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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문안교회] 훨씬 더 좋은 일 (빌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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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13일 주일 설교- 이수영 목사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처음 로마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에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그는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결과에 따라 죽을 가능성과 죽음을 면하고 풀려날 가능성을 둘 다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죽게 될 경우와 석방되어 더 살게 될 경우 각각의 의미와 유익을 모두 숙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죽게 될 경우에 대해서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21절을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은 온통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가 사는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주와 함께하는 것이었고, 주와 함께함이 그에게는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는다면 더 이상의 고생 없이 온전히 주님과 함께하며 그를 더 충만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기에 죽는 것은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함은 그런 뜻입니다.

23절에서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그의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석방되어 더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살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보다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5절에서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자기를 살려주실 것이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믿음의 진보를 이루며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6절도 같은 내용의 말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과, 24절에서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한 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더 살아야 할 생각 사이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절에서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하며 22절에서는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정리하면, 사도 바울 자신은 죽는 것이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사는 길이므로 이 세상에서 계속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린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더 살게 하신다면 그의 뜻을 따라 변함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며 주 안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무슨 일에든지 그리스도의 사도 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행하여 자기 몸이 죽든지 살든지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을 표현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첫 절의 말입니다. 곧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바르게 정립하는 일에 대단히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무조건 죽지 않는 것과 맹목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소망 때문에 사는 것이 기쁘고 죽는 것도 두려워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 때와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죽는 것은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좋아해야 할 일이고, 사는 것은 주님을 위해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유익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무조건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중요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으면 죽기를 바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사는 것이 더 유익하면 살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국민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나라를 최고의 기술을 가진 나라로 인정하는 분야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배아줄기세포 연구 분야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서울대의 황우석 교수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일약 국제적인 학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아마도 대통령 다음으로 삼엄하게 국가차원의 경호를 받는 국내유일의 대학교수가 되었고,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연구비 지원을 받는 국보급 학자가 되었습니다. 벌써부터 그를 가리켜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수상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이끌고 있는 연구가 그렇게 우리 국민과 나라의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연구가 무엇입니까? 배아줄기세포입니다. 줄기세포가 무엇입니까? 줄기세포는 뇌, 심장, 간, 뼈, 혈액, 피부 등의 세포로 분화하기 직전의 원시세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210여 가지의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다양한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각종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세포와 조직과 장기를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줄기세포연구입니다.

줄기세포는 크게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배아줄기세포는 완전한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초적 인간생명체인 배아로부터 추출하고 배양한 세포이고 성체줄기세포란 성인의 일부 특정조직에서 추출하고 배양한 세포입니다. 그러므로 배아줄기세포연구란 완전한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명체인 배아를 특정 세포나 조직이나 장기를 만들기 위해 파괴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배아생명살해행위를 낳는 연구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구미선진국에서는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미의 선진국에서는 종교적,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성체줄기세포연구에 노력했고 상당한 진전과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현재 성체줄기세포로 치료가 가능하거나 유력시되는 질환들은 뇌졸중,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며병, 백혈병, 겸상적혈구성 빈혈, 재생불량성 빈혈, 척추손상, 화상, 심장손상, 근이영양증, 외상, 관절염, 당뇨병, 각종 암, 자기면역질환, 대사성 질환 등입니다.

그런데 성체줄기세포 이용의 단점은 그 배양속도가 배아줄기세포에 비해 아주 느리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가 경제성이 높고, 그래서 윤리의식이 특이하고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이 애매한 현 정부가 큰 기대를 걸고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법의 엄격한 규제와 예민한 윤리의식 때문에 안 해온 연구를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윤리적 갈등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용감하게 했기에 다른 나라보다 앞서게 된 것입니다. 젓가락질을 오랫동안 해온 민족이 돼서 손놀림에 의한 조작기술이 뛰어난 것은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 앞서가게 된 원인으로서는 아주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연구에서 앞서가는 것, 아니 이 연구에 착수한 것 자체가 잘한 것이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에 있어서 사람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수정되어 생성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기도 하지만 동물의 난자를 이용하여 배아를 만들고 이 과정에서 줄기세포를 얻기도 합니다. 즉 사람과 동물의 이종간 교잡에 의한 배아의 생산이라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는 지난 2000년 세계 최초로 이종교잡을 시도하여 소의 난자에 호랑이의 체세포핵을 이식하여 대리모 암사자를 임신시키는 데에 성공한 바 있습니다. 이 방법은 인간복제에 사용될 때에 결과적으로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반인반수의 괴물이 등장할 가능성을 여는 행위입니다. 끔찍한 재앙을 예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입을 모아 인간복제는 안 할 것이며 그 연구조차 할 의사가 없다고 말들 하지만 사악한 죄성을 가진 인간 중 누군가 언제나 맘만 먹으면 그 끔찍한 재앙으로 귀착될 일에 악용할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이종간 교잡에 의한 배아의 생산을 자제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체세포복제방법으로 수정란을 만들기 위해서는 난자가 절대로 필요하고 많은 난자가 필요합니다. 정상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난자만 가지고는 실험을 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과배란을 시키는 약물을 여성에게 투여해서 한 번에 많은 수의 난자를 채취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동물의 난자를 이용해서 배아를 만들고 줄기세포를 추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작년 황우석 교수의 이른바 "세계 최초 인간 체세포복제 성공"도 242개의 난자를 기증한 16명의 여성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황교수의 성공 발표 때에 서구 과학자들의 관심이 황교수 연구팀이 어떻게 242개나 되는 난자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에 쏠렸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많은 배아를 얻기 위한 인위적 행위는 결국 여성착취 또는 여성의 인권유린이라는 측면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줄기세포연구의 성과는 단지 난치병치료에만 머물 것이라는 보장이 절대로 없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맞춤형 교체장기를 생산하는 데에 이 연구와 기술을 남용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조작기술과 함께 이 기술은 고성능 인조인간의 출현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의 평등, 박애, 평화의 이상은 조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간적 존재라도 될 고성능인간이 출현하는가 하면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고성능인간과 짐승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짐승과 인간 사이의 잡종괴물까지 등장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 빨리 죽고 마는 것이 가장 행복할 세상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침해된 상황은 곧바로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배아줄기세포연구를 정죄하며 비난하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난치병으로 고생하며 줄기세포연구의 발전과 성공에 온통 희망을 걸고 있는 이들의 치유의 희망이 꺾이지 않도록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투자가 강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생명의 존엄성 실종, 상품화, 도구화, 전쟁무기화, 창조질서의 파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고유영역에 대한 도전과 침해라고 하는 모든 문제의 소지가 줄기세포연구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은 철저히 예방할 것이라 하드라도 모든 일이 선한 방향으로 되지 않고 뜻하지 않은 부작용과 돌발적 사태가 발생하곤 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줄기세포연구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난치병의 치료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 갖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또한 수명연장입니다. 즉 장수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병을 고치겠다는 뜻 속에도 장수의 욕구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오래 살려 하고 어떤 일을 위해 오래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장수의 욕심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을 좋게 여기기보다 무엇이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만을 좋아하느라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머무르라고 허락하시는 동안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동안 최선을 다해 주를 전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살려 하고 언제 하나님께서 부르시든 기쁨으로 하늘나라로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의 관심과 노력의 대상인 건강도 맹목적인 건강이 아니라 주의 일을 바로 하고 더 잘 하기 위한 건강이어야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영원한 삶을 늘 사모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건강과 수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셋째, 그래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언하는 일에 담대한 일꾼들이 되며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로 여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훗날 주님 오실 때에 그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복된 삶을 살기를 더욱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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