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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철저한 유학의 신봉자가 교회 장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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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유성준(兪星濬,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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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준 장로(1860-1934)는 안동교회를 설립한 분 가운데 한분이며, 유학에 철저한 신봉자였다가 1903년 한성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1922년에 안동교회 장로가 되었고, 중앙학교 교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고, 충청도지사, 강원도지사를 지낸 분이다. 그가 자기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를 <긔독신보>에 7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간증문을 현대어로 고쳐 올린다. - 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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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생지는 경성북부 계동(桂洞)이었다(1860년 庚申生). 나는 대대로 유교(儒敎)를 숭상하는 엄격한 가정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經傳)을 배워 연구한 결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가 다만 유교에만 있는 줄 알고 다른 교는 다 이단과 사도(邪道)로 배척하여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지내왔다.

1883년 가을에 관비생(官費生)으로 일본 동경에 가서 복택유길(福澤踰吉)씨의 경영하는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중 그 이듬해(甲申) 겨울에 개혁당(改革黨)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제씨가 개혁에 실패를 당하고 망명(亡命)한 때이라 그 반대당 정부는 학비를 주지 아니함으로 미이미교(감리교)신자 안천형(安川亨)씨의 주선으로 동경 쳥산학원(미이미교 경영학교)에 전학하게 되어 남과 같이 예배석에 참례하기는 하나 이것이 일시 얻어먹고 공부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는커녕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학원주인 [매콜네](米國人)씨가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면 그 교리의 대지를 대강 안 후에 믿기를 작정하겠노라 거짓말만 하고 속마음에는 기회만 있으면 귀국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할 계획만 강구하였었다.

1885년(乙酉)에 본국으로부터 수신사(修信使) 서상우(徐相雨)씨가 건너왔음으로 귀국하기를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또 사관(使?)에서 비용을 얻어 청산학원에서 여러 달 먹은 식비를 다 갚고 안천형씨와 [매콜네]씨의 전도하는 말은 도무지 귀에 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미주로서 [아펜젤라]씨가 동경에 건너와 있었는데 나는 [매콜네]씨의 소개로 그에게 조선국문을 교수하였고 귀국할 때에는 [아펜젤라]씨와 동행하면서 전도도 많이 듣고 또 조선전도사업에 동역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세계 유일인 공부자 대성인의 정도를 준봉(遵奉)하는 당당한 유자(儒者)로서 사교를 얻지 믿으랴하고 거절하였다.

1886년(戊子) 여름에 [아펜젤라]씨와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친척 되는 조씨가 하로는 내방하여 은근히 전도하고 상해에서 인출한 순한문성경 한 책을 줌으로 부득이 받아 두었으나 당초에 사학이라고 엄하게 배척하는 고로 한번도 펼쳐보지 아니하고 즉시 책을 뜯어 뒤집어 매여 쓸데없는 시와 노래를 쓰는데 초지로 사용하였다.

1895년(乙未) 겨울에 정변(政變)으로 인하야 중형 길준(仲兄 吉濬)씨와 기타 여러분으로 더불어 일본 동경에 망명하야 잇는 동안에 하로는 동지 윤치오(尹致旿)씨가 축지(築地)로 전거(轉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희문(趙羲聞) 이진호(李軫鎬) 양씨와 작반하여 심방하고 술을 나누어 먹는 동안에 나는 이곳으로 전거한 이유를 물었다. 윤씨의 대답이 이곳은 서양인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촌인 고로 선교사를 사귀어 그리스도교를 믿고 영어를 좀 배울 경영이 있다하기로 나는 별안간 분이 나서 술잔을 던지고 소리 질러 말하기를 우리가 용우(冗愚)하야 나라를 위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명을 도망하여 구차히 사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스스로 근신하여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사자(士子)의 당연한 도리거늘 외인을 사귀어 사교를 믿고 우리 선조의 전하여오는 공맹의 정도를 배반코자 하니 진실로 한심한 일이로다 만일 이 비루한 사상을 버리고 이곳을 떠나지 아니하면 나 개인이 절교(絶交)할 뿐 아니라 동경에 있는 우리들 중에서 일제히 배척하리라 하고 무수히 말을 하면서 좌석에서 일어섰다. 그 주인의 만류하는 말도 듣지 아니하고 소매를 떨치고 나와 숙소로 돌아왔더니 몇 날 후에 윤씨는 다른 곳으로 전거하고 나에게 와서 전일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사례하였다. 나는 그후에도 그리스도교 전도인을 보면 항상 모욕하는 말로 대항하고 공맹의 경전을 좀 아는 옛사상과 정치의 서적을 좀 아는 새지식을 가지고 수제치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여 매일 술도 먹고 혹은 잡기도 하며 정부당국자를 욕하고 비방함으로 능사를 삼고 지내왔다.

의외에 1899년(己亥) 가을에 본국 정부로서 조칙을 받들어 특별히 부르시는 명이 계신 고로 중형과 및 동지들을 이별하고 돌아와 계동 본집에 잠복하여 있었다.

1902년(壬寅) 2월 하순에 감기로 인하여 신음하는 중 한 벗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경위원 총장 이근택(警衛院總長 李根澤)이 그대들 몇 사람을 포박코자 한다 하니 멀리 도망하여 피하는 것이 좋다함으로 나는 대답하되 한번 망명의 고초도 이미 시진하였으니 차라리 고국에서 감옥생활이 낫지 아니하냐 하고 태연히 여기고 있었더니 과연 그 이튿날 이른 아침에 어떤 사람 수명이 돌연히 달려들어 경위원 총장의 명을 전하고 같이 가기를 강청하는 고로 교자를 타고 경위원에 간즉 총장 이근택의 말이 당신이 일본인 누구 누구를 연락하여 우리 정부의 전복(顚覆)을 음모(陰謀) 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는 무근지설(無根之說)로 힐문함으로 나는 당초에 이런 일이 없다고 답변하고 여러 날을 이와 같이 길거(拮据)하다가 나중에는 두 손을 결박하여 경무청으로 보내었다. 경무청에 간즉 경무사 이용익(李容翊)이 크게 노하여 꾸짖는 말이 네가 동경에 있는 네 형 길준과 연락하여 역모(逆謀)를 감행(敢行)하니 어찌 이러할 도리가 있느냐 하며 호령이 추상같았다. 나는 뜻밖에 이런 책망을 당함으로 안연히 당초에 이런 일이 없노라 답변하고 그 날밤으로 옥(獄)에 갇히었다. 이날은 저녁도 먹지 못하고 냉돌 위 거적자리에 쓰러져 누어서 신운(身運)을 탄식하며 시국(時局)을 원망하고 밤이 맞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평리원(平理院)으로 보내 예심(豫審)에 부치고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다. 세 번이나 이런 곤경을 당한 후 5월 하순에 감옥으로 옮겨 갇히었다. 감옥에 나간 후에야 비로소 이샹재(李商宰) 이원긍(李源兢)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祺) 이승인(李承仁) 제씨도 다 동일한 사건으로 나와 같이 그날에 포박된 줄 알았다. 다섯 평에 불과한 감옥방에 20여명을 가두었으니 앉고 눕고 하기를 임의로 할 수 없을 뿐더러 강도 절도 사기 횡령 등 죄인과 섞여 있음으로 그 말과 행동은 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또 서책을 감옥서장에게 청구한즉 옥중규칙에 허치 아니한다 하나 이 때에 감옥관리들도 우리들이 무죄히 갇힘을 동정함으로 이상재 이외 제씨가 가끔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우리들이 이 옥에서 나가는 날에는 이근택을 무고죄(誣告罪)로 고소하여 도리어 율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분한 말이나 하면서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하루는 연지동교회 교우 이창직(李昌稙)씨가 순한문성경 한 권을 보내었다. 글 읽을 욕심이 팽창하던 중에 다른 서적은 없을 뿐더러 그 무지한 사람들과 접어(接語)하기가 싫어서 마태복음 1장에서 시작하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어 지내가나 그 뜻을 깨닫지 못할 뿐더러 구구절절이 다 허언(虛言)과 환술(幻術)에 불과한즉 우리 유교에 대하여는 참 이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때때로 의사에 불합하여 한구석에 던져두었다가 곁에 사람의 수작을 방지(防止)하기 위하여 다시 잡아당겨 읽기를 달이 넘도록 하였다.

또 원두우(元杜尤) 뻥커(房巨) 양 선교사는 주일마다 오후이면 번갈아 옥에 들어와 갇힌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또 이승만(李承晩)씨의 주선으로 신약성경 외에도 다른 한문 서적을 많이 보내주어 간간이 열람하며 마태 1장으로 묵시 끝장까지 1년간에 무릇 일곱 번이나 내리 읽어 장구는 익숙하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옥중에서 엄금하는 술을 현가(現價) 三四배 이상을 옥졸에게 주고 사드려 비밀히 먹으며 담배는 옥리의 앞에서도 거침없이 먹고 자기의 죄악은 조금도 깨달음이 없이 당국을 저주하는 마음만 점점 더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음으로 간간이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이 논맹용학(論孟庸學)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여 예수의 성(聖)이 공자와 비등하다는 사상이 일어났다.

1903년(癸卯) 겨울 11월 어느 주일에 원두우목사가 옥에 들어와 우리 몇 사람과 옥중에 있는 신자 몇 사람을 모아놓고 강설한 후에 나에게 묻기를 {형이 성경을 읽은 지 1년이 이미 지났은즉 예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대답하기를 {공자와 같은 성인으로 생각하노라} 또 원목사의 말이 {하나님께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느냐}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노라 한즉 원목사의 말이 {기도는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는 법이니 형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신줄 알리요}하고 즉시 기도하는 절차를 가르쳐주고 그 이튿날 순한문으로 저술한 기도조례 1책을 보내었다. 이후로 그 책을 낭독하며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해 12월 어느 날 기도하는 지음에 졸연히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눈물이 비오듯하며 40평생에 경과한 일절 행동이 정직 염결 공평한 줄로 자신하고 자랑한 것이 다만 자기를 위하는 명예와 공리심뿐인 이 죄를 황연히 깨닫고 그날에 마태 7장 9절로 11절을 읽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구주의 넓고 크신 은덕을 감사하며 마음이 평안하여 무한한 즐거움이 자연히 생겼다.

이해 12월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음은 모두 이근택씨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옳다하고 원수 갚을 생각이 이같이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1904년(甲申) 1월 하순에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제씨는 다 무죄방면 되고 이승인군은 방면되지 못하였으며 나는 재판정에서 3년 유형(流刑)의 선고를 받은 후 유배지(流配地)를 출원하라 하기로 전라남도 고군산도(古群山島)를 청원하였더니 그 이튿날 자부( 夫) 탁지협판(度支協辦) 류정수(柳正秀)씨가 공사로 탁지대신 심상훈(沈相薰)씨 댁에 갔다가 그 좌중에서 유배죄인들의 유배지 청원한 말이 일어나는 중 심상훈이 류협판을 향하여 말하되 형의 처제(妻弟) 유모(兪某)가 고군산을 자원함은 지리를 알지 못함이다 연전에 내가 유형으로 두어달동안 그 섬에 가 있었는데 장기( 氣)로 인하야 병에 걸려 무수한 고난을 당하였은즉 유모에게 황주 철도(鐵島)로 출원하게 함이 좋다하였다. 이 섬이 좋다는 이유는 자고로 이 섬에 유배인은 속히 돌아올 뿐 아니라 혹 섬에 유치 아니하고 황주읍에 체류하는 예가 있다 함이었다. 류협판이 이 뜻을 통지하였음으로 즉시 황주 철도로 다시 출원하고 그해 2월 상순에 특히 유형 3년 감1등의 은칙(恩勅)을 받고 숭례문(崇禮門) 밖에 나가 첨정(僉正) 박태윤(朴台胤)씨 집에 숙사를 정하고 행리를 준비할 새 어육(魚肉)의 찬은 비린내가 나서 도무지 먹을 수 없음으로 채소만 먹으며 또 전신이 수척하여 걸음을 걷지 못하고 변소 출입에도 사람에게 붙들려 다녔다. 그러나 끊임없이 위문 오는 친척고구에게 피로한 줄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어 영혼과 육신이 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힘있게 말하였다.

이곳에서 유한지 7일만에 배소(配所)로 떠나는데 압송 경관 한사람과 나의 처질 서상팔(徐相八)군과 동행하여 인천항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진남포에 도착하여 김영찬(金永燦)씨 집에서 수일을 유한 후 조선배를 타고 떠나 조수(潮水)의 관계로 어두운 밤에야 철도에 이르니 지척을 분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사공에게 업혀 배에서 나릴 새 사공이 실족(失足)하여 물에 떨어지자 다행히 나는 발판 우에 서게 되여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상륙하고 또 사공도 구원한 후 간신히 갈밭(蘆田)사이로  길을 찾아 들어간즉 조그마한 술집이 하나 있음으로 누추한 온돌이나마 하룻밤 자기로 하였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는 고로 같이 간 사람들은 막걸리를 사먹고 나는 공복으로 하룻밤 지내어 이튿날 아침에 조밥(粟飯) 한술을 먹고 떠나 황주읍내로 가고자하나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어찌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중에 그 동리 사람이 말하기를 저 건넛마을 최생원의 집에 나귀가 있다하기로 그 주인을 방문하고 교섭한 결과 주인은 후의로 나귀를 빌려주어 그날로 황주읍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황주읍에 도착하여 큰길거리에 있는 여관에 숙사를 정하고 두어 달을 지내는 동안에 다릿심도 회복되고 걸음도 걸을 수 있게 되여 황주읍내를 구경할 차로 떠나 돌아다니다가 한곳에 이르니 예수교 예배당이라는 간판을 붙인 八九간되는 초가집 한 채가 있다.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인을 찾은즉 남자는 출타하고 다만 여자만 있는 고로 그날은 그대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다시 방문하고 주인과 성명을 통한 후 주인이 나에게 믿는 여부를 묻고 어느 교파에 속하였느냐 함으로 나는 감옥에 있는 중에 믿기로 결정하고 성경을 읽다가 철도로 유배되어 이곳에 왔노라 한즉 주인은 흔연히 동정하면서 이 교회는 즉 북장로파요 교우는 20명 미만이라고 목사도 없이 조사와 영수만 있는 조그마한 교회이라 하며 은근한 정의가 얼굴에 나타남으로 나는 주인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되어 예배당 주인과 나이가 한 40 되어 보이는 점잖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피차 초면의 예를 하고 성명을 통한즉 한 사람은 그 교회 조사 이재중(李載重)씨요 또 한 사람은 그 교회 영수 김기황(金基璜)씨였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 집은 길가에 있을 뿐더러 불신자의 집인즉 거처가 심히 비편하겠다고 하며 돌아가더니 그 이튿날 이 김 두 교우가 다시 와서 말하되 가합한 곳이 있으니 이전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가본즉 현직 황주 단위대 오장 최진태(崔鎭泰)씨 집 사랑인데 그의 모친은 신자이었다. 즉시 이전하고 그 이튿날은 주일이라 믿기 작정한 후 예배당 출석은 처음이었다.

옛날 양반으로 자존하는 마음이 오히려 있어 조그만 성경을 품에 품고 예배당 문 앞에 이르러 좌우를 돌아보고 사람 없는 틈을 타서 들어가니 예배석에 앉은 사람은 20명에 불과한데 남녀로 유의 의복은 다 황토빛이오 언어와 행동이 서울과는 딴판이라 양반이 귀양은 왔지만은 이 좌석에 섞여 앉기는 창피하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좌석인즉 참는 것이 옳다하고 종용히 앉아 강설을 듣는 중 강설하는 사람의 외모는 보잘 것 없으나 그의 말에는 감탄열목할 점이 많으며 또 남녀 신자가 모여 앉아 교회 모든 일을 의론할 때에 여자의 변론이 합리함을 듣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으며 그후 수요일 기도회와 토요일 공과회에도 늘 참석하여 믿는 마음이 점점 굳어 수삼주일을 지난 후에는 신구약셩경 큰책과 찬미 큰 책을 보자기에 싸서들고 사람의 있고 없는 것을 관계치 아니하고 엄연히 예배당에 출입하며 한편으로는 교우의 자질들을 나의 여관에 모아놓고 신식 교과서로 교수한즉 다른 서당에서 취학하던 불신자의 자제들도 입학을 원하는 자가 많아 학도가 수십 명에 달하였으며 또 아동의 부형에게 전도한 결과 신자가 점점 증가하여 예배당을 좀 넓은 곳으로 이전하였다.

이후부터는 가끔 교회의 청구에 의하여 주일과 삼일에 설교를 하였으며 그해 가을에 미국선교사 이울림(李蔚林)씨에게 입교문답을 행하고 학습교인이 되었다. 이해 12월분에 나의 둘째 아들 철겸(喆兼)이 서울로서 내려왔는데 반년만에 부자가 타향에서 서로 만나보니 그 기쁨은 한량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정은 반년동안 나의 교육한 아동보다 별로 더함이 없음을 깨달을 때에 나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형제자매]라 하신 큰사랑을 깨달았다. 그후에 황주 각처의 촌교회와 평양교회를 시찰하는데 각 교우의 친절한 대우에 감복할 뿐 아니라 교우들 사는 촌중에는 술먹고 도박하는 자가 없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번문허례(繁文虛禮)와 성황사찰(城隍寺刹)의 축원하는 미신과 무격승니(巫覡僧尼)의 유혹이 없는 고로 경제상으로 유예하고 또 사업에 근면하며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여 송사가 없으며 국법을 중시하여 세금을 불납자보다 잘 받치며 공익심이 풍부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사업을 장려함에 힘이 있다. 이렇게 변천된 것을 볼 때에 나는 무한한 감상을 얻고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었었다.

1905년(乙巳) 여름 4월 중순 어떤 날밤 꿈에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너의 유형이 특사 되었다 함으로 꿈을 깨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형기가 아직도 1년 3개월 (3년에서 감1등하여 2년 6개월)이나 남았으며 또 중형은 동경에 있어 역적이라는 이름도 풀리지 못하였고 친척간에 주선하여 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더구나 역적의 동생으로 귀양온 자를 누가 구조하여 특사될 리가 있으리요. 꿈은 참 허사로다 하고 성경을 읽다가 유연(悠然)히 남산을 바라보는 즈음에 한 학생이 선생님 선생님 부르면서 전보 한 장을 가져다준다. 바쁘게 떼어본즉 과연 어젯밤에 특사령이 내렸다는 자부(姉夫) 류정수(柳正秀)씨의 전보이었다. 그때에 곧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드리고 자연히 눈물이 흐르는 중 학도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어찌 이별할가 하고 호곡하며 교우들은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일변으로 감사한 기도를 드리며 일변으로 상경하지 말고 이 고을에 거주함이 어떠한가 하고 권면하는 이도 있었다. 그 이튿날은 나의 장자 각겸(珏兼)이 서울로부터 내려와 그 이튿날로 발정코자 하였으나 모든 교우들과 학생들의 만류로 하로 이틀 하는 것을 열흘을 지난 후에야 부득이 섭섭한 눈물로 이별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후 집안 사람은 사도(邪道)를 믿는다하여 극력 반대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회개하고 장녀 각경(珏卿)을 이화학당에 입학케 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경향을 물론하고 상중계급의 가정 여자로서 규문을 나와 거리에 다니는 자 한 사람도 없음으로 친척고구가 모두 반대하고 훼방하여 사교 믿는 자의 패리(悖理)한 행위라고 핍박이 자못 심하였으나 조금도 개의(介意)치 아니하고 도리어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류정수씨가 종용한 곳에서 진정으로 은근히 권유하는 말이 이제로부터 길을 고쳐 선세의 옛업을 회복함이 옳지 아니한가 또 정부에서 사교를 믿는 자는 등용(登庸)치 아니하니 그리스도교를 그만두고 환로(宦路)로 나오라 함이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수 없을 뿐더러 벼슬을 얻고 못얻음도 하나님의 뜻에 있으니 어찌 인력으로 하리요 하고 벼슬은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고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제씨의 권고를 좇아 연지동교회에 입참하여 세례를 받고 게일박사와 함께 순조선문 신약을 선한문으로 교작(交作)하는 일에 종사하며 일변으로 배재학당 한문교사로 한 주일 여섯 시간씩 교수하고 유쾌하게 지내어왔다.

그해 12월에 갑자기 내부로서 경기도 통진 군수의 임령이 있다. 오랫동안 궁굴하였던 남아에 영광이 아님은 아니나 당시 사정으로 생각하면 군수의 박봉으로는 도저히 가족의 생활과 기타 각항 비용을 지당할 수 없고 도리어 공금을 다리여 쓸 염려가 있음으로 굳게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6년(丙午) 이른봄에 내부 경무국장의 임명이 있는 고로 명령에 유하야 복무하는 중 그해 구력 5월 단오절을 당하여 궁내부 장례원(宮內府掌禮院)의 통첩이 있다. 비서관 오재풍(吳在豊)씨가 와서 말하되 만일 제관을 사퇴하면 면관류형(免官流刑)하는 등록이 있다 한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 신자라 면관류형(免官流刑)을 당할지언정 제관도차의 명은 봉행(奉行)치 못하겠으니 이 뜻으로 장례원에 회답하라 하였더니 영능 제관도차는 경무국장 당직인즉 회피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엄절한 통첩이 또 왔다. 오비서관이 황겁하여 통첩을 가지고 와서 말하되 만일 일향 회피하면 엄벌을 당할터이니 순종하여 곧 행함이 좋지 아니하냐 함으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신자는 자기 조선의 제도 폐하고 행치 아니하는 고로 이를 사퇴함이오 회피함이 아니며 또 경무국장의 당직이라 함은 장례원에서 자의로 정한 것이오 법률칙령으로 정한 직임이 아니며 만일 영능 졔관도차가 칙령으로 경무국장 직무를 정한 조례가 있으면 당초 이 직임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제관도차로 인하여 면관류형의 엄명을 당할지라도 이 명령은 봉행치 못하겠다 하고 이 뜻으로 장례원에 회답하라 하였더니 그 명이 철회(撤回)되고 말았다. 그후 내부 지방국장, 학부 학무국장, 내부형판, 내각 법제국장으로 있을 때에도 각능 도차제관의 통첩이 있었으나 다 사퇴하였다.

그해 가을에 정부대관 몇몇 분이 서대문밖 어떤 대관의 집에 모여 청하는 고로 가본즉 여러분이 은근히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만회할 무슨 좋은 방책이 없느냐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의 용렬한 재주로 무슨 승산(勝算)이 있겠습니가만은 여러분이 허락하시면 오직 한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전의 잘못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구할 도리가 있으리라 하고 일장 전도를 한즉 좌중이 혹 옳다하는 이도 있고 혹 눈을 부릅뜨고 보는 이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한 사람도 믿은 자는 없었다.

1907년(丁未) 가을에 정부에서 을미(乙未)정변에 망명하였던 모든 사람의 억울함을 알고 불러 돌아오는데 중형(仲兄)도 집에 돌아와 함께 단락한 생활을 하는 중 주를 믿으라고 권고한 결과 회개하고 참 진실히 믿었다. 그후 별세하시는 날에 광채가 온 집을 둘러싼 이적이 있었다. 벼슬 다닌 후로 각 연회에서 술을 강권하는 자 많이 있었으나 이것을 일절 거절함에는 적지 않은 곤난이 있었다. 충북도 참예관으로 있을 때에는 사내 총독이 와서 도내의 고등관으로 향연(饗宴) 할 적에도 총독이 친히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였더니 일반은 너무도 고집하는 자라고 지목하였다.

1916년(丙辰) 4월에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였다가 1921년(辛酉) 1월에 휴직하고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그해 5월에는 안동교회의 장로에 피선되어 교회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중에 세상사람들은 말하되 지금 연소한 후진들은 다 도지사로 승진하는데 오직 유장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국에 혐의를 받아 승진치 못한다고 조하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신앙이 벼슬하는데 무슨 방해가 되리요 하고 오직 예수 십자가의 은공을 감복하고 신종하며 자기 육신에 대하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종용히 처리하여감은 실로 성질이 급하던 나로서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다만 넓으신 하나님의 은총만 감사할 뿐이었었다.

나의 성질이 크게 변화된 사실을 들어 말하자면 청주(淸州) 있을 때에 여름철 어느 날 관청에서 늦게야 나와 저녁을 먹는 즈음에 하녀(下女)가 숭늉을 가져오다가 잘못되어 머리로 석유등을  떠받쳐 그 등이 내 밥상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다 파열되어 먹던 음식에는 석유가 혼합되고 방안에는 유리조각이 흩어졌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놀래어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퍽 순한 음성으로 하녀(下女)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말라 유리조각이 너 벗은 발에 찔릴가 염려된다 하며 일변으로 다른 하녀(下女)를 시켜 등불을 켜고 방을 쓴 후에 하녀를 내보내고 다른 자리로 옮겨서 식사를 필한 일도 있으며 또 경성에 온 후 하루는 김운양(金雲養) 선생의 병보(病報)를 듣고 심미산종순(沈彌山鍾舜)씨와 작반하야 문병차로 계산학교 운동장을 지나는 때에 학생들의 차는 공이 갑자기 나의 미간(眉間)에 와 맞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향하여 힐책할 의사가 없이 그대로 지내가다가 생각한즉 가만히 지내가고 말면 청년학생들의 장래를 그릇되게 한가 염려하여 학생들을 불러놓고 나직한 음성으로 경계하기를 내가 공에 맞은 것은 그대들의 일부러 한 일이 아닌 고로 잠잠하고 지나가고자 하나 나이가 이미 성년이 지난 그대들이 한마디도 사과함이 없음은 상식 있는 현대 청년의 큰 잘못인즉 내게 대하야 사과 아니함을 책함이 아니라 이후로는 어떤 사람을 대하야 어떤 과실이 있든지 사과하는 뜻을 표하는 것이 문명한 인사의 당연한 도리라고 가르쳐 준 일도 있으며 또 간혹 노동하는 동포에게 욕설도 듣고 젊은 동포에게 업신여김도 받았으나 태연히 지나가고 가끔 육신으로 좇아나는 세상욕심이 발할 때에는 곧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물리치고 지내어왔다.

1926년(丙寅) 7월 14일 오후에 신문기자 한사람이 찾아와서 나더러 충청남도지사에 임명이 되었더라고 하면서 하례를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이 오전이라 하고 좌상의 객들도 의아하였다. 날이 저물 때에 각처 신문이 왔는데 열람한즉 과연 허언이 아니라 당국에서 바리지 아니하는 후의는 감사하나 나이가 70에 가까워 사무에 게으르니 한 도의 호번한 일을 감당치 못하여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에 방해가 된다면 도리어 사퇴하는 것이 옳지 아니할가 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후 주의 십자가의 도가 자기만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닫고 늙은 몸이나마 도민을 위하여 진력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부임하는 즈음에 한 친한 벗이 와서 종용히 권하되 지위가 도백(道伯)에 이르렀으니 충청남도에 부임한 후로는 예배당에 다니지 아니하는 것이 체면에 합당하다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그대의 후한 뜻은 비록 감사하나 예수교의 신앙은 권모도 아니며 정적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여 구원 얻는 도니 이 정도를 위패하고 어찌 직임에 성심을 다하여 민중을 구제하리오. 이번에 더욱 자기만 위하여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옳지 아니함을 기도하는 중에 더욱 깨달음이 있노라 하고 부임하여 주일이면 예배당에 출석하면서 도청에 진퇴할 때도 항상 기도하였다.

1927년(丁卯) 5월 17일 강원도지사로 전임되어 우금까지 봉직하는 중 각군을 순찰할 때에 어느 고을에 가든지 목사가 찾아와서 설교를 청할 때에는 수행원들은 여러날 먼길에 피로한 늙은 몸을 염려하여 허락지 아니함이 옳다할 뿐더러 나의 생각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으나 어찌 육신의 편의를 도모하여 하나님의 참 이치를 선전치 아니하랴 하고 그 청구대로 응낙하고 출석한 후 첫번 말을 내일 때에는 심히 힘이 없으나 뜻밖에 굳센 힘이 솟아 나와 한시간 이상을 큰 소리로 강도하나 조금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복음은 신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것을 더욱 깨달았다. 내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후로는 감히 거짓말을 하거나 악한 일을 행치 못하였으며 간혹 아름답지 못한 사상이 떠오를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반성케 하는 은혜를 얻음으로 공자의 이른바 [소인은 능히 선을 하지 못하고 군자는 악을 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예수의 이른바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선인이 악을 행치 못한다] 하신 말씀과는 차이가 있는 점을 발견하였고 또 신자에게 대하여 구주 예수의 십자가 공덕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날 뿐 아니라 영원히 있음을 확실히 믿는 동시에 전세계 동포가 다 회개하야 예수의 참 도리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움으로 하나님의 공정인자하신 무한한 은혜를 입어 공존공영(共存共榮)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아멘.

* 이 수기는 <기독신보> 1928년 6월 27일부터 8월 8일까지 7회에 걸쳐 게재된 유성준 장로의 신앙수기이다. 맞춤법을 따라 고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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