댁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겠지요.

어떻든 일본 형사들은 주의 종들을 괴롭혔습니다. 철원 교회에서 목회 하시던 강종근 목사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설교하였는데 교회 뒷자리에서 듣고 있던 형사가 강 목사님께 그 설교 내용은 다름이 아니고 한국 백성을 일본인들의 손에서 해방시키자는 뜻이 아니냐고 트집잡아 강 목사님을 유치장에 가두었으며 그 후에 강 목사님은 형무소에서 옥사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 제정 때 주의 종들과 나라를 염려하는 사상가들과 애국지사들은 형사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어려운 일들이 부닥쳐도 싸우면서 지조를 지켰으며 결코 소망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4. 목회 전선에 나서는 나의 각오

나는 신학교 재학 때 담임하던 연천교회에서 철원 지방 장흥교회(현재 김종덕 목사님께서 담임하고 계심)로 임명되어 왔습니다. 그 때가 1941년 4월이었습니다. 장흥리 교회는 철원읍에서 20리 가량 됩니다. 내가 장흥교회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70명 가량 되었으며 참으로 진실한 교인들이었습니다.

1941년 7월 21일에 하나님께서 첫 선물로 여자 아기를 주셨습니다. 이름을 혜숙(惠淑)이라고 지었습니다. 맏딸은 우리 가정에 첫 열매인 만큼 하나님께 바치는 뜻으로 이화 여고 졸업 후에 신학교에 입학시켰으나 적성에 맞지 아니한다고 중간에 중퇴하고 한양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하였고 4년 후 졸업을 하였습니다. 맏딸을 신학을 시키려다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서 한 때 내 마음은 섭섭하였습니다. 큰딸은 지금은 LA에 있는 밸리파크 교회(Vally Park Church) 성가대의 지휘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장흥리 교회에서 목회 하면서 부족한 것을 느껴서 공부할 뜻으로 일본 동경에 있는 김태열 장로(광성고교때 성경을 가르쳐 주셨음)님께 나의 뜻을 편지로 자세히 적어 보냈는데 회답은 공부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몸담아 받들고 있는 교회의 담임자로 초청한다는 초청장이 왔습니다. 나는 1943년 4월에 만 2년만에 장흥리 교회에서의 목회를 끝내고 대대목 한인 교회(代代木韓人敎會)가 있는 일본 동경으로 갔습니다.

대대목 한인 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그곳에서 사업하는 교인들도 있었지만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유학생 중에는 박태선도 있었고 연세대 음대 나운영 교수의 부인이신 유경손 씨도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박태선이는 동경에서 공부할 때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귀국 후엔 그만 이단자로 낙인이 찍힌 불명예스러운 생애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대대목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 형편을 파악하여 보니 교인들 사이에 뜻이 맞지 아니하여서 두 파로 갈라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꼭 중립의 자리를 지켰으며 화해의 역할로 교역자 입장에서 애도 많이 썼습니다. 어느 날 김 장로님께서 내 편에 서지 않느냐고 말하였지만 그때 나는 장로님께 주저 않고 똑똑히 말하기를 "장로님, 저는 고교 시절에는 장로님의 제자로서 무슨 이야기든지 다 들어야 했었지만 지금의 저는 주의 종의 입장에 있으니만큼 결코 장로님 편에서 목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장로님은 그렇다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면 좋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장로님의 이같은 말을 들은 나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목회 하겠다고 장로님에게 나의 뜻을 전했습니다.

나는 1944년 1월에 나의 아내와 큰딸을 데리고 동경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으로 온 것은 교회의 교인 사이의 불목 관계도 있었지만 1941년부터 계속되는 미·일 전쟁으로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군부에서는 일본 유학생들을 학도병으로 강제로 일선에 보냈었기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유학생들의 수가 점차 줄어든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 오니 평양 지방의 정지강(鄭志强) 감리사님께서 나를 신의주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내가 신의주 교회에 부임한 때가 1944년 2월 초순이었습니다. 내가 신의 주 교회에 부임한지 10여일 을 지나서 일본에서 목회 하던 교회의 교인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 내용인즉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동경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신 지 이틀 지나서 목사님 앞으로 징용장이 배달되었습니다. 만약 목사님께서 그 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면 목사님은 징용으로 공장에서 일하거나 일선에 필요한 군인들의 포탄을 운반하는 일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유용히 쓰시려고 위험한 중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징용으로 끌려가서 지금까지 살았다면 혹시 소련 영토인 사할린에 거주할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형편없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와 큰딸은 나보다도 더 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어떻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고전 15:10)

내가 신의주 교회에서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나의 기억으론 1944년 3월 중순 때쯤이라고 생각됩니다. 감리교 본부(정확히 말하면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임)에서 교역자 회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통지였습니다. 나는 상동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교회의 강단에는 일본인들이 섬기는 제단(천조대신天照大神)이 놓여 있겠지요. 전국 감리교 목사님들은 다 모였습니다. 순서의 절차에 따라서 의식을 행하는데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또한 한강 물에 팬티만 입고 들어가서 그들이 하라는 의식에 따라야 했습니다. 감리교에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오점(汚點)을 남겨 놓았습니다.

나 자신부터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일본인들의 악정은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씨를 말살시키려고 한국 고유의 성씨를 일본 성으로 부르도록 강요하였기에 일본 성으로 고쳐 부르지 아니한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예배 시간을 알리는 교회 종과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도 총탄을 만들려고 헌납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 일본말로 설교하도록 계획을 세웠으며 더욱이 가슴아픈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사이 신문에 보도 된 바 있거니와 한국 여성들로 정신대(挺身隊)를 조직하여 그들을 일선에 강제로 보낸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이들은 위안대라는 명목 하에 일선에서 싸우는 일본 군인들을 위해 강제로 보내졌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향한 만행(蠻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같이 악정을 했던 일본은 패전되어야 마땅했으니 급기야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항복함으로써 세계 2차대전은 끝났습니다.

나는 신의주 교회를 떠나 1944년 4월에 강서 지방 가현교회로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목회 하는 동안에 나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조금이라도 입게 된 것을 알게 되면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에 상처 입히지 않도록 목사와 교인이 서로 화평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1944년 9월 21일에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둘째 딸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을 미·일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니만큼 속히 평화의 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숙(和淑)이라고 지었습니다. 둘째 딸은 감신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 원목실의 전도사로 시무 하였습니다.

그 후 1984년도에 캐나다의 뱅쿠버란 곳에 있는 신학교(Regent Theological University)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그 곳 영광 교회의 전도사로 있습니다.

5. 해방의 기쁨

내가 강서군 수산면 가현리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 민족이 손꼽아 기다리던 해방의 날을 맞았습니다. 때는 1945년 8월 15일 이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인으로부터 36년간의 모욕과 멸시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이같이 살 때 기쁜 해방의 때를 맞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 평양 성화 신학교 교장님이셨던 배덕영 목사님은 해방을 맞은 날 너무나 감격해서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계 2차대전은 독일, 이태리, 일본 세 나라가 하나가 되어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 나라 연합국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만약 연합국이 그 때 전쟁에 패전을 하였다면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과 합병한 때부터 1993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83년간이나 계속 일본인들의 노예가 될 뻔했습니다. 해방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해방 전에 즉 1945년 8월쯤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유지들을 굴속에 가두어 놓고 단번에 죽여 버리려는 계획을 세워 놓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민족의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일본인들의 종살이하였던 부끄러운 때를 잊어버린 채 너무나도 지나치게 자기 자신들만 위하는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굳은 마음을 품고 다시는 다른 민족의 종 된 생활을 하여서는 안되겠다는 결단이 없는 생활을 지속하는 모습을 볼 때 염려가 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기쁘고 기쁜 해방의 때를 맞게 되었는데 이같은 기쁨도 결국엔 한 달도 지나지 아니하여서 가라앉고 말았으니 이는 소련 군인이 먼저 이북 38선까지 진군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군도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이남 38선 경계까지 진군했습니다. 이로써 38선 이북엔 김일성의 지도아래 공산주의 이념 체제로 정치해 나갔고 이남엔 민주주의 체제로 정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로부터 1993년 4월 오늘에 이르기까지 48년간이나 오랜 세월 동안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 된 채 같은 동족으로서 원수같이 지내야 하는 가장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 누구나 한 번쯤은 서울에 갔다 왔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나는 윤창덕 감독님과 같이 1946년 4월에 38선 경계를 넘어 서울에 가서 여러 목사님과 친구들을 만나 뵙고 한 달만에 목회지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서울서 돌아온 그날부터 서울에 갔다 온 것을 알게 된 까닭에 가현리의 공산 당원의 주목을 받게 되어서 더 이상 가현교회에서 목회 할 수 없었기에 평양서 대동강 건너 20리 가량 떨어진 유신리 교회로 부임했으니 때는 1946년 6월이었습니다. 그 때의 서부연회장님은 송정근 목사님(현재 대구 남부교회 송창화 장로님의 부친) 이셨습니다. 나는 3개월 동안은 유신리 교회의 담임자로 목회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서 9월 초순부터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게 된 것은 38선 경계를 넘어 갔다 오고 또한 서울에서 한 달간 머무는 동안 편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또한 먹는 것도 시원치 아니한 탓이 였습니다. 나는 불면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어서 마음은 더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나 대신 말씀을 전했으니 집사람은 신학교 2학년을 수료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롭게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에 집사람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었다면 유신리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불면증 증세가 점차 나아짐으로 잠도 잘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전과 같이 목회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극진히 사랑하시어서 나 자신을 병고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 후에 1947년 8월 13일에는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름을 선목(善牧)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1남 4녀인데 귀한 아들이라고 하겠으며 연세대 음대 성악과 졸업을 하였고 현재는 인천시 혜광학교 이사장의 직책을 갖고 있습니다. 혜광학교(惠光學敎)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이니 맹아학교라고 하겠습니다. 혜광학교 옆에는 그들을 수용하는 광명원이 있는데 그들을 위한 숙소라고 하겠습니다. 식사와 잠자리 다 식비를 내지 않고 값없이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유신리 교회에서 목회할 때인데 우리 가정에 슬픈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의 어머님께서 68세를 일기로 그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머님의 일생은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끝까지 지신 일생이셨습니다. 나의 어머님 혼자서 4남매중 3남매를 결혼시켜서 살림을 차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어머님의 땀과 피와 눈물의 결정체라고 하겠습니다. 더욱이 나의 어머님은 나를 신학교 졸업시키기까지 갖은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평양의 남산 감리교회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던 성화 신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있어서 공산주의 정치를 하는 그들도 처음엔 신학교 교육을 허락하였습니다. 성화 신학교의 교육열은 대단하였습니다. 성화 신학 교내에는 고성과 예과 본과가 있었습니다. 고성과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주일에 등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퇴학당한 학생들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때 학생들 중에는 당시 신앙의 지조를 지키려고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느라 학교에 등교치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그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신앙의 지조를 지킨 탓으로 퇴학을 당한 학생들은 성화 신학교 고성과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고성과에서는 일반 고등학교 과정 그대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성화 신학교 초대 교장님은 배덕영(裵德榮)목사님이었으며 부 교장님은 박대선(전 동부연회 감독)목사님이었으며 교수님은 김용옥 목사님과 한승호 목사님과 그 외 몇 분의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평양 시내 교회에서 목회 하던 윤창덕 감독님, 지금 미국에 계신 김용련 목사님과 부족한 제가 강사로 신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장님과 교수님들과 여러 학생들은 공산 치하에서도 그들의 신앙이 뜨거워졌습니다.

북한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그리 편치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공산 당원들이 볼 때 목회자란 자기들의 사상에 반대편에 서 있음으로 목사님들의 뒤를 미행하다가 붙잡아 갔습니다. 배덕영 목사님과 남산 교회의 손정근 목사님(서부 연회 연회장님이였음)과 김경운 목사님(서평양교회의 담임자였음) 그 외 여러 주님의 종들은 공산 당원들에게 식구들도 누구 한 분 모르게 붙잡힌 채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이북 공산 치하에서 어디든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때 연세로 38세 이상에 해당되는 분들은 누구나 군사증을 발급 받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어느 날 밤에 공산 당원들이 갑자기 나를 붙잡으려고 나의 집을 수색하러 왔던 것입니다. 만약 그 날 낮에 내가 군사증을 발급 받지 아니했더라면 나는 공산 당원들에게 총살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 죄인을 극진히 사랑하여 주심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6. 6.25 전쟁의 승리

우리 나라에서 급기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다섯 시에 일제히 남한 전역을 점령하려고 38선 경계에 배치되어 있는 인민군들에게 남한으로 진군의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바로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국군들은 전날인 토요일에 휴가를 얻어 후방으로 갔기 때문에 남한의 38선 경계는 텅빈 상태였으니만큼 서울은 인민군들에게 3일 만에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한의 우리 겨레는 꼼짝 못하고 김일성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에 인민군들이 남한을 침략해 돌진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엔 총회장은 긴급히 안전 보장 이사회를 모이도록 하였고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군을 파견하도록 가결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소련 대표가 이사회에 출석하여 유엔군을 파병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 소련 대표가 안전 보장 이사회에 참석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남한에 유엔군을 파병토록 가결을 보았습니다. 그때 16개국의 군인들로 구성 된 유엔군이 남한으로 속속히 오는 대로 인민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에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으며 1950년 9월 28일은 인민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찾은 수복의 날입니다. 유엔군과 국군은 계속 북한 땅을 향하여 진군했으니 급기야 10월 19일에는 38선 경계를 넘어 평양까지 도착했습니다. 유엔군이 신의주까지 도달하여서 이북땅 전부를 점령하려는 즈음에 갑자기 중공군들이 인산인해로 떼를 지어 진군해 옴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 억압을 당하고 있던 북한의 많은 동포들은 자유를 그리워하던 때라 부모들은 어린이를 업고 손에 손을 잡고 발걸음을 남한으로 옮겼습니다. 나와 우리 식구는 1950년 12월 4일 아침 일찍이 우리 교회 성도들과 같이 유신리 동리를 떠나 발걸음을 남한으로 향하였습니다. 공산 당원들은 목사 된 나와 나의 가족을 붙잡으면 그들이 용서 없이 우리를 총살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사람이 임신 9개월이었지만 믿음으로 남한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네 살, 일곱 살, 열 살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황주까지는 왔지만 더 이상 서울까지 500리 길을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위급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나는 영국 부대의 공병대 차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공병대 차는 점검 후에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주저 않고 공병대 차의 영국 군에게 달려가서 "안녕하십니까? 나는 평양 지방 감리교의 목사입니다. 나와 우리 식구를 서울까지만 데려다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부탁을 듣고 있던 영국 군인은 나에게 "Are you minister?" 즉 "당신이 목사님이십니까?"라고 하더니 그같이 바쁜 중에서도 그의 차에 타라고 하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가 운전하는 공병대 차에 탔습니다. 이같이 나와 나의 식구 넷은 영국 군인의 사랑과 호의로 서울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때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 영국 군이 주의 종 목사를 귀히 보고 존경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만약 그때 내가 목사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랐더라면 우리는 도저히 자유의 땅으로 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와 나의 식구는 더욱이 어린아이들과 임신 9개월 된 집사람까지 서울까지 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나와 나의 식구는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총리원의 대책 위원회의 지시대로 서대문 냉천동에 있는 서대문 교회(고 유산성 목사님께서 담임하였음)에 갔습니다. 이북에서 온 목사님의 가족은 서대문 교회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서대문 교회에 머물던 우리 식구와 다른 여러 목사님의 가족 일행은 인천 부둣가에 가서 부산까지 가는 배를 탔습니다. 1950년 12월 25일 구주 성탄을 우리 일행은 배안에서 지켰습니다. 동족과 동족의 싸움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마음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구주 성탄을 지켰습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부산까지가 아니라 부산에서 마산으로 향하는 중간에 위치한 가덕도(加德島)에 닻을 내렸습니다. 가덕도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각각 집주인의 호의로 단칸방을 주어서 지내게 되었는 바 우리도 방 하나를 주어서 피난 생활이지만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덕도에 도착한지 한달 만인 1951년 1월 24일에 셋째 딸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습니다. 셋째 딸 이름을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진숙(眞淑)이라고 지었습니다. 셋째 딸은 호수돈 여고를 졸업하고 세종대 미술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만약 집사람이 셋째 딸을 피난하기 바로 며칠 전에 낳았다던가 서울에 도착하면서 며칠 후에 낳았다고 하면 집사람은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었습니다. 평양서 부산까지 5백리 거리, 부산서 배를 타고 가덕도 섬에까지 와서 한 달만에 셋째 딸을 낳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하겠습니까? 진심으로 우리 식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7. 군목 생활의 보람

가덕도에 오신 여러 목사님과 목사님 가족들은 그곳 교회에서 새벽 제단을 쌓을 때 새벽종은 내가 도맡아 치곤 했습니다. 적은 일이지만 무사히 북한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왔으니 감사한 마음이 있어 조금이라도 봉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번은 총리원 본부로부터 나에게 초교파적으로 군목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감리교 대표로 군목으로 지원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본부의 지시대로 군목으로 지원했습니다. 나는 1951년 3월 한달 동안 군목으로 받아야 할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이 모든 과정이 끝나자 나는 처음엔 대구에 있는 제일 육군 병원에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병원 군목실장의 신분으로 병실에 있는 상이 병자들을 찾아 예배를 드리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후에 부산에 있는 제3육군 병원, 육군 제9사단, 육군 제2보충대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임명되어 소속 부대 장교들과 하사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군목으로 봉직한 기간은 1951년 4월 1일부터 1955년 3월까지 4년간이었습니다.

나는 4년간 군목으로 봉직하면서 있었던 특기할 만한 몇 가지만 적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제일 육군 병원의 군목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입니다. 한 번은 병실에 있는 상이군인을 찾아뵈었는데 그 군인은 두 팔 다 잘린 채 누워 있겠지요. 그 군인은 일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동상에 걸려 전신이 다 썩기 전에 의사가 동상으로 썩어 가는 두 팔을 수술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은 군인들과 유엔군이 우리 대신 죽고 병신까지 된 덕인 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후에 내가 9사단에 임명되어서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참모 회의를 가졌을 때의 일인데 참모장님께서 참모들에게 지시하기를 9사단의 마크 즉 표식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마크 그림을 그려 올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써서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참모 회의가 끝나자 나는 군목실에 와서 백마(白馬)를 그려서 제출했습니다. 계시록 19장 11절에서 16절까지를 본다면 백마를 타신 만 왕의 왕되시며 만주의 주되시는 예수께서 공의로 심판하며 사탄과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백마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내가 그린 백마 마크가 통과되었습니다. 그후부터 9사단을 백마 부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백마 부대는 월남 전쟁 때 참전하여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육군사관학교의 군목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때입니다. 육군사관학교의 학생을 생도라고 부릅니다. 육사의 생도들은 시험 때 머리만 돌려 옆에 있는 생도의 시험지를 보는 것이 발각되면 곧 퇴학 처분을 받으며 또한 거짓말 한 마디라도 하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육사의 교육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인격적으로 부족한 생도는 졸업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육사의 교육은 모든 일에 엄격하다고 하겠습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 남한과 북한의 군 총사령관 협의 하에 먼저 상이병을 교환하기로 결의되어 실천 단계에 들어갔을 때 나는 군목 대표로 피택되어 상이군인 교환 장소인 문산으로 갔습니다. 며칠 후에 이북서 송환되어 온 국군 상이병을 위로하면서 그에게 인민군이 국군과 여러 인사들을 붙잡아 갈 때의 경우를 알고 싶으니 말해 달라고 하였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군목님, 제가 보고 또한 들은 대로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간악한 인민군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평양을 지나 신의주까지 보행으로 갈 수 있는 군인들이나 민간인들과 국회의원은 살려주어 인민군을 따라가도록 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도저히 보행할 수 없는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은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로써 인민군들의 야만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군목으로 군부대에서 봉직하면서 놀라 왔던 일 중에서 하나만을 더 적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방위군 총사령관의 사취(詐取)사건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의 남침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많은 청년들은 나라 위해서 자진 군 입대를 하였습니다. 국방부에서는 군에 자원해 온 청년들을 제주도에 보내서 훈련시킨 후 일선 부대에 배치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위기일발에 놓여 있었던 그때 방위군 총사령관인 김윤근씨는 방위군을 위한 부식비 및 부식품 등을 사취(詐取)하여 훈련받는 훈련병들은 제때 부식비 및 부식품이 전달되지 아니하여서 그때 훈련받는 훈련병들은 영양실조가 되어서 폐병으로 고생하는 훈련병이 속출하였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때에 귀한 돈을 사취하다니 이 무슨 벌받을 행위입니까? 결국 김윤근 방위군 총사령관은 그후에 사형대에서 아침 이슬같이 사라졌습니다. 야고보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있는 대로 누구나 물욕에 대한 욕심을 품으면 결국 부끄러운 죽음뿐임을 알아서 우리는 결코 물욕에 욕심을 품지 말아야 할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8. 목회 생활의 연속

나는 4년간 군목으로서의 군복무를 끝내고 교회에서 목회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군에서 제대 후에 동부 연회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결심하기를 어느 교회에서든 다시 말해서 도시 교회든 농촌 교회든 관계없이 "명 목사님, 우리 교회에 오셔서 목회 하지 아니하시렵니까?"하고 말 한마디라도 한다면 나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겠고 부족한 나를 청하는 교회가 어느 곳이든 가기로 마음먹고 연회에 참여했습니다. 연회가 시작한 그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춘천 중앙 교회의 소속 목사님이신 김우종 목사님께서 나의 손을 붙잡으시더니 "명 목사님, 듣건대 군에서 제대했다고 하는데 춘천 중앙 교회에 오셔서 복음을 증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겠지요. 나는 두말 않고서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연회가 끝난 후에 춘천 중앙 교회로 가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그때가 1954년 4월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교통은 상당히 불편한 편이었습니다. 그때 춘천 중앙 교회는 본래 병원이었으나 6.25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그 자리에 임시로 가건물을 세워 예배드리게 되었기에 먼저 내가 할 일은 교회를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춘천 중앙 교회에 부임하여 첫 주일에 예배드렸는데 비가 오면 가건물이었으니만큼 교회 천장에서 비가 새 들어오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선교부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 왔습니다. 내용인즉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교회에 재건할 명목으로 500만원까지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였습니다. 이로써 나는 중앙 교회에 부임하면서 새로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는 임원회를 소집하고 그 사실을 말한 후 건축비 500만원을 선교부에 신청했습니다. 얼마 후 건축비로 500만원이 전달되었습니다. 교회의 건축 임원회는 책임지고 100만원을 헌금하여서 600만원으로 아담하게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1954년도에 600만원이면 그리 적은 돈이 아니 였습니다. 건축비가 중앙 교회에 배당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1956년도부터 춘천 지방 감리사직도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구역회를 인도하려면 춘천시 특히 다섯 군(郡)(양구, 화천, 춘성, 인제, 홍천)에 있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구역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구역회를 인도할 때는 제프리 선교사가 그의 차로 구역회가 모이는 교회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제프리 선교사는 1954년에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와서 30년간이나 선교 사업을 하다가 귀국했는데 그는 다른 선교사와는 달리 특별히 어려운 학생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신학생들은 등록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에 제프리 선교사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대주었습니다. 춘천 지방에서 목회 하던 어느 교역자는 등록금 때문에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는데 제프리 선교사가 책임지고 등록금을 대주어서 신학교를 졸업하는데 지장이 없었으며 그는 현재 은혜롭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많은 선교사가 왔었지만 제프리 선교사같이 신학생들에게 관심을 두고 여러 신학생들을 적극 도와준 선교사가 별로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춘천 중앙 교회에 부임해 온 지 2년 6개월만에 즉 1957년 6월 14일에 넷째 딸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름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애가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영숙(榮淑)이라고 지었습니다. 넷째 딸은 연세 대학 교육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안양시에 있는 대신대 보육 학과에서 강사직을 맡고 있으며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가정 살림을 잘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나 또한 춘천 지방 내에 있는 여러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좀더 정성을 모두어서 열심을 품고 많은 노력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찬물을 퍼붓는 것 같은 도저히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장로님 두 분이 나를 다른 교회로 옮기도록 계획하는 것이 였습니다. 1959년 연회를 앞두고 어느 수요일 예배 후에 갑자기 임원회를 나의 허락 없이 소집하더니 다음 연회때 명 목사님을 다른 교회로 옮겨가시도록 의논하고 가부(可否)를 물어 보았습니다. 12명 임원 중에 박 장로와 김 장로 두 장로만이 다른 교회로 가도록 하자는 데 찬성했고 다른 열 명의 임원은 명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시는 것을 찬성치 아니했습니다. 박 장로님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나에 대한 불만은 다름이 아니고 내가 교회에 부임하면서 교회 건축할 기회를 자기에게 주지 아니한 것에 대한 불만을 4년간이나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건축은 건축 위원회에서 의논한 후에 추진되는 것인데 박 장로님은 내게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투표로 주님의 종을 다른 교회로 가시게 하자는 의논을 하는 것부터가 불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나를 만류하는 임원들도 많았지만 다른 교회로 가서 새로이 목회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어떻든 나의 교회 이동 문제를 투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리 기분이 좋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나의 목회 생활에 있어서 교인 중 몇 분이 다른 교회로 옮겨가기를 원한다면 나는 깨끗이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목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목사님 중에는 교인들이 자신을 마다하고 다른 교회로 가기를 원할 경우 교인들이야 다 떨어져 나가도 나만은 홀로 교회에 남아 있겠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같은 소견을 갖고 있는 목사님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상처 주는 것은 주님께와 성도들에게 상처 주는 것이기에 교역자는 누구나 그 교회에서 떠나야 할 때는 주저 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춘천 중앙 교회는 크게 부흥되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주님께로부터 칭찬 받고도 남음이 있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1959년 3월말일게 춘천 중앙 교회에서 떠나 인천 창영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우리 식구가 인천창영교회로 부임하면서 큰딸은 이화 여고 3학년에, 둘째 딸은 이화 여고 1학년에 입학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창영교회에 부임하였지만 교회가 큰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임 목사님께서 박태선 장로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여하여도 좋다고 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중에는 잘되었다는 듯이 200여명의 교인이 전도관으로 이적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낙심치 않고 정성을 다해 교회 부흥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이 등록하였으며 창영교회서 8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대전 목자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나의 8년간의 창영교회에서의 목회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부임하여 창영교회에 갔을 때는 200명가량 모였지만 8년 후 즉 1967년에 창영교회를 떠날 무렵에는 장년만 500명 이상 모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500명의 교인이 모인다면 그런 대로 많이 모이는 교회로 인정되었습니다.

내가 8년만에 창영교회를 떠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미국 교회와의 교환 목회로 미국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환 목회로 미국으로 가면 4개월 후에나 귀국하게 되므로 창영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창영교회로 부임한 지 1년이 지난 1960년 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루는 고등부 학생인 이진성 군(현재 시카고 방주교회의 목사이심)이 내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제물포 고교 1학년인데 동급생인 한 친구가 고아원에서 연령 관계로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곳을 나와야 할 형편이니 장로님 댁을 소개해 주시면 장로님 댁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그 집안 일도 돌 볼 수 있으니 부탁합니다"라고 말하겠지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알아보았지만 다들 수락할 수 없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학생을 집사람과 의논한 후에 우리 집에서 우리 식구와 같이 있도록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와 우리 식구는 1.4후퇴때 엄동설한에 북한 땅에서 무사히 하나님의 은혜로 왔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여 결국 그 학생을 우리 식구와 같이 지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 학생은 제물포 고교 1학년이었으며 1.4 후퇴때 부모를 잃고 혼자되어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고아원에서 계속 있을 나이가 지나서 할 수 없이 고아원에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은혜로 그 학생은 우리 집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제물포 고교 1, 2, 3학년, 연세대 공과대학(토목과)을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한 식구같이 지냈습니다. 남의 식구가 우리 식구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만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여 감사함과 기쁨으로 그를 우리 식구로 여겨 10년간 지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어느 고등학교의 수학 교사로 봉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의 장로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족한 이 죄인이 주의 종이 되었고 온 식구가 북한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와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으며 또한 교환 목회로 미국까지 가게 되었으니 이같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고아를 나의 식구로 여겨 10여 년 간 지냈다고 하여서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한 것뿐입니다.

9. 4개월간의 교환 목회

내가 교환 목회로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만일 그때 내가 다른 교회에 초빙 받았더라면 금방 초빙 받아 간 교회의 임원들과 교인들에게 교환 목회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허락이 잘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 때를 따라 내게 은혜를 주셨듯이 이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 초빙 받지 않고 목자관 관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목자관 관장으로 임명이 되었으니 4개월 동안의 교환 목회를 편히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목자관에 대해서 아는 대로 적어 보려고 합니다. 목자관은 쇼(William Show)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쇼 선교사는 우리말로는 서위렴(徐偉廉) 선교사라고 불렀습니다. 쇼 선교사님은 문요한(G. Z. Moore)선교사님과 함께 평양요한신학교를 창설하였습니다. 쇼 선교사는 일선에서 목회 하는 목사님들로 한 주일 동안 조용히 목사관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능력을 받을 뿐 아니라 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목회에 새 활력을 얻도록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쇼 선교사님의 이와 같은 신앙적인 뜻과 계획에 의해서 목자관이 설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쇼 선교사께서 주의 종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쇼 선교사는 독자인 그의 아들을 우리 나라가 위급할 때 친히 우리 민족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6.25전쟁으로 우리 나라가 인민군의 남침으로 위급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아들 해밀턴 쇼(Hamilton Show)는 친히 일선에 나아가서 싸우기 위해 지원하였으며 쇼 선교사님은 그의 외아들이 6.25전쟁에 참전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해밀턴 쇼는 일선 지대인 서울 북부 지역 녹번리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끝내 전사했습니다. 때는 1950년 9월이었습니다. 또한 쇼 선교사는 아들을 잃은 후에 아들을 기념하는 교회를 대전 신학교(현재는 목원대) 교정에 건립하였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고 해밀턴 쇼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쇼 선교사는 세상을 떠난 후 서울 양화진 외인 묘지에 그의 아들과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내가 교환 목사로 미국에 머물렀던 4개월 동안에 두 교회의 담임자인 두 목사님이 목회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켜보았다는 것보다도 나는 친히 그들이 목회 하는 것을 배웠다고 하겠으니 예를 들어 그들이 심방할 때도 나도 같이 심방 했으니 실은 그들이 행하는 그대로 따라서 행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목회를 하는지를 배운 셈입니다. 나 자신이 4개월 동안에 교환 목사를 끝내고 느낀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두 목사님은 내게 그들이 섬기는 감독님의 권면대로 설교 할 때는 원고를 다 살핀 후 열심히 기도하고 정성껏 읽고 나서 원고를 보지 않고서 말씀을 전한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열심으로 설교 준비하고 심방도 열심히 하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같이 열심으로 목회 하여야 감리사님과 감독님께 인정받고 큰 교회로 임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4개월간의 교환 목회 기간에 열 두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물론 이곳서 떠날 때 영어로 설교 준비 한 것을 가지고 갔으므로 영어로 설교를 할 때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으며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많은 교인들이 제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4개월 동안에 교환 목회를 끝내고 1968년 1월에 다시 대전 목자관으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사고 없이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고 귀국하였으며 계속 목자관장으로 목자관에 오시는 여러 목사님께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영력을 얻고 돌아가시도록 힘썼습니다. 그리고 대전 신학교에서 한 과목 강의하라고 고 이운호 학장님께서 제게 부탁하기에 신학생들에게 강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운 것이 있었다면 교회에서 목회 할 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양계를 함으로써 생활비를 보충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신학생들 중에는 나를 가르쳐 닭 목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4개월간 교환 목회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체류비와 왕복 비행기 요금도 나를 초빙한 두 교회에서 부담하였는데 나를 초빙한 두 교회의 목사님께서 그 동안 많은 수고를 했다고 천불을 주었지요. 나와 나의 가정에 있어서 천불이라면 그때 돈으로 적지 아니한 큰 금액이었습니다. 더욱이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지 못하고 고민 중에 있었던 때에 천불이란 귀한 것이 나의 손에 쥐여졌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나와 나의 가족 식구들은 진심으로 우리를 계속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로써 나의 아들이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환 목회로 미국 교회에서 4개월 동안 봉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물론 나 자신이 좀더 은혜롭게 목회를 하여야 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실천할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도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섭리구나! 하고 가끔 지금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126편 3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였습니다.

10. 말기(末期)의 목회 생활

어느 날 인천 지방 중부 교회의 장로님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 읽었습니다. 내용인즉 중부 교회에서 부족한 나를 초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기도를 한 후에 결론 내리기를 중부 교회에서의 초빙을 수락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관 관장의 직무를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교회에서 목회 함으로써 더욱더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부 교회는 1950년 6.25 전쟁으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성도들이 자유로이 남한에 와서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인줄 알고 먼저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1952년 4월에 설립한 교회입니다. 초대 목사님은 송주범 (현재 인천 북지방 효성중앙 교회 담임)목사님이십니다. 나는 1969년 4월에 5대 목사로 중부 교회(현재 인천 서지방에 속해 있음)에 부임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리 크게 부흥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현재로는 크게 부흥되었는데 이는 김일준 목사님께서 중부 교회에 8대 목사님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김 목사님께서 정성을 모두어서 목회를 한 탓인 줄 압니다.

내가 중부 교회에 부임한 지가 5년이 지난 1974년 11월 어느 날 안양 중앙 교회의 담임 목사인 이영종 목사님(현재 은퇴 목사님이심)께서 찾아와서 "명 목사님 제가 집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부터 도저히 현 교회에서 목회 하기가 어려우니 다른 교회에서 목회 하도록 인도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이 목사님과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내가 소개하고 중매한 관계로 친근히 지내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나는 이 목사님을 위해서 이 목사님께서 목회할 교회를 알아보았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이 목사님은 나를 찾아 왔습니다. 나는 기도하던 중 내가 안양 중앙 교회로 가서 1985년 은퇴할 때까지 10년간의 목회를 끝내고 은퇴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또다시 교회 이동 문제로 왔기에 나는 이 목사님께 "이 목사님께서 중부 교회로 오고 내가 안양 중앙 교회에서 목회 하도록 합시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나의 의견을 즐겨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각각 장로님께 사정을 말하니 쾌히 우리의 제안이 받아 들여졌습니다. 두 지방의 감리사님께서도 허락하여서 서로 교회를 옮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1975년 1월13일에 이 목사님의 가족도 우리의 가족도 무사히 이사했습니다. 나는 안양 중앙 교회에 초빙 받아 첫 주일에 예배를 드렸으며 말씀을 기도하고 정성을 모두어서 준비한 그대로 전했습니다. 본 교회는 안양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따로 1969년 4월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나는 1975년 1월 18일 첫 주일에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 모인 교인이 40명 가량 이였으며 교회의 평수는 68평이 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은퇴할 때까지 남은 10년은 죽도록 충성하리라는 결심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했으며 정성을 모두어서 말씀을 전했으며 또한 힘을 다하여서 심방도 했습니다. 때가 되면 십여 명이 한뜻 한마음이 되어서 감사함과 기쁨으로 심방 했습니다. 비록 교회는 크지 아니했으며 교인은 40여명밖에 모이지 아니했으나 날이 갈수록 처음 믿기로 작정하고 나온 신자와 다른 곳에서 안양으로 이사하여 온 교인들이 새로이 등록하였습니다. 5년쯤 지나서는 40여명 모이던 교인이 300여명 모였으며 처음엔 68평이던 교회가 330평 될 만큼 아담하고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아니하겠습니까? 나와 온 교인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1980년도에 부목으로 백창현 목사님을 초빙하였으며 백 목사님은 나의 남은 목회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은퇴하는 1985년을 3년 앞두고서 부목에게 주일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일 예배 때의 설교를 한 번씩 번갈아 하도록 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5년간 안양 중앙 교회에서 목회 하는 동안에 부목과 나와 교인 모두가 주안에서 화목한 중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현재 안양 중앙 교회는 안양 시내에 있어서 가장 은혜가 있고 부흥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중앙 교회에서 목회 할 때 중요한 일 한가지를 적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안양 중앙 교회에 1975년에 부임했는데 그 다음 해 1976년 3월달 부터 안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무기수 세 사람을 한 달에 한번씩 빠짐없이 1985년 4월 은퇴할 때까지 여선교회 회원과 같이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여선교회에서 친히 식사까지 준비한 것을 갖고 가서 그들과 같이 식사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하기를 9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들 중에 이종석 형제가 만 17년만에 형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신학교 입학을 하였으며 졸업한 후에 인천에 개척을 했습니다. 교회 이름은 양문 장로 교회라고 하며 인천시 남구 주안 8동에 소재한 지하 교회입니다. 개척한지가 1993년 11월이면 만 6년째입니다. 안양 중앙 교회의 여선교회와 남선교회에서는 지금까지 계속 전도비를 양문교회에 전할뿐만 아니라 계속 양문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신학교 입학할 때 등록금으로 집사람이 백만 원을 이 목사님께 준 일도 있습니다.

나는 1985년 4월에 인천 내리 교회에서 모이는 중부연회 때 은퇴식을 갖고 47년간의 목회를 끝맺고 안양 중앙 교회서 은퇴하였는데 아무 잡음 없는 목회 생활의 마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47년간의 목회 생활에 있어서 첫째로 교회는 주님께서 보혈로 사신 교회요(사도 20:28) 또한 예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니(엡 2:22) 교회의 화목을 위주로 하는 목회를 했습니다. 교인간의 다툼 목회자간의 알력 또한 목회자와 교인간의 불목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교회는 화목의 교회요 사랑의 교회여야 한다고 나는 절실히 느낍니다.

둘째로 나는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써 47년간의 목회를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충성은 신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실하면 한자로 信實이라고 씁니다. "신(信)"은 믿을 신 자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믿고 아래로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신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매일같이 상대하는 사람에게 신실치 못하면 참 기독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47년간의 목회 생활을 무사히 끝맺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나의 아내의 숨은 기도가 있었고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든지 목사님들의 부인의 기도와 성의 있는 뒷받침에 있어서 자랑스러운 목회자가 됨같이 나도 예외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47년간의 목회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재차 말하며 나로 하여금 47년간의 목회를 끝맺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 은퇴 후의 목회 생활의 연속

내가 은퇴하기 전 해인 1984년 9월에 장광영 목사님(현재 성동 지방 금호제일교회 담임)을 모시고 부흥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식사가 끝난 후에 장 목사님이 내게 "목사님 내년에 은퇴하면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겠지요. 그때 나는 장 목사님께 "나는 본 중앙 교회에서 보다는 다른 교회에서 은퇴 목사로서 힘이 있는 대로 봉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장 목사님께 "목사님, 목사님께서 담임한 교회에서 원로 목사로 봉사할 수 없겠는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의 말을 듣고서는 "좋습니다. 우리 교회의 원로 목사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이 말은 저의 은퇴 후에 그대로 실천이 되었습니다. 나는 1985년 4월 은퇴한 후에 장광영 목사님께서 초빙하여 줌으로써 1995년 3월이면 지금까지 만 10년간 계속 본 교회에서 봉직하게 됩니다.

나는 처음에 금호제일교회의 원로 목사로 부임할 때 세 가지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목회 할 때도 그랬듯이 세상 딴 이야기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 할 것과 두 번째로는 거리가 멀고 가깝고 관계없이 시간을 지킬 것과 셋째로는 처음 대하는 교인들이 나에 대하여서 단정하고 예절바르다고 말할 수 있게 할 것, 이상 셋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위의 셋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속한 금호제일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교회에 남아 있다가 저녁 예배도 드립니다. 수요일 예배는 출석 못합니다. 장 목사님께서는 내게 2부예배 때는 말씀 전할 기회를 줍니다.

원로 목사 중에는 소속한 교회만 나아가 예배드리지 않고서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때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소속 된 교회와 주택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소속 된 교회에 나아가서 예배드림으로써 교인들과의 믿음과 사랑의 교제가 두터워지며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목회 하는 목사님과 교인들 중에는 원로 목사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것은 원로 목사 된 우리가 적은 일에나 큰 일에나 본이 못되는 탓인 줄 압니다. 목사님은 70세에 은퇴하여 원로 목사가 됩니다. 은퇴한 목사님은 계속 목회자로서 사생활과 공생활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이 생활하리라는 신앙의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은퇴하기 전 목회 할 때와 같이 성경 연구와 기도 생활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노라 말할 수 있는 원로 목회자로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생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원로 목사님 중에서 은퇴한 후 1, 2년 내에 주님 앞으로 가시는 목사님이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히려 은퇴한 후에도 더욱 계속 깨어 기도하며 열심히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을 돕는 뜻으로 교회 봉사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출처 : 금호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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